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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04.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40화. 4장 트라우마의 습격.  폭탄테러

폭탄 테러     


  새집으로 이사하기 전 나는 지도교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제 러시아에 온 지 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읽은 자료들을 정리하고 텍스트를 분석한 노트가 몇 권이 쌓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을 써야 할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방화가 일어난 후 마음의 안정을 잃은 나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논문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강한 절망감이 몰려왔다. 지도교수님께 말씀을 드려야 했다.

“선생님, 누가 우리 집에 불을 냈어요.”

“오, 소냐. 어떻게 그런 일이? 괜찮아요?”

선생님은 처음부터 줄곧 나에게 존댓말을 쓰셨다.

“괜찮아요. 근데...일을 할 수가 없어요. 논문을 쓰지 못할 것 같아요.”

“오, 소냐. 그런 말 말아요. 절대 논문을 포기해선 안 돼요. 지금 너무 힘들어서 그래요. 지금은 일단 쉬어요. 충분히 쉬고 나중에 생각해요. 반년이고 일 년이고 쉰 후에 쓰면 돼요. 알겠지요?”

지도교수님은 자상하게 나를 위로하고 간곡하게 나를 설득했다. 얼마든지 쉬고 나서 다시 생각하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어찌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던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논문 생각을 잊어버렸다. 반년이 지나서야 다시 교수님께 연락을 드릴 수 있었다. 만약 그때 교수님이 나를 압박하셨거나 그만두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셨다면 아마 나는 논문 쓰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여름이 지나가면서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고 있었다. 이제 반년 동안 쉬었던 논문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또다시 예기치 않은 일이 터지고 말았다. 1999년 9월 9일. 저녁에 뉴스를 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이 TV 화면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파트 한 채가 순식간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짙은 연기에 휩싸이고 난 후 아파트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저게 뭐야?” 모스크바에 있는 아파트가 폭파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94명이 사망했다. “누가 한 짓이야? 어떻게 아파트를 폭파할 수가 있지?”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때만 해도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에만 관심이 쏠렸다. 며칠이 지나도록 폭파범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불과 4일 후 13일에 다시 한번 모스크바의 아파트가 폭파되었다. 이번에는 119명이 사망했다. 그 화면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두 번째 보도를 본 나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누군가’가 연쇄적으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폭파하고 있었다. 그 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아파트 폭파가 이어질 거라는 의미였다. 예의 그 공포심이 엄습했다. 갑자기 마음이 안절부절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여보, 나가야 해.”

“나가긴 어딜 나가? 왜?”

“나 무서워. 우리 아파트도 폭파되면 어떡해?”

“그런 일 없어.”

남편은 도무지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나도 남편이 날 이해해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나는 밤새도록 한숨도 잘 수 없었다. 잠을 자면 누군가 우리 아파트 지하에 폭탄을 설치할 것 같았다. 나는 창밖에 수상한 움직임이 없는지 밤새 밖을 내다보았다. 근처에서 무슨 소리만 나도 촉각이 곤두서며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길고 긴 밤이 지나면 아침이 되어서야 지쳐 잠이 들었다. 낮에는 그나마 무서움이 덜했다. 방화가 난 후와 똑같았지만, 이번에는 강도가 더욱 심했다. 나는 모스크바 다음에는 페테르부르크가 표적이 될 거라 예상했다. 극도의 공포가 나를 마비시켰다. 밥을 먹는 것도, 씻는 것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삼 일 후 페테르부르크가 아닌 러시아 남부 볼고돈스크라는 도시에서 다시 아파트가 폭파되었다. 이번에는 17명이 사망했다. 페테르부르크는 무사히 넘어가는 건가. 그래도 며칠 간격으로 벌어진 테러 소식에 내 신경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잠들어있는 사이 폭탄 소리와 함께 아파트가 무너지는 광경이 자꾸만 상상 속을 침입했다. 오래전 삼풍 백화점 사건도 함께 떠올랐다. 그러나 더 가공할만한 점은 이것이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행한 테러라는 것이었다. 아무 잘못 없는 사람들이 졸지에 끔찍한 테러에 희생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러시아에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러시아도 러시아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내 신상에 직접 일어날 수 있는 일인 양 생생하게 그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동요했다. 한국 유학생들도 놀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의 테러가 발생하지 않고 정부가 테러범을 잡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차차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의 불면의 밤은 계속됐다. 아침이 되어 잠들고 오후 늦게 깨어 꼬박 밤을 새우는 일이 계속되었다. 남편과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저녁에서 남편이 잠들 때까지뿐이었다. 하루는 너무 무서워서 밤에 남편을 졸라 시내로 나갔다.

페테르부르크의 중심 거리인 넵스키대로는 인적은 드물었지만, 한밤중에도 불이 밝혀 있었다. 넵스키대로의 중간쯤에 있는 KFC는 24시간 문을 열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있으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나는 가지고 간 노트를 밤새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집을 떠나 어디론가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도시가 아닌 자연 속으로 숨으면 안전할 것 같았다. 이희재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사정을 말씀드렸다. 어디 가 지낼만한 곳이 없을지 여쭤봤다. 목사님은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목사님도 내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여기셨는지 걱정하셨다. 같은 건물 1층에 살고 있던 안토니나 트로피모브나도 내 이야기를 듣고는 함께 걱정했다. 그러던 중 목사님이 며칠 사나토리에 가 있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사나토리는 러시아인들이 요양이 필요할 때 가는 일종의 숙박시설이었다. 자연경관이 좋은 곳에 있어 힐링하기 좋은 시설이었다.) 나는 이거다 싶어 당장 가겠다고 했다. 이사를 도와주었던 겐나디 미하일로비치가 나와 남편을 페테르부르크 근교의 레피노에 있는 사나토리로 데리고 갔다.

