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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08.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43화. 4장 트라우마의 습격.  선교사 자녀 학교

선교사 자녀 학교    

 

  논문을 마치고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나도 할 일을 찾아야 했다. 동생에게 갚을 돈을 미리 러시아에서부터 조금씩 마련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을까 고심하던 중 뜻밖에 이희재 목사님께서 아들 종은이 다니는 ICS(국제 크리스천 스쿨)에서 한국어 교사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당연히 마다할 이유가 없는 좋은 기회였다. 그 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온 선교사였다. 학교에서는 그들에게 보수를 지급하지 않았다. 나는 선교비를 후원받을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료로 가르치거나 보수를 받아야 했다. 학교 교장인 마이클 캐네디와 면접할 때 나는 빚이 있으므로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얼마의 보수면 되겠느냐는 질문에 최소 매달 300달러는 받고 싶다고 했다. 케네디는 흔쾌히 내 요구를 수락했다.

  일 년 계약으로 9월부터 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미국, 한국 선교사들의 자녀들이 대부분이었다. 학생 수가 백 명이 안 되는 작은 규모였다. 시내에 있는 건물의 한 층을 통째로 임대해 작은 교실들과 도서실, 학생들이 다 모일 수 있는 작은 강당으로 이루어진 학교였다. 건물의 안마당이 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유치원 과정부터 고3 과정까지 미국식 학제를 따라 미국 교과서로 공부하는 학교였다. 그 작은 학교에서 공부한 후 학생들은 대부분 미국의 대학들로 진학했다.

   아침 아홉 시가 되면 건물 이층은 활기로 넘쳤다. 어린아이들부터 청소년까지 다양한 나이의 남녀 학생들의 목소리와 웃음이 건물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아이들을 좋아했던 나는 그런 생기있는 분위기 속에 있기만 해도 아이들의 행복에 감전되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해야 할 일은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뿐이 아니었다. 3학년과 4학년을 합친 반 구석에 나를 위한 작은 책상이 마련되었다. 미국에서 온 미혼의 선교사 수잔 양이 담임을 맡고 나는 그녀의 보조 교사 역할을 해야 했다. 수잔 양은 매우 몸이 말랐고 머리는 금발이었으며, 총총걸음으로 걸었다. 금속성의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잘 웃지 않았는데, 가끔은 입을 아주 크게 벌리고 웃었다. 새침한 성격이라 나에게 개인적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고 일에 관련된 대화만 나눴다. 내가 한 일은 주로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복사하는 것이었다. “소냐, 이 페이지에서 이 페이지까지 열 부 복사해주실 수 있나요?” 수잔 양은 내게 다가와 어색하게 웃으며 할 일을 말해주곤 했다.

  그 일 외에 나는 줄곧 내 자리에 앉아서 아이들이 수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책을 읽곤 했다. 한국 여자아이들은 나를 잘 따랐다. 영어에 서툰 아이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내 자리로 와서 한국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묻지 않아도 집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기도 하고,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얘기해서 내 눈에 보이지 않는 학교의 일상을 훤히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그 작은 학교에서 누가 다쳤는지, 누가 누구와 싸웠는지, 누가 벌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수업은 정규 수업이 다 끝난 후 시작되었다. 한국 학생들이 요일별로 나와 수업했다. 수업을 위해 한국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국어 교과서를 주문했다. 한글을 가르치는 데서부터 교과서를 읽고 설명하는 일까지 다양한 내용을 준비했다. 매 수업에 오는 학생은 한 명에서 두 명이었다. 영어가 익숙한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잘 읽고 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은 어차피 미국 대학으로 진학할 거라 한국어의 중요성을 잘 몰랐다. 아이들의 바람이 아닌 엄마들의 열성으로 내가 한국어 교사로 채용됐다는 걸 알게 됐다. 세계 어디를 가든 한국 엄마들의 교육열은 말릴 수가 없다.

  나중에는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내 전문성을 살려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러시아 문학 수업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미국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이 모여 듣는 수업이었다. 아이들의 러시아어 실력을 고려해 쉬운 러시아 민담 텍스트를 골랐다. 함께 읽고 러시아어 작문을 해보게 하는 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나는 진지한 러시아 소설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수업을 해보고 싶었지만, 아이들에게 무리였다. 러시아어로 수업해야 했기에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그래도 나의 전공을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어서 그 수업을 할 때가 가장 뿌듯했다.

  학교에 가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1일 아침이었다. 매주 월요일에 작은 강당에서 전교생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그날은 월요일이 아니었는데도 학생들을 강당으로 소집했다. 늘 설교를 담당했던 교장 마이클 케네디의 얼굴이 그날따라 매우 굳어 있었다. 학생들 전체가 혼날 일이 있나. 무슨 일이길래 다 소집하는 거지? 미국 교사들의 얼굴도 모두 딱딱했다. 평소에 항상 웃는 얼굴이었던 미스터 시걸조차 심각한 표정이었다. 학생들은 영문을 모르고 각자 자리에 앉았다. 마이클 케네디가 앞으로 나가자 아이들은 모두 빤히 그의 얼굴을 주목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놀라운 소식이 흘러나왔다.

