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4장 트라우마의 습격. 스베타의 죽음
스베타의 죽음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나는 스베타의 집이 아니라 남편의 하숙집으로 곧장 들어갔다. 신혼집을 구할 때까지 당분간 그곳에서 지내기로 했다. 도착한 후 며칠 지나 짐을 가지러 스베타 집에 갔다. 스베타는 내가 결혼하러 한국에 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돌아오면 그 집을 떠난다고 미리 말해뒀었다. 스베타가 우리에게 문을 열어줬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불과 한 달 반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을까. 원래 마른 체구였지만 살이 쏙 빠져 몸이 쪼그라들었다. 얼굴은 쭈글쭈글해지고 살이 없어 뼈가 툭 불거져 나왔다. 눈은 휑하고 낯빛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스베타, 얼굴이 왜 이래요?”
“오오, 소냐. 말도 말아. 아팠어.”
얼마나 아팠길래...그런 스베타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비카에게 물어보니 한동안 앓았다고 했다. 그런 스베타를 두고 집을 나가려니 왠지 배신하는 것만 같고 마음이 아려왔다. 건강이 아주 많이 나빠진 걸까. 괜찮을까.
남편과 짐 정리를 마치고 스베타에게 인사를 했다. “스베타, 정리되면 놀러 올게요. 가끔 올게요.” 스베타는 내 눈을 보며 슬픈 표정으로 “소냐, 정말 우리를 떠나는 거야?”라고 물었다. 떨리는 스베타 목소리에 미안해서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제 다시 함께 살 수는 없을 터였다. 이년 반 동안 지냈던 곳을 그렇게 훌쩍 떠나려니 스베타 마음이 얼마나 허전할까 싶었다. 겸연쩍게 웃으며 곧 다시 만나자고 발길을 돌렸다. 그것이 스베타를 본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 저녁 전화가 왔다. 스베타와 가까이 지냈던 이웃 보바였다. 손기술이 좋아 집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달려와서 도와주곤 하던 착한 남자였다. 작은 키에 말을 좀 더듬었다.
“소냐!”
“네, 보바. 무슨 일이에요?”
“스...베타가 죽었어.”
“네???”
나는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분명 며칠 전에 봤는데 그 사이 스베타가 죽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언제요? 왜요?”
“오늘 낮에...소냐, 소냐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스베타가 암 환자였어. 삼 일 고통받다가 오늘 죽었어.”
나는 뒤통수를 큰 몽둥이로 맞은 것 같았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터져버린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보바에게 물었다.
“무슨 암이었는데요? 왜 나한테는 숨겼는데요?”
“대장암이었어. 소냐가 왔을 때 이미 시한부 판정을 받았었어. 소냐가 알면 나갈까 봐 우리 모두 비밀로 한 거야.”
기가 막혔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스베타의 병이 도대체 뭔지 늘 궁금했었다. 나를 제외하고 주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니. 나를 놓칠까 봐 말을 못했다니...나는 전화기를 붙들고 말했다.
“나한테 말이라도 해주지. 난 그것도 모르고...”
“소냐가 이렇게 슬퍼할 줄 몰랐어.”
보바는 외국인 하숙생인 내가 스베타에게 얼마나 정이 들었는지, 나의 슬픔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 느끼고 감동하는 것 같았다.
“장례식이 언제예요? 어디예요?”
바로 다음 날 아침 멀지 않은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른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 시간 이상 목 놓아 통곡했다. 지난 이년 반 동안 스베타는 내 눈앞에서 죽음과 싸우고 있었는데 까맣게 몰랐다는 게 너무나 슬펐다. 가엾은 스베타...며칠 전 스베타의 말이 다시 귓전에 울리는 것 같았다. “우리를 떠나는 거야?” 그때 스베타는 임박한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을까. 사십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스베타의 마지막 날들에 내가 함께 있었는데, 좀 더 세심하게 신경 쓸걸, 그랬다면 알았을 텐데. 더 잘해줄걸. 후회와 슬픔으로 그 밤을 보냈다.
