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42화. 4장 트라우마의 습격. 북유럽 여행
북유럽 여행
남편은 시부모님에게 생활비를 타서 쓰는 게 마음에 걸렸는지 러시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다.평소 즐겨 듣던 RFA(Radio Free Asia)라는 미국 라디오 방송국에서 러시아 통신원 제안을 받았다. 매주 꾸준히 기사를 보내니 우리가 생활할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었다. 당시 한 달에 300불 정도면 두 명이 생활하기에 충분했다.
2001년 여름 김정일이 봉쇄 열차를 타고 러시아에 온다는 뉴스가 들렸다. 남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러시아에서는 연일 기사가 쏟아졌다. 남편은 김정일의 출발 소식부터 러시아 어느 도시를 지나고 있는지, 러시아의 현지 반응은 어떤지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거의 매일 기사를 작성해 보냈다. 두 주 정도 김정일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한 달이 지나자 이천 달러 정도가 입금되었다. 돈 없는 유학생 부부에게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우리는 그 돈으로 그동안 미뤄두었던 북유럽 여행을 가기로 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해 이웃 나라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은 육로로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코스였다. 우선 헬싱키역에서 북유럽 패스를 끊었다. 헬싱키는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기차를 타고 북으로 향했다. 스웨덴 국경에서 가까운 케미라는 작은 마을까지 야간기차로 달렸다. 유럽에서 타본 야간기차 중 핀란드 기차는 단연 최고 수준이었다. 이인용 침대칸의 문을 열면 왼쪽으로 이층 짜리 침대가 보인다. 깔끔한 흰색 침대보가 깔려 있어 여느 호텔 부럽지 않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침대칸마다 화장실과 세면대까지 갖추어 놓았다. 샤워 외에는 침대칸 안에서 모든 게 해결되었다.
핀란드의 국토는 온통 숲과 호수로 수놓아져 있다. 인구가 적어 도시 외에는 건물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차창 밖으로 시원한 초록이 끝없이 펼쳐지고 다양한 모양의 호수가 거듭 모습을 드러낸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뻥 뚫리고 시원한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 나이 들면 핀란드 와서 살면 참 좋겠다.” 둘이 되지도 않을 꿈을 꾸었다. 러시아에서 핀란드 국경을 넘을 때마다 공기가 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충동적으로 헬싱키행 기차를 타곤 했다. 페테르부르크가 헬싱키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케미에서 버스를 타고 스웨덴과 인접한 토르니오라는 작은 마을로 향했다.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토르니오에서 우리가 예약한 유스호스텔이 거의 텅 비어서 그 넓은 호스텔을 우리 둘이 다 쓰는 기분이었다. 다음날 토르니오에서 스웨덴 룰레오로 가는 장거리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는 데는 아무런 절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여권에 도장도 찍지 않았다.
우리는 국토가 긴 핀란드와 스웨덴, 노르웨이를 기차로 종단할 계획이었다. 스웨덴 여행은 돌아오는 길에 하기로 하고 일단 노르웨이 북단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룰레오에서 보덴까지 버스로 가서 노르웨이의 나르빅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스웨덴의 북쪽 지형은 다소 황량했다. 키 큰 나무는 없고 낮은 관목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산지가 아니라 평지였는데도 위도가 높아서인지 지구의 높은 지역에 올라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자주 안개가 끼어서 시야가 흐려졌다가 밝아졌다가를 반복했다. 점점 기차가 고도를 높여갔다. 산지에 오르고 있었다. 주변에는 빽빽한 침엽수림이 나타났다. 이제 한 시간 정도면 나르빅에 도착할 시간 기차는 잠시 멈췄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가끔 멈추는 역들도 작고 타고 내리는 사람도 적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아주 먼 곳에 와 있었다. 유럽에 가면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한국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기차는 안개 속에서 다시 천천히 달렸다. 왜 이렇게 느린 속도로 가는 거지? 싶을 때쯤 시야가 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탁 트인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기차는 이제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는데 오른쪽 까마득히 아래로 피요르드 같은 지형이 보였다. “스웨덴에도 피요르드가 있나?” 지도로 확인해 보니 길게 뻗은 호수였는데 노르웨이의 피요르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배를 타고 피요르드를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마치 하늘에 떠서 지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착시현상을 맛보았다. “우와!” 그저 감탄사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신비로운 물빛과 주변의 산림이 어우러져 이게 꿈속이려니 싶었다. 기차는 그 호수와 점점 가까워지면서 아래쪽을 향해 내려갔다. 순식간에 나르빅 역에 도착했다.
