38화. 4장 트라우마의 습격. 황금 가을과 연애
황금 가을과 연애
러시아의 가을은 ‘황금 가을’이라 불린다. 우리나라의 가을은 빨간 단풍이 울긋불긋 전국의 산과 들을 수놓아 화려함을 뽐낸다면, 러시아의 가을은 노란 은행잎, 자작나무, 보리수나무의 갈색 잎이 숲과 거리를 물들여 찬란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찬란함은 요란하지 않은 차분하고 명상적인 색조를 띤다. 첫 해 나는 황금 가을이 주위에서 향연을 펼치고 있는 줄도 몰랐다. 둘째 해가 되었을 때 그 유명한 황금 가을을 실감했지만, 여전히 자연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삼 년째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주변을 보며 감동으로 전율했다. 가슴이 설레어 도저히 도서관에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뭇잎들이 밖으로 나오라고 나를 불렀다. 일찌감치 책을 반납하고 도서관을 나와 여름 정원을 비롯해 해군성 앞 광장,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등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러시아의 가을 정취를 만끽했다. 나만을 위해 차려진 만찬을 즐기듯 평소에 가본 적이 없는 외진 지역에 있는 공원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키 큰 은행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길을 걸을 때면 왕족이 되어 사열을 받는 기분이었다.
황금 가을의 압권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푸쉬킨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를 방문했을 때였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페테르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4시간 정도 걸리는 프스코프라는 고대 도시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한 시간 달리니 미하일롭스코예가 나왔다. 푸쉬킨이 그 유명한 『예브게니 오네긴』을 집필했던 곳이었다. 푸쉬킨이 살았던 집 주변과 인근 들판은 온통 황금으로 변해 있었다. 도시에서 보던 풍경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러시아의 풍경화가 레비탄이 그렸던 황금 가을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푸쉬킨이 말을 타고 자주 방문했다는 이웃 마을에 가려고 걷기 시작했는데, 가도 가도 끝없는 황금길이 이어졌다. 도중에 만난 주민에게 얼마나 남았는지 묻자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라고 했다. 그 말은 아직 한참 남았다는 뜻이었다. 나와 친구는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이미 배가 터질 정도로 진수성찬을 먹어 더 이상 어떤 음식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과 같았다. 사진 셔터를 눌러대며 언제 다시 이런 가을풍경을 볼 수 있을까 아쉬워했다. 몇 년 후 다시 그곳을 방문했는데 그때는 여름이어서 온통 초록뿐이었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황금 가을이 단연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해 가을 남편이 페테르부르크로 유학을 왔다. 나는 이전에 신앙으로 교제했던 때가 생각나 그가 온 것이 여간 반갑지 않았다. 그는 오자마자 내게 전화로 그간의 소식을 전했다.
“사귀던 분은 어떻게 하시고 혼자 오셨어요?”
“얼마 전에 헤어졌습니다.”
“아, 어떻게요?”
그는 나에게 상세하게 자초지종을 말해줬다. 부모님의 반대도 반대였지만, 오래 사귀다 보니 이 사람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고 했다. 남편은 우체국이 있는 건물인 핀란드만 앞에 있는 아파트에 하숙을 구했다. 가까운 곳이었기에 우리는 종종 서로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나를 초대해 칠면조 요리를 대접했는데,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칠면조가 그렇게 맛이 없는지 몰랐다.
