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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10.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45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우울증의 시작

우울증의 시작   

 

  2003년은 내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전에 겪었던 어떤 어려움과 비교되지 않는 최악의 시간. 흔히 ‘밑바닥을 쳤다’고 하는 표현대로 내려갈 수 있는 최대의 깊이까지 내려간 시간이었다. 러시아에서 지옥의 문 앞에 가보았다면 그 해 나는 지옥 불에서 다 타버리고 재만 남았다.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났으니 나를 불새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2월에 대구 지하철 사건이 일어났다. 지하철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빨리 빠져나오지 못해 무고한 생명들이 희생되었다. 러시아에서 각종 사고 소식에 예민해져 있던 나는 한국에 오자마자 그런 참사를 접하고 한국이 주는 안정감을 잃어버렸다. 사고와 재난은 어디서나 일어나는 법이었다. 의도적으로 뉴스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사건을 대할 때마다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질문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다. 답이 없는 질문으로 자신을 괴롭힐 바에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11년 후 세월호 사건 때도, 작년의 이태원 참사 때도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는 방어기제를 발동시켰다.)

  시작은 이랬다. 동생 진이 나서서 아버지가 지낼 저렴한 요양시설을 알아보았다. 진은 곤지암에 있는 요양원을 찾아냈다. 아버지와 진과 함께 그곳에 가보니 몸이 건강하신 노인들이 각자 자기 방을 쓰면서 지내고 계셨다. 외출도 자유롭고 비용도 괜찮았다. 아버지는 별로 오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나와 진은 아버지 의견을 무시했다. 여자 원장은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증명할 자료를 요구했다. 병이 있는 분은 거기서 생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에게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으시게 했다.

  일주일 후 진이 내게 검진 결과를 문자로 알려왔다. 아버지의 간과 폐에 이상소견이 있으니 정밀검진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을 보자마자 가슴이 쿵 하며 불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술과 담배를 많이 하셨으니 당연히 간과 폐가 정상일 리 없지. 무슨 문