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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10.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44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마지막 실수


  마지막 실수 

     

  우리는 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역에서 밤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가서 남편의 친구 차를 타고 세레메티예보 공항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보통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 한 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서 한국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비행공포증이 생긴 이후로 나는 작은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내 생각에 작은 비행기는 흔들림이 더 심했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역으로 떠나기 전에 우리는 마지막으로 페테르부르크에 와 있는 단기 선교사들을 만났다. 리곱스키 대로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 명일과 기동 선교사가 함께 지내고 있었다. 미혼 청년들로 우리와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곳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시간이 되어 역으로 향했다. 

  모스크바역에는 꽤 많은 사람이 나와 우리를 배웅했다. 우리가 헛살지는 않았나 보다 싶었다. 그들과 헤어짐이 아쉬웠지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그만큼 한국에 돌아가는 기쁨이 더 컸다. 그런데 정작 기차에 올라타 쿠페에 들어간 후 기차가 출발하자 나는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남편의 눈가도 촉촉이 젖어있었다. 지난 6년 반 동안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던가. 그곳에서 겪었던 사건들이 주마등같이 떠올랐다. 
 “여보, 우리 다시 돌아갈까?”

“나도 그러고 싶어.” 

  창밖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 눈도 더 이상 볼 수 없겠지. 쿠페는 4인실로 되어 있었다. 양쪽으로 이층 짜리 의자가 놓여 있는데, 의자를 펴면 침대로 변했다. 우리는 한쪽 일 이층을 예약했다. 우리 맞은편에는 두 명의 러시아 남자가 타고 있었다. 우리는 잠자기 전까지 일 층 의자에 앉아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가 하얘지고 말았다. 

“여보, 어떡해?”

“왜?”

“나 여권 두고 왔어.”

“어디에?”

남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리곱스키 사무실에.”

“안 가져왔어? 어휴...”

나는 여권을 넣어둔 얇은 헝겊 지갑을 목에 둘렀는데, 식사할 때 그것을 빼어놓았다가 그대로 두고 온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기차는 달리고 있었고 우리가 돌아간다면 다음날 한국에 갈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한 탓일까. 머릿속이 뒤엉켜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큰일이다. 어떡하지?”

“잠깐. 방법이 있어.”

남편이 말했다. 

“무슨 방법?”

“명일 선교사한테 연락해서 김병찬 집사님한테 전해달라고 하면 돼.”

“아, 그 방법이 있구나.”

김병찬 집사는 우리와 같은 교회에 다니는 분이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다음날 우리와 같은 비행기로 한국에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연락하지?”

   우리의 눈은 동시에 우리 앞에 앉아있던 러시아 남자에게 향했다. 그의 손에 휴대전화기가 들려 있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그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잠깐 전화기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그는 안 될 것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나에게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지만 이렇게 금방 해결책이 찾아지다니. 나는 명일 선교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권을 집사님에게 전달하고 다음 날 공항에서 짐 부치는 곳에서 만나기로 전해달라고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화기를 돌려주며 정중히 감사 인사를 했다. 그 남자는 “천만에요.”하며 싱긋 웃었다. 러시아인의 친절을 마지막으로 경험했다. 러시아인에게 따라붙는 ‘너그러운 영혼’이라는 관용구가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공항에서 김병찬 집사님이 나에게 여권을 건네주었다.

“러시아 못 떠나실뻔했네요.”

“그러게요.”

나는 겸연쩍게 웃었다. 그동안 비행기를 많이 타보았지만 그런 실수는 처음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마지막으로 제대로 실수를 한 셈이었다.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러시아였지만 막상 떠나려니 여권이 그 길을 막고 싶었었나 보다.     


출가외인     


  막내 남동생이 인천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부모님은 시누이가 사는 미국에 가 계셨다. 한 달 후에 돌아오실 예정이었다. 12월인데도 햇빛은 따사로웠고 온천지가 밝았다. 러시아의 춥고 어두운 겨울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한국에 돌아왔음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한국의 모든 것이 평온하고 안정돼 보였다. 마음이 푸근해졌다. 우리가 도착한 날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 날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시절은 러시아에서 다 보냈다. 노무현 대통령도 내 손으로 뽑지 못했다.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아본 적이 없다. 두 명의 대통령을 뽑을 기회를 러시아가 앗아가 버린 셈이었다.