언제부터인가 그가 내게 전화를 거는 횟수가 잦아졌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노라는 말을 했다. 배우자를 염두에 둔 기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서른셋이었던 나는 마침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결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던 중이었다. 나는 그 나이까지 늘 짝사랑만 하고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유학지에서 결혼상대자를 만난다는 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그런데도 “만약 서른다섯까지 결혼하지 못하면 개종해서 수녀가 되겠습니다.”라는 각오로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나타나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말하니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그냥 친구나 하자고 했다. 왠지 그에게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년간 연애했던 여자와 결별한 지 불과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누군가를 다시 사귀려고 하는 게 너무 경솔하고 가볍게 보였다. 나는 왜 내가 좋아졌냐고 물었다. “중심이 훌륭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 중심을 알아보았다는 거지? 그 답이 맘에 들었다. 나는 다시 단지 반응이 궁금해서 “저한테 장애가 있어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왼쪽 다리가 조금 짧아요. 그래도 괜찮아요?”라고 물었다. 그는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 사람 진짜 진지하네.’ 싶었다. 감동이랄까 그런 게 밀려오고 살짝 눈물이 나왔다. “그럼, 일단 사귀어 볼까요?”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그는 내게 첫 데이트를 신청하며 아이스 발레를 보러 가자고 했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그는 러시아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러시아인들보다 머리가 커서 털모자가 잘 맞지 않아 유학생 중에서 털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잘 어울리지도 않는 털모자를 쓰고 나타난 그의 모습이 너무 이상해 보였다. ‘이 사람 좀 별나네.’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그 얘기를 했더니 그 후로 다시는 그 모자를 쓰지 않았다. 아이스 발레는 푸쉬킨의 단편소설 ‘눈보라’를 모티브로 해서 만든 공연이었다. 스비리도프가 작곡한 동명의 곡이 공연 내내 연주되었는데, 처음 들어본 그 곡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나는 바로 테잎을 사서 그해 겨울 하루도 빠짐없이 들었다. ‘눈보라’는 우리의 테마 음악이었다. 나는 소설의 여주인공 마샤가 된 듯 내가 정말 사랑받고 있는 걸까,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까, 가슴을 졸이며 그 음악을 듣곤 했다.
나는 남편의 진심을 믿기가 어려웠다.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하는 건 알겠는데, 여자로서 좋아하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만큼 내가 한 남자의 사랑을 받을만한 여자라는 자신감이 없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남편이 그리 좋아지지도 않았다. 남자 같은 느낌이 아니라 그저 편한 친구 같았다. 대화를 나눌 때면 나를 꾸밀 필요가 전혀 없고 긴장되지 않았다. 남편은 마치 어린아이같이 순수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나’ 걱정스럽기도 하고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뭔지 모르는 큰 구멍이 나 있는 사람인데 내가 그걸 메꿔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의지할 대상보다 내가 의지가 되어주고 싶은 사람을 알아보았던 것이었다. 남편 역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내게 끌렸던 게 분명하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어느 날 아래로 내리깐 남편의 눈이 사슴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량한 눈매에 매료된 그날부터 봇물 터지듯 좋아하는 감정이 샘솟았다. 내 감정을 고백하자 그때까지 저돌적이었던 남편이 진중해지고 차분해졌다. 좋아한다는 말도 자제했다. 오히려 내가 애가 타기 시작했다. 남편은 하나님에게 확실한 응답을 받으면 그때 청혼을 하겠노라 했다. 나는 그날이 언제일지 기다렸다. 그러던 12월 어느 날 남편은 페테르부르크 대학 근처 네바강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만나자고 했다. 배를 개조해 만든 레스토랑이었다. 학생 신분으로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왜 여기서 만나자고 하는 걸까.’
남편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깔끔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한 송이가 주먹 크기의 장미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그는 내게 그 꽃다발을 내밀었다. 모두 열 한 송이였는데 꽃 한 송이가 너무 커서 다 들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더니 “나와 결혼해 줄래요?”라고 물었다. 나는 “응답을 받은 거예요?”라고 물었다. “네.”라고 그가 답하자 나도 “좋아요.”라고 말했다. “어떻게 응답받았는지 빨리 말해줘요.” 내가 재촉했다. 그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날 아침 읽은 성경 내용을 이야기했다. 한 농부가 우연히 밭에서 보화를 발견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보화가 묻혀 있는 밭을 샀다. 유명한 복음서의 이 이야기를 읽을 때, 그는 보화가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묻혀 있는 밭은 나를 둘러싼 환경이라고 해석되었다고. 보화인 나를 얻기 위해서 나의 아버지와 집안 환경, 나의 상처 등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감동했다. 마침 나도 한 주 전쯤 비슷한 내용의 설교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부족한 점이 많지만, 남편에게 비할 데 없는 보화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한 짝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서른셋에 그렇게 나는 인생의 반쪽을 만났다.