다음날 정교 성당에서 스베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러시아에서 흰 꽃을 짝수로 살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러시아에서는 꽃을 반드시 홀수로 준다. 짝수는 장례식에만 사용한다.) 러시아에서 처음 참석하는 장례식이었다. 머리를 꽃으로 장식한 스베타는 관 속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스베타의 몸도 꽃으로 덮여 있었고 드러난 얼굴은 흰 분칠을 해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줄을 지어 스베타에게 다가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볼을 만지기도 하고 이마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눈을 감은 스베타는 이제 모든 고통이 끝났다는 듯 편안해 보였다. “스베타, 잘 가요.” 나는 그저 눈물만 떨굴 뿐이었다. 찾아온 사람 중에서 유난히 내가 더 많이 울었다. 비카의 커다란 눈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갓 성인이 된 비카는 이제 고아가 되었다. 비카에게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장례식 후 교외로 스베타를 매장하는 데까지 따라갔다. 따라간 사람은 소수였다. 비카의 인도인 애인인 솜이 모든 절차를 주관했다. 장례식 비용도 솜이 다 감당하는 것 같았다. 묘지에서 솜의 아파트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장례식의 모든 절차를 마무리했다. 이제 비카는 솜의 보호를 받으며 살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그날만큼은 솜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카가 혼자 남겨지지 않을 테니. 그러나 그 생각도 얼마 후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불안장애의 시작
스베타의 장례식을 치르고 슬픔이 가라앉은 후 우리 부부는 이사할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당시 페테르부르크에는 부동산 중개소가 없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중개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전화로 연락하면 만나서 집을 보여주곤 했다. 페테르부르크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러던 중 지인을 통해서 한 집을 소개받았다. 15층 높이에 있는 아파트였는데 60대 정도 되는 부부가 살고 있었다. 집이 마음에 들어 바로 계약하고 한 달 후에 이사하기로 했다. 이사할 날짜가 되어 우리는 하루 전에 그 집을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웬걸, 주인 부부는 둘 다 술에 취한 상태였다. 우리가 준 계약금으로 술을 사 먹은 것 같았다. 다음 날 이사와야 하는데 짐을 하나도 정리하지 않고 있었다. 화가 난 우리는 마구 따졌다. 그러나 술에 취한 그들과 제대로 대화가 통할 리 없었다. 미안하다며 다음 주에는 꼭 이사할 거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할 수 없이 그냥 돌아왔다. 러시아인들이 신용이 약하기는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 주가 지나 우리는 이삿짐을 다 싸서 그 집을 찾아갔다. 역시 또 두 사람은 아침부터 술에 취해 있었다. 짐은 싸다 만 상태였다. 남편과 나는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도대체 이사 갈 겁니까, 말 겁니까? 우리는 짐을 다 가지고 왔어요.”
“아, 곧 갑니다, 가요.”
주인 남자는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주인 여자도 방에 드러누워 일어나질 못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 터질 지경이었다. “어떻게 해?” 남편에게 짜증을 내니 남편은 잠시 생각하다가 “우리가 이사를 보내야겠어.”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그 사람들의 이삿짐을 대신 싸주기 시작했다. 몇 시간 동안 짐을 싼 후 차를 불러서 그들을 내보냈다. 그들은 가면서 고맙다고 했다. 이미 지쳐서 우리 짐을 푸는 일은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첫 신혼집을 그렇게 구한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술주정뱅이인 주인 부부를 계속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우리는 일단 그곳에 머물면서 다시 집을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비카가 우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냐, 이사 간 집은 어때?”
“말도 마. 주인이 술주정뱅이들이야. 우리 다시 이사 가야겠어.”
“그럼, 우리 집에 와서 살면 어때?”
“너는 어쩌고?”
“나는 솜하고 지내고 있는데 따로 살고 싶어. 네가 집세를 주면 작은 집을 알아봐서 혼자 살려고.”