나르빅은 우리가 목표했던 가장 높은 위도에 자리한 도시였다. 거기서 더 용기를 내 노르드캅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기차가 있었다면 해보았을 테지만. 우리 부부는 둘 다 장거리 버스를 꺼렸고 무조건 기차가 닿는 곳이면 간다는 주의였다. 나르빅의 숙소도 한산해서 우리가 거의 목조주택 한 채를 다 사용했다. 8월 중순이 지나서 가는 곳마다 여행객이 별로 없었다. 그 한산함과 북유럽의 서늘한 날씨, 페테르부르크보다 높은 곳에서 백야를 마음껏 누렸다. 이제 올라올 만큼 올라왔으니 내려갈 차례였다. 역시 기차로 노르웨이의 중부에 있는 트론하임까지 내려와서 더 밑으로 서쪽의 베르겐으로 갔다. 러시아에 교환학생으로 왔을 때 혼자 갔던 베르겐을 남편과 함께 다시 왔다. 송네 피요르드에서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이곳에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정작 보스에 가서는 남편 혼자 피요르드를 보고 오라고 하고 나는 하루 종일 보스 호수 주변을 거닐었다. 전에는 베르겐에서 배를 타고 송네 피요르드를 둘러봤는데 그때는 보스에서 버스를 타고 배를 타는 구드방겐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 내려가는 길의 경사가 급하다고 해서 내가 겁이 났던 탓이다. 더구나 배를 타고 피요르드를 즐길 자신도 없었다. 불안장애가 생기고 나서 여행에도 여러 제약이 생겼다.
보스에서 오슬로로 오는 기차 안에서 희한한 현상을 봤다. 오후쯤 되었는데 태양 주위로 푸른 빛이 도는 회색 고리 같은 게 생겼다. “여보, 저거 신기하다. 그지?” 지금도 그 현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지구 곳곳에 얼마나 다양한 자연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오슬로에서 할덴이라는 작은 국경 마을로 갔다. 아담한 마을 할덴에 도착하니 저녁이었다. 예약한 숙소까지 가는 버스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어떡하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한 노르웨이 부부가 우리를 발견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묻더니 태워주겠다며 자동차에 타라고 했다. 이런 게 여행의 묘미였다. 뜻밖의 친절을 마주하는 감동.
할덴을 지나 덴마크로 가려면 다시 스웨덴 땅을 밟아야 했다. 예테보리를 지나 항구 헬싱보르에서 덴마크로 가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2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어서 배를 탈 수 있었다. 일단은 코펜하겐으로 왔다가 헬싱보르를 마주 보고 있는 헬싱거를 찾았다. 햄릿의 배경이 되는 엘시노어 궁의 모델인 크론베르크 성이 있는 곳이었다. 성을 거닐다 보니 햄릿의 망령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성을 나와 바닷가에 앉으니 맞은편의 헬싱보르 항이 가까이 보였다. 잔잔한 파도가 일고 푸르디푸른 바다가 지는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덴마크는 여행 일정상 종단할 수가 없었다. 안데르센의 고향인 오덴세까지만 가기로 했다. 오덴세는 푸넨이라는 큰 섬에 있는 소도시였다. 코펜하겐에서 오덴세까지 가려면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바다 위 철로를 지나갔다. 아래로는 기차가 위로는 차들이 바다 위를 오랫동안 달리는 모습은 장관 그 자체였다. 유틀란트를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언젠가 북부 독일을 여행하게 된다면 그때 더 올라가 보는 것으로 후일을 기약했다. 여행은 언제나 더 가고 싶은 길 중간에서 멈추는 법이니까.
이제 돌아가는 길이었다. 다시 코펜하겐으로 와서 이번에는 스웨덴 남단 말뫼항으로 향했다. 우리는 유럽을 여행하며 각국의 기차를 비교하는 걸 즐겼는데, 낮 기차는 덴마크 기차가 최고라고 결론을 내렸다. 말뫼로 가는 기차는 마치 비행기 기내에 있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우리에게 기차는 국가의 경제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도 지금은 꽤 좋아진 편이다. 선진국의 기준에 걸맞기에는 아직은 좀 부족하지만)
말뫼에서 문제가 생겼다. 늘 여행하다 보면 실수하기 마련인데 미리 숙소를 예약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역 근처에 기차를 개조해 유스호스텔로 사용하는 곳에 가보니 자리가 꽉 찬 상태였다. 시간은 밤 열두 시. 두뇌를 빨리 가동해야 했다. 그럴 때 아이디어를 내는 건 보통 내 쪽이었는데 그날은 남편이 해결책을 찾아냈다. 잠시 후 말뫼 역을 통과하는 스톡홀름행 기차를 타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말뫼 여행을 포기하고 그 밤에 스톡홀름으로 향했다. 나는 남편의 기지를 칭찬했고 해결책을 찾아낸 남편은 으쓱했다. 늘 문제 해결 능력이 없다고 나에게 핀잔을 듣던 남편이었으니 더 기가 살았을 것이다.
이제는 빠르게 경로만 밝히겠다. 스톡홀름에서 웁살라를 지나 다시 북쪽으로 하파란다까지 가서 핀란드로 넘어와 남쪽으로. 오울루와 투르크를 지나 헬싱키까지 도착했다. 핀란드는 두 번 기차로 종단한 셈이었다. 총 3주일이 걸린 나름 대장정이었다. 나르빅까지 가장 높은 위도를 경신한 것과 해로가 아닌 육로로만 북유럽을 여행했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으로 남았다. 한 나라의 지형과 자연의 특징을 살피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기차에서 보낸 그 많은 시간이 이동을 위한 의미를 훨씬 뛰어넘었다. 제대로 된 자유여행을 처음 경험한 남편은 그 이후 나보다 더한 여행 마니아가 되었고 해마다 어디론가 떠나자고 나를 조른다. 우리는 그 후 또 다른 여행을 함께 했지만, 아직도 가보고 싶은 곳은 많고 인생은 짧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