남편이 시부모님께 나에 대해 알렸다. 시아버님은 남편의 말을 듣고 내 사진을 보시더니 겨울방학에 들어와 결혼식을 하라고 하셨다. 1999년 2월 20일로 결혼 날짜가 잡혔다. 만난 지 4개월 만이었다. 우리는 1월에 한국으로 가 결혼을 준비하기로 하고 나름 로맨틱한 연애를 즐겼다. 그 춥던 페테르부르크의 겨울이 그때는 하나도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 속에 난로가 들어가 있는 듯 어디를 가나 마음이 따뜻했다. 그때 알았다. 사람의 마음이 추운 것은 사랑받고 사랑하지 않아서라는 것을. 내 인생에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몇 번 안 되는 시기 중 하나였다.
결혼과 비행공포증의 시작
내가 러시아에 가 있는 동안 막내 남동생은 아버지와 함께 신림동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동생의 차를 타고 내가 모르는 곳으로 가려니 기분이 묘했다. 집은 전보다 훨씬 작았다. 방 두 개와 그 사이에 싱크대 하나 정도만 있는 구조였다. 육십이 넘은 아버지는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숱이 많은 머리칼은 많이 빠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내가 결혼한다는 말에 아버지는 “우리 선화가 결혼하는구나.”라며 기뻐했다. 평소에 내 결혼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그래도 딸이 가정을 이룬다니 좋으신 모양이었다.
시댁에 인사를 갔을 때 시아버님은 우리를 앉혀놓고 결혼식 비용을 조목조목 종이에 적으시면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들을 일러 주셨다. 결혼 준비가 촉박해 우리는 거의 시아버님의 지시에 따랐다. 서른이 넘은 아들의 결혼에 일일이 관여하는 시아버님이 내게는 낯설지만 한편 든든하게 여겨졌다.
이제는 아버지에게 남편을 소개할 차례였다. 남편은 연한 갈색빛이 도는 근사한 양복을 차려입고 신림역으로 왔다. 남편의 집과 너무나 비교되는 우리 집을 어떻게 생각할까. 충격을 받지나 않을까 싶었지만,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작은 안방으로 들어섰다. “아빠, 사위 될 사람이에요. 절 받으세요.” 우리는 나란히 아버지에게 절을 했다. 내가 아버지에게 그렇게 절을 해본 건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남편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합격!”이라고 소리쳤다. “아니, 아무 말도 안 해보고 벌써 합격이에요?” 나는 핀잔을 주듯이 말했지만, 늠름한 모습의 사윗감을 보고 만족하는 아버지 모습에 속으로는 흐뭇했다. “너무 쉽게 합격 돼서 좋겠다.” 남편에게 웃으며 말하니 “그러네.” 했다. 남편은 나름 긴장을 했었다고 했다.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해서 아버지가 좀 무서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이가 드셔서인지 전보다 험악한 인상이 옅어졌다. 몇 년 전까지 그렇게 무서워했던 아버지였다는 게 실감이 안 날 정도였다.