우리는 그게 낫겠다고 결정했다. 비카가 나가고 그 집을 통째로 쓰고 집수리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카는 얼마든지 집을 수리해도 좋다고 했다.
한 달 만에 우리는 다시 이사했다. 이사하는 날 주인은 멀쩡한 얼굴로 와서는 더 살라고 했다. 우리는 고개를 저었다. 스베타가 죽고 비카가 집을 비운 이전 집으로 이번에는 둘이 들어갔다.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스베타와의 추억이 어린 그 집에 살게 된 것이 내심 좋기도 했다. 아는 한 유학생은 “사람이 죽은 집에 들어가면 안 좋다던데.”라며 걱정했다. 우리는 크리스천은 그런 거 따지지 않는다며 신경 쓰지 않았다. 스베타와 비카가 쓰던 큰 방이 우리의 서재가 되고 내가 쓰던 방이 안방이 되었다. 우리는 곧바로 집수리에 착수했다. 수리는 보바에게 부탁했다. 창틀을 페인트칠하고 벽지를 새로 바르고 바닥을 다시 깔았다. 부엌에 싱크대를 들여놓았다. 조명도 아늑한 느낌이 나게 교체했다. 그렇게 수리하고 나니 집이 이전과는 달라 보였다. 가끔 들르던 비카도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어차피 나중에는 비카가 살 집이라 비카의 의견도 중요했다.
집수리가 끝나고 사람들을 초대해 몇 번의 집들이를 치렀다. 그러던 5월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나며 현관 쪽에서 불이 번쩍하더니 사라졌다. 곧 연기가 들어오고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여보, 불났어!” 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누군가 밖에서 불을 내서 현관에 불이 옮겨붙고 있었다. 현관은 안에는 철재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밖은 원목으로 마감해서 불에 탈 수 있었다. 문틈 사이로 연기가 아파트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밖에 타고 있는 불꽃이 보였다. 남편은 대야에 물을 담아와서 안에서 문틈 사이로 뿌리기 시작했다. “그런다고 불이 꺼져?”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된다는 생각과 함께 빨리 이웃에 사는 선배에게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아파트 맞은편 같은 층에 살고 있는 선배였다. 전화를 거니 다행히 선배가 받았다. “선배님, 저희 불났어요. 빨리 좀 와 주세요.” “응, 알았어.”
선배가 와서 바깥의 상황을 알거라 생각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는 다시 현관 쪽으로 갔다. 남편은 여전히 물을 뿌려대고 있었다.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보, 비켜봐.”하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 앞에 놓여 있는 깔개에 불이 붙어 타고 있었다. 대야의 물을 휙 부으니 순식간에 불이 꺼졌다. 문은 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문은 아직 불이 옮겨붙지 않고 타기만 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그랬지?” 선배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때야 나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집 안으로 들어온 연기를 내보내는 사이 누가 연락했는지 경찰 두 명이 왔다. 경찰은 탄 깔개와 문을 조사하고 누가 그랬는지 알만한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우리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경찰은 서류에 뭘 적더니 어떻게 하겠다는 말도 없이 그냥 가 버렸다. 사람들이 흩어졌고 선배는 나와 남편에게 자기 집에 와서 자라고 말했다. “많이 놀랐을텐데...” 남편은 금방 냉정을 되찾았지만 나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상황이 종료되자 더 무서웠다. 누가 우리를 노리고 방화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다음날 이희재 목사님께 전화해서 사정을 알렸다. 그리고 집을 알아봐 주실 수 있느냐고 부탁드렸다. 그날 나와 남편은 디베랴 교회에 다니는 잔나라는 내 친구의 신세를 졌다. 잔나는 카프카즈 지역의 오세티아 공화국에서 온 나와 동갑인 미혼 여성이었다. 나는 잔나와 꽤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아무 연락 없이 무작정 기숙사에 살고 있는 잔나를 찾아갔다. 잔나가 일에서 돌아올 때까지 바깥에서 쭈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우리를 본 잔나는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우리 얘기를 들은 잔나는 얼마든지 자기 방에서 지내라고 말했다.