  레피노는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화가 레핀이 살았던 곳이었다. 그가 생전에 살았던 집이 박물관이 되어 있었다. 숲과 핀란드만의 바다가 어우러져 휴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최적의 장소였다. 사나토리에 가서야 나는 처음으로 밤에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몇 주 동안 밤에 잠을 자지 못해 내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레핀 박물관에도 가고 20세기 초 러시아의 유명한 여성 시인 아흐마토바의 묘지도 방문하며 이박삼일을 보냈다. 자연 속에서 그동안 지쳤던 마음이 조금은 쉼을 얻을 수 있었다. 영원히 그곳에 머물고 싶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우리는 아침마다 이희재 목사님 댁에 가서 기도 모임에 참석했다. 나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천천히 불안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야 내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 전해부터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라도가 호수에서 파도를 만났을 때,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을 때, 집에 불이 났을 때, 그리고 폭탄 테러까지 일련의 연쇄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내가 보인 반응은 확실히 정상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내 주변에는 내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도,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나조차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런 걸까? 내가 이렇게 불안이 많은 사람이었나? 왜 내가 이렇게 변했을까? 마치 바보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 어디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 문제가 무엇인지, 뭘 어찌해야 할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혹시 내가 불안정한 어린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 이런 증상이 나타난 것일까. 그런데 왜 하필 결혼을 즈음해서 터지게 되었을까. 그때 만약 한국에 있어서 병원에 찾아갔더라면, 상담이라도 받았더라면 내 문제를 좀 더 일찍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에서는 도움을 받을 곳이 없었다. 한 가지 내가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건 내게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크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죽음의 위협이 없어도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나 무서웠다. 믿음이 있다는 내가 죽음을 그리도 두려워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절망스러웠다. 왜 그리도 죽음이 두려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미해결된 문제를 안고 지내던 나는 몇 년 후 마침내 인생 최악의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천 년

     

  십 년 동안 러시아를 혼란 속에 방치했던 옐친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폭탄 테러범을 잡기 위해 지도력을 발휘한 건 전 KGB 출신 푸틴이었다. 푸틴은 체첸을 테러범으로 지목했다. 2차 체첸전쟁이 벌어졌다. 내 마음 상태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길거리의 사람들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어둡고 음울했다. 이렇게 무서운 테러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나라의 국민인 그들이 가여웠다. 푸틴은 테러범들을 잡아들이고 빠르게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옐친은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고 푸틴은 소련 해체 후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이천 년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한국에 갔던 지연이 돌아왔다. 지연이 돌아오자 내 마음이 조금 더 안정되었다. 그런데 연말이 되자 남편이 한국에 가자고 했다. 소위 Y2K 때문이었다. 밀레니엄을 앞두고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었다. 컴퓨터가 2,000년을 인식하지 못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태를 러시아에서 맞는다면 속수무책일 터였다. 불안감에 다른 유학생들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비행기를 탈 일이 무서웠지만 러시아를 벗어나고 싶었기에 남편의 제안이 기뻤다. 지연도 우리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공항에 우리를 데리러 오신 시아버님 차를 타고 시댁으로 갔다. 막내 남동생은 나중에 내가 시댁으로 가는 모습이 영 낯설었다고 말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아버지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방문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상태는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동생 부부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힘들어 보였다. 막내 남동생도 아버지와 지내는 걸 버거워하고 있었다. 어서 논문을 마쳐 돌아와야 하는데 내 상태가 불안정했으니 미래를 장담할 수 없었다. 러시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마 동생들에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동생들도 나를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이러려고 러시아에 간 것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어서 마음을 다잡고 빨리 학위를 받아 돌아와야 한다는 마음에 조급해졌다.

  한국에서 한 달을 지낸 것이 마음의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행히 Y2K는 별 탈 없이 지나갔다. 다시 러시아로 돌아온 나는 완전히 귀국하기 전에는 다시 한국으로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하루하루 매일 논문 한 페이지를 쓰며 일 년을 보냈다. 지도교수님은 내가 논문을 장별로 써가면 “됐다”며 계속 쓰라고 격려하셨다. 교수님은 직접 내 러시아어 논문을 알파벳까지 꼼꼼하게 교정하셨다. 논문 때문에 교수님 집에 몇 번 방문하게 되었다. 교수님은 페테르부르크 북쪽 외곽에 사셨다. 교수님은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에 바친 분이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한 명밖에 없던 언니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친척이라곤 언니의 딸인 조카뿐이라고 하셨다. 참으로 쓸쓸한 인생이었지만, 교수님은 학문이 천직이라 그런지 늘 활달하고 에너지로 넘쳤다. 러시아 제자들도 있었지만 늘 내가 최고의 제자라고 말씀하셨다. 도스토옙스키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교수님에게 그런 찬사를 듣는 건 영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저 외국에서 온 학생을 격려하시는 말씀이려니 여겼다. 정교에 대한 나의 이해가 깊다며 “소냐는 거의 정교 신자”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카랑카랑한 그 목소리와 소년같이 장난기 있는 웃음을 띠던 회색 눈동자가 그립다. 아직 살아계신 나의 유일한 스승님을 돌아가시기 전 다시 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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