  “오늘 우리 미합중국에 대단히 슬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이클 케네디는 아주 천천히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소에 엄숙하던 그의 표정에 참담함이 어려 있었다. 그는 뉴욕에 있는 쌍둥이 무역센터 빌딩이 비행기 테러 공격으로 붕괴했다고 말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했다.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도. 그는 미국이 매우 어려운 일을 맞았으며 모두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을 맺었다. 짧은 기도 시간이 이어지고 학생들은 흩어졌다. 학생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그날 학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지. 테러라면 러시아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뉴욕 한복판에서 그것도 비행기 테러라니. 상상력을 아무리 동원해봐도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남편이 “오늘 미국에 무슨 일이 났는지 알아요?”라고 물었다. 나는 “학교에서 들었는데 진짜예요?”라고 되물었다. 남편은 인터넷에서 확인한 내용을 이야기해줬다. 그리고 저녁 뉴스에서 어마어마한 버섯구름이 뉴욕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장면을 봤다. 나는 그로부터 오랫동안 비행기가 날아와 빌딩에 부딪히는 모습은 보지 않았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서 다시 나의 불안장애가 재발할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도 현실로 여겨지지 않는 그날의 일이 만약 러시아에서 일어났더라면 나는 아마 당장 짐을 싸서 한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돌아가야 해     


  2001년 10월 말 드디어 논문심사를 마쳤다. 3년 반 만에 끝내려고 했던 논문을 5년 만에 끝냈다. 러시아에서는 박사 학위수여식이 따로 없다. 논문심사를 마치면 그것으로 끝이다. 대신 자그만 파티를 열어 손님들을 초대해 자축한다. 박사 학위증도 양 손바닥을 합친 넓이 정도 되는 붉은 색 표지의 작은 증서가 전부다. 고생한 시간에 비해 결과로 보이는 물리적인 성과가 너무 소박했다. 어쨌든 마음은 홀가분했다. 러시아에 온 목적을 이룬 셈이었다. 거기에 덤으로 결혼까지 했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남편의 논문이 마치길 기다리며 일 년 ICS에서 일하고 2002년 여름이 되어 계약을 종료했다. 학교에서는 더 일해주기를 원했지만 나는 그해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갈 계획이었다. 2002년 여름 한국과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경기를 러시아에서 보았다. 한국 팀이 뜻밖의 선전을 하지 않았다면 모든 경기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는 붉은 악마의 응원, 응원가 ‘오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을 외치는 응원과 박수...유학생들은 그 시간 한국에 없음을 한탄했다. 우리는 서로 집에 모여 TV 앞에 앉아 한국 팀을 응원했다. 교회 우리 조에서 근교의 다차에 일박이일 일정으로 놀러 갔을 때 포르투갈 전이 있었다. 김창호 씨가 아는 고려인 할아버지의 다차였다. 우리는 경기 시간이 가까워지자 TV가 있느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기꺼이 TV 있는 방을 내어줬다. 그날 밤 우리의 함성으로 그 마을 사람들이 놀랐을지도 모른다.

  월드컵의 열기가 가라앉고 가을이 되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의 논문이 더 이상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남편의 지도교수는 내 지도교수님에 비해 너무나 소극적이었다. 남편의 논문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도 모르고 의지도 없어 보였다. 나는 남편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나를 먼저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당시 내 머리는 온통 어서 한국에 돌아가 아버지를 돌봐드리고 동생들의 짐을 벗겨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제일 끔찍해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긴 테이블보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나는 왠지 그 테이블 아래에 무엇인가 들어있을 것만 같아서 슬쩍 테이블보를 들쳐 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 몇 마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 뱀들이 서로 엉겨 붙어서 우글대고 있었다. 뱀을 제일 싫어하는 나는 “악” 소리를 내며 잠에서 깨었다. 뭔가 의미하는 바가 있는 꿈이었는데 해석을 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 꿈이 불안한 나의 내면을 보여주었다는 걸 알게 됐다. 한국에 가서 있을 일에 대한 경고였던 셈이었다.

  남편은 나를 먼저 보낼 수 없다며 나를 업고 방을 빙빙 돌면서 울었다. 그리고 지도교수에게 찾아가 논문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지도교수는 전혀 만류하지 않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나는 분노했다. “무슨 지도교수가 그래? 당신 그 교수 밑에서는 절대로 논문 못 쓴다. 나를 보내주든지, 당신이 논문을 정말 포기하든지 결정해요.” 남편은 한 달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한 달 동안 남편은 기도하고 평소에 신뢰하던 분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대부분 아내와 함께 귀국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남편은 함께 돌아가겠다고 결정했다. 나는 별로 미안하지 않았다. 남편이 논문을 쓸 가능성이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 때문에 남편이 지지부진 끌지 않고 빨리 결정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결국 남편은 러시아에서 나 하나만을 달랑 얻었다.

  귀국을 결정한 우리는 서둘렀다. 짐을 정리해 주위에 나눠주고 그동안 샀던 책들을 콘테이너로 한국에 보냈다. 이미 지연을 비롯해 친했던 사람들이 러시아를 떠났다. 내가 귀국한다는 소식을 전하자 부산대학교에 계신 최동규 교수님께서 내게 강의를 부탁하셨다. 전에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셨을 때 우리 집에서 머무신 것이 인연이 되어 연락을 드리고 있었다. 남편의 거취가 불분명했지만, 아직 30대 중반이니 얼마든지 취직을 할 수 있으리라고 낙관했다. 한국만 가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믿었다. 그때 내 나이 서른여섯. 한 해가 끝나가는 12월 19 우리는 마침내 인천공항에 발을 디뎠다. 내가 러시아에 간 지 6년 반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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