잔나의 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우리는 미리 짐을 싸 놓기 위해 집으로 갔다. 반쯤 그을린 현관과 아직도 냄새가 빠지지 않은 집 안 공기가 이틀 전에 있었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나게 했다. 우리는 서둘러 삼단 가방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몇 번째 싸는 짐인지. 결혼 초부터 왜 이런 험난한 일이 생기는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집을 거의 다 싸고 집을 나서는데 복도에서 이웃집 여자를 마주쳤다. 그 여자는 우리를 보더니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 보세요. 당신들 때문에 복도 천장이 다 그을렸어요.”
고개를 올려보니 정말 천장이 연기로 그을려 있었다.
“당신들 책임이니 페인트칠하는 비용을 내세요.”
“얼마나요?”
“천 달러요.”
“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방화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니. 우리는 피해자였다. 그런데 우리에게 돈을 내라는 것도 모자라 천 달러라니. 외국인인 우리를 호구로 보는 것인가. 우리는 따져봐야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았기에 대충 알겠다고 말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러시아 사람들의 고약한 인심을 경험한 건 다행히 그때 한 번뿐이었다.
우리는 다시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신기하게도 그날 목사님이 사시는 동네에 집이 구해졌다며 빨리 오라고 하셨다. 디베랴 교회의 고려인 전도사였던 안토니나 트로피모브나가 사는 아파트에 마침 빈 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부리나케 지하철을 타고 도시 정반대 쪽에 있는 목사님 댁으로 갔다. 이틀 동안 집 없이 떠돌다가 목사님 부부를 만나니 비로서 마음이 놓였다. 안토니나 트로피모브나가 우리를 데리고 간 집은 막 수리가 끝나 깔끔하고 마음에 쏙 들었다. 주인 여자 이름이 공교롭게도 또 스베타였다. 의사였는데 눈빛이 선량했다. 꽤 큰 방이 두 개에 부엌과 화장실, 복도가 있는 집이었는데 월세를 150불만 받겠다고 했다. 바로 그날 이사하기로 하고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이사를 하게 됐다. 이웃들이 알면 우리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할 게 뻔했다. 미리 작은 트럭을 구해놓고 한밤중에 가서 몰래 이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나는 목사님 댁에 머물고 남편과 안토니나 트로피모브나의 남편 겐나지 미하일로비치와 아들 게라가 트럭을 타고 떠났다.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잘 돌아오기를 빌었다. 밤 열두 시가 넘어서야 트럭이 도착했다. 남편은 이웃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조심해서 짐을 옮겼는지 무용담을 펼치듯 이야기했다. 그렇게 우리는 세 번째 집에서 마침내 안착하게 되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우리 집에 또 불을 낼 것 같았다. 만약 또 불을 내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방독면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상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낮에는 그나마 지낼만했지만, 밤이 되면 두려움이 찾아왔다. 그날의 일이 떠오르고 끔찍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옆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남편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혼자 끙끙대면서 불안에 떨다가 간신히 잠들곤 했다. 그렇게 두 달을 보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의 불안장애가 시작된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다른 사건으로 나는 내가 비정상적인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인지하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누가 우리 집에 불을 낸 것일까. 나와 남편은 이리저리 퍼즐을 맞추며 누가 한 짓인지를 추리했다. 지금까지도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솜이 한 짓이라는 심증을 굳혔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비카가 우리에게 받은 집세로 따로 집을 얻어 나가 살았기 때문에, 솜은 우리를 내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 심증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비카가 집에 들어갈 때 웬 괴한이 나타나 비카의 허벅지를 칼로 찔렀다. 다행히 비카는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그 일 이후 솜은 비카에게 안전을 이유로 다시 자신과 살자고 종용했다. 그러나 비카는 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우리가 이사하자, 비카는 어머니가 없는 그 집으로 들어가 혼자 살았다. 그리고 결국 솜과는 헤어졌다. 이 모든 일이 솜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 어찌 알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