그러나 결혼하러 한국에 와서 나는 그동안 몰랐던 아버지 얘기를 동생들에게 듣게 됐다. 편지에는 늘 아버지가 잘 계신다고 썼던 동생들이었다. 내가 삼 년 후면 돌아오니까 그때까지 참으면 될 줄 알았던 거였다. 그런데 막상 내가 결혼하고 러시아에 더 오래 남게 되자, 동생들은 기쁘면서도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막내 남동생은 아버지와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 지친 상태였다. 아버지가 술을 먹고 고주망태가 되어 쓰러져 있으면 사람들이 파출소에 신고했다. 그러면 파출소에서 동생에게 연락이 와서 데리러 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결혼한 동생 부부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돈을 달라, 반찬을 가져와라 보챘다. 느닷없이 동생 집에 들이닥쳐 올케에게 욕을 하고 추태를 부린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동생은 자세한 이야기를 피했지만 조금만 들어도 어땠을지 짐작이 갔다. 동생의 얼굴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사실 지금까지도 정확히 모르고 있다.
나는 이런 상황에 결혼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역시 내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들이 감당해야 했던 희생이 너무 컸다. 결혼했으니 동생 부부가 잘 감당하리라 기대했던 게 얼마나 순진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었는지 내 자신이 밉고 후회스러웠다. 앞으로 또 몇 년을 그렇게 지내야 할지 몰랐다. 나는 카페에서 남편을 만난 자리에서 “결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엉엉 울다가 의자 위에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를 못했다. 남편은 조용히 내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울음을 그치고 멍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나를 달래면서 남편은 그렇다고 결혼을 안 하는 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결혼하고 차차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했다. “해결책이 어디 있어? 내가 와야 하는데...”
내가 돌아와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해결책도 있을 수 없었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못처럼 박혀서 몇 년 동안 빠져나가질 않았다. 결국 나는 예정대로 결혼식을 치르고 러시아로 돌아왔지만, 남은 기간 내내 어서 돌아가 동생들과 아버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단 하루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엄청난 채무를 지고 도망 다니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마음의 짐이 너무 무거웠지만 그 무엇으로도 가볍게 할 도리가 없었다. 아마도 그 부채감이 러시아에서 내가 발병하게 된 이유였던 것 같다.
우리는 돌아가는 길에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했다. 제주도를 다녀오긴 했지만, 뮌헨과 퓌센, 로텐부르크가 우리의 진짜 신혼여행지였다. 여행을 마치고 페테르부르크행 비행기를 탄 것은 저녁 일곱 시 경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는 세 시간 남짓 걸렸다. 비행기가 페테르부르크 도착을 한 시간 정도 남겨두었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승무원이 커피를 가져다줬다. 커피잔을 드는 순간 갑자기 비행기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더니 커피가 내 옷에 쏟아졌다. 승무원도 당황하여 흘린 커피를 치우고 곧 자리에 가 앉았다. 모두 벨트를 매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처음의 쿵 하는 충격 후에 한동안 비행기는 심하게 흔들리며 비행을 계속했다. 라도가 때와 같이 다른 사람들은 별 반응 없이 그대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나는 커피가 쏟아질 때 너무 놀랐다. 처음으로 비행기 안에서 공포를 맛본 나는 그때부터 좌불안석이었다. “여보, 나 무서워...” 남편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내 손을 잡아주며 괜찮다고 했다. 그때부터 도착할 때까지 내 심장은 계속 쿵쾅거렸다. 나는 제발 속히 도착하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비행기가 무사히 착륙하고 나서도 놀란 가슴이 쉬 진정되지 않았다.
내게 비행공포증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후부터는 비행기를 타는 상상만 해도 겁이 났다. 꿈에서도 비행기를 타는 꿈을 자주 꾸었다. 그 후 어쩔 수 없이 비행기를 타야 할 때는 죽을 맛이었고, 비행기가 흔들리기만 하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떨었다. 그것이 비행공포증이란 것을 안 것은 몇 년 지나서였다. 비행기를 탈 때 항불안제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을 한 시간 간격으로 여섯 번 정도 먹어야 안정됐다. 일시적인 과다복용으로 그날 있었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내가 비행공포증만 없었더라면 지구 어디까지 가려 했을지 모를 일이다. 배와 비행기를 자유롭게 타지 못하는 것이 한동안 내 생활에 큰 불편을 주었지만, 이제는 내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