  돈 한 푼 없이 귀국한 우리는 당장은 시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언제 독립할 수 있을지는 기약이 없었다. 그 사이 시부모님은 안산으로 이사하셨다. 시어머니께서 아파트에서 살아보고 싶은 꿈을 이루셨다.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 방을 신혼 방처럼 꾸며놓으셨다. 출발은 이렇게 하지만 조만간 자리가 잡히겠지. 본래 염려와 걱정이 많은 나였지만 그때는 참으로 낙관적인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시부모님은 안산으로 이사 오자마자 짐 정리도 다 끝내지 않은 채 서둘러 미국으로 가셨다. 시어머니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 있었다. 다섯 개나 되는 방 안에는 시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해 오셨던 자개장 두 개를 비롯해 온갖 물건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거실에는 80년대에나 볼 수 있었던 인켈 오디오와 턴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흘러간 팝송과 영화음악 레코드가 정리되어 있었다. 서재로 쓰기로 한 방문을 열어보고 우리는 둘 다 입이 벌어졌다. 방 한가득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이 책이 꽉 들어차 있었다. 책장에는 물론이고 책장 위, 방바닥에도 쌓아 올릴 수 있는 만큼 책이 쌓여있었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가져온 책들로 방은 특유의 오랜 책 냄새를 풍겼다. “이거 언제 다 정리해?”

  그날부터 우리는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주일 동안 방을 정리했다. 남편은 책 한 권, 한 권을 버릴 때마다 무슨 책인지 확인하고 책과 연관된 과거의 추억을 소환했다. 
 “이거 나 초등학교 때 읽었던 책인데...”

“이거 내가 대학교 때 산 건데...”

“이건 아버지가 공부하시던 건데...”

남편이 아까워하는 책들도 나는 가차 없이 내다 놓았다. 아까운 걸로 치면 버릴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책들도 꽤 있었다. 결혼하면서 내 책들을 상자로 시댁에 부쳤었다. 내 책들은 주로 대학생 때부터 읽었던 소설들, 사상서들, 시집, 영어 원서들이 대부분이었다. 책들을 펼쳐보니 볼펜으로 빨갛게 줄을 그어 놓은 흔적이 보였다. “나 참 공부 열심히 했었네.”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올랐다. 아낌없이 모두 내버렸다. 러시아에서 콘테이너로 부친 책이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90년대 이전 책들을 모두 버리고 나서도 책장이 꽉 찼다.(올해에서야 시댁에 있는 우리 책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치웠다. 무려 이십 년이 걸린 셈이다.)

  막내 남동생은 그사이 한 번 더 이사했다. 같은 신림동이었지만 전처럼 지대가 높지는 않았다. 제법 큰 방 두 개에 거실 겸 부엌이 있었다. 전보다는 집이 깔끔했다. 육십 중반이 넘은 아버지는 예전보다는 덜했지만, 여전히 술을 드셨다. 동생 말이 일 년에 한두 번씩 사라졌다 일주일 만에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곤 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 집에 가서 집을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해서 아버지와 식사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예정이었다. 함께 살 수는 없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와서 아버지를 챙길 수 있는 게 어딘가. 그런데 동생은 아버지와 살았던 6년 반의 시간을 지긋지긋해하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자 이제는 아버지와 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와 결혼한 동생은 더 이상 막내에게 아버지를 맡기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아버지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다. 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살림을 도와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버지는 혼자 살겠다고 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귀국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내가 돌아오기만 하면 아버지를 돌보고 동생들의 짐을 벗겨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어떻게?’라는 방법은 갖고 오질 못했다. 나는 러시아로 떠나기 전과는 달리 결혼해 가정을 가진 몸이었다. 집도 없는데 아버지를 모시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한국에 오기만 하면 될 거라고 여긴 거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음을 깨닫고 무력해졌다. 나는 출가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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