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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06.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41화. 4장 트라우마의 습격.  미르 한인교회와 김 창호씨


미르 한인교회와 김창호 씨


  혼자 2년, 남편과 2년, 합하여 4년 학생 선교사라는 의식으로 헌신했던 디베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디베랴 교회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성장하거나 변화하지 않았다. 학업이 반, 선교가 반이라고 할 정도로 할 수 있는 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꿈에서 백여 명이 들어갈 정도의 예배실에 사람들이 꽉 찬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어찌나 행복했는지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한 만큼 눈에 보이는 결과가 돌아오지 않는 일은 이 세상에 너무나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선교였다. 열심히 하기만 한다고 되지 않는 일. 인간의 가능성과 자기 신뢰를 철저히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디베랴 교회에서 두 번의 슬픈 사건을 겪었다. 올랴라는 조용한 성품의 러시아 자매님이 있었다. 키가 크고 안경을 끼고 늘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분이었다. 일찍 남편을 잃고 그리샤와 바냐 두 아들을 혼자 키우고 있었다. 여름 어느 날, 올랴 자매님은 두 아들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며칠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낮에 딴 버섯으로 저녁에 음식을 해 먹었다. 혈기 왕성했던 청소년 바냐는 맛있다며 많은 양의 식사를 했다, 그런데 밤이 되어 갑자기 바냐가 배가 아프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심해지고 바냐는 호흡곤란 증세를 겪기까지 했다. 숲 한 가운데서 전화를 할 수도, 그 밤에 병원을 찾아갈 수도 없었다. 밤새도록 시달린 바냐는 의식을 잃을 정도가 되었고 새벽이 되어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 사망하고 말았다. 

  다음날 목사님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바냐는 정식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바로 화장을 시키는 걸로 결정했다. 우리 부부는 목사님과 함께 도시 북쪽에 있는 화장터를 찾아갔다. 러시아에 살면서 장례식에는 가보았지만, 화장터까지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열네 살의 유난히 얼굴이 하얗고 웃음이 많던 개구쟁이 바냐가 하루 사이에 주검이 되어 화장됐다. 너무나 외롭고 쓸쓸한 세상과의 이별이었다. 화장을 마치고 올랴 자매님 집을 방문했다. 가구도 별로 없는 단출한 살림살이가 생활의 형편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매님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손님을 대접했다. 위로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자매님은 그리샤라도 살아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자매님과 그리샤는 별로 먹지 않았기 때문에 무사했다.   

  지마라는 부랴트 청년이 디베랴 교회에 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믿기 시작했는데 열정적이고 뜨거웠다. 그런 청년을 본 적이 없었다. 기타를 치며 찬양을 인도하는 모습이 기쁨에 차 있었다. 장하기도 하고 도전이 되기도 해서 우리 부부는 지마와 가까이 지내며 친해졌다. 얼마 후 지마는 누나 바이라를 교회에 데려왔다. 바이라는 아직 믿음이 없었는데 지마가 열심히 전도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 바이라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바이라 남편은 얼마 전에 집을 나가 실종된 상태였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으나 뭔가 좋지 않은 일에 연루되어 있었다. 언젠가 돌아오겠지 했는데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폭행당해 사망한 사람이 있는데 와서 신원을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바이라의 남편으로 확인됐다. 바이라의 남편도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 매장을 하고 집으로 목사님과 몇 사람들을 초대했다. 우리 부부도 함께 갔는데, 바이라의 표정에는 전혀 슬픈 빛이라곤 없었다. 그 마음속을 어찌 알 수 있을까마는 속을 썩이던 남편의 죽음이 차라리 그녀의 무거운 삶을 가볍게 해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미르 선교회를 결성한 몇 선교사님들이 한인교회를 개척하기로 합의했다. 교회를 시작하자마자 유학생들과 상사 직원들이 모여들었다. 선교는 그리 어려운데 한인교회는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시작되는 듯 보였다. 외국에서 한인교회는 유학생들을 전도하기에 효과적인 곳일 뿐 아니라, 외로움을 달래고 한국의 정을 느끼고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곳이었다. 이희재 목사님은 이제 디베랴 교회에서는 충분히 일했으니 한인교회를 도와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부부는디베랴 교회에서 우리의 역할이 더는 없다고 판단하고 한인교회로 옮기자고 결정했다. 

  미르 한인교회에서 우리는 조별 모임을 인도하며 학생들과 사귀었다. 우리 집은 모임 장소로 자주 사용되었고, 나는 어린 학생들을 불러 음식을 해 먹이는 일이 즐거웠다. 우리 조원은 대부분 학생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교회에 찾아온 탈북민 한 분이 우리 조로 배정되었다. 그의 이름은 김창호였다. 엄밀히 말하면 북한에서 탈북한 사람이 아니라, 러시아에 왔다가 도망친 사람이었다. 중간 키에 둥글고 약간 얽은 자국이 있는 얼굴로 북한 사투리를 심하게 쓰지는 않았다. 그는 조 모임에서 자주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북한에서 꽤 괜찮은 형편이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었다. 그가 러시아로 오게 된 이유는 벌목공으로 시베리아에 왔다가 도주한 북한 사람을 잡아 돌려보내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 추노 같은 역할을 한 셈이었다. 그러던 그가 오히려 도망자 신세가 됐다.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지만,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감시인의 눈을 피해 어떻게 페테르부르크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야기했다.

“북한의 가족들은 어떻게 됐어요? 위험해지지는 않았어요?”

“거, 괜찮은 것 같아요. 뭐 이렇게 도망쳐도 가족들이 처벌받거나 하진 않아요.”

“가족들하고 연락은 하세요?”

“가끔 전화하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연락이 되는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심지어 돈까지 보내준다고 했다. 그는 러시아를 떠나 남한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미국에 갈 꿈을 꾸고 있었다. 결국 가족과의 재회는 포기한 셈이었다. 나는 혼자 타국에서 생활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영원히 고국을 떠나 방랑자 처지가 된 그가 다시 가족을 만나려면 통일이 되는 길밖에는 없었다. 

  우리는 김창호 씨와 꽤 가까이 지냈다. 우리가 귀국할 때쯤 그도 마침내 남한으로 올 수 있었다. 부산에 정착한 그를 두 번 정도 만났는데, 생활이 바쁘다 보니 그 후 에는 소식이 뜸해졌다. 그가 꿈꿨던 대로 미국으로 갔다는 소문을 들었다. 지금쯤 미국 어디선가 잘 정착해 살고 있을지, 북한의 가족들은 어찌 됐을지 궁금하다.


동생의 눈물     


  2001년 봄에 나는 논문을 완성했다. 논문자격시험을 생애 마지막 시험으로 치렀다. 러시아어로 답안을 준비해 달달 외웠는데 도서관에서 앉아 공부하고 있는 나를 보고 친하게 지내던 유학생이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게 보인다.”고 말했다. 지도교수님은 내 논문에 매우 만족하셨다. 러시아 문학 연구소에서 지도교수님의 입지가 워낙 단단해서인지 예비 논문심사에서는 민망할 정도로 나를 칭찬했다. 논문을 인쇄하고 가을에 있을 논문심사까지는 몇 달의 시간이 덤으로 주어졌다. 러시아에서는 여름에 철저히 쉬기 때문에 어떤 학사일정도 진행되지 않았다. 

  이제 내 공부는 끝이 보였다. 그러나 남편의 논문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언제쯤 귀국할 수 있을지는 아직도 미지수였다. 그해 여름에 동생이 러시아로 출장을 왔다. 모스크바 출장을 오는 김에 하루 시간을 내서 페테르부르크로 나를 보러 온다고 했다. 러시아에서 동생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들뜨고 행복했다. 풀코보 공항으로 가서 동생을 마중했다. 동생도 러시아에 사는 누나 부부를 보러 온 것이 못내 흥분돼 보였다. 일요일이었고 우리에게는 시간이 하루밖에 없었다. 나는 미리 남편에게 이번에 꼭 동생에게 전도하자고 했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냐고. 남편도 그러자고 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이다.

  집에 와 짐을 풀고 페테르부르크 관광을 시켰다. 딱 하루의 시간에 보여줄 수 있는 곳으로만 골랐다. 궁전광장으로 갔더니 동생은 “여기가 1905년 혁명이 시작된 곳이구나.”라며 감개무량했다. 한때 학생운동권이었던 동생에게 러시아 혁명의 발상지에 서는 것은 특별한 체험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없어 에르미타쥐는 생략했다. 해군성을 지나 이삭 대 성당의 웅장한 외관만 보여주고 청동 기마상 쪽으로 걸었다. 네바강과 운하들을 연결하는 배를 타고 보이는 건물들을 설명했다. 남편은 연신 나와 동생의 사진을 찍어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인 여름 정원을 갔더니 동생도 “여기 좋네.”라고 했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은 인쇄된 내 논문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바라는 건 없고 그저 누나가 러시아 문화 얘기 정도 해주면 족하다고 했던 동생이었다. 그러기에는 동생이 치러야 했던 대가가 너무나 컸다. 우리 부부가 신앙 이야기를 꺼내자 하루 종일 웃었던 동생이 얼굴을 굳혔다. “너의 힘든 짐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어떠니?” 동생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따라서 기도하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 하도록 했다. 보통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마음이 급해서 억지로라도 동생이 그 기도를 하게 만들고 싶었다. 동생은 한 마디씩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큰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못하겠어요.”라고 말했다. 깊은 고통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누나 매형 오늘 나한테 왜 이러세요?”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동생이 폭포 같은 눈물을 쏟기 시작한 것이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동생의 모습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파열되었다. 한 번도 그렇게 우는 동생을 본 적이 없었다. 늘 굳건하고 든든했던 바위 같던 동생이 촛농처럼 녹고 있었다. 그 눈물의 의미를 알기에 마음이 더욱 쓰라렸다. 나는 동생 옆에서 같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남편은 동생을 안아 주었다. 자신을 지키던 모든 방패를 내팽개치고 남편의 품에 안겨 동생은 한동안 실컷 울었다. 그렇게라도 울어서 동생의 마음에서 조금이라도 무거운 짐이 벗겨진다면 좋을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면서도 동생이 우는 게 오히려 반가웠다. 

  다음 날 아침 동생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풀코보 공항에서 찍은 사진에서도 동생은 부어있는 눈으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동생이 한국으로 떠난 후 몇 달이 지났다. 동생은 집 근처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날 남편과 내가 무리하게 동생을 전도하려고 했던 게 헛되지는 않았나 보다. 내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아마 동생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동생이 눈물을 흘릴 때 아마 하나님의 손길이 동생의 마음을 어루만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몇 년 후 동생은 진짜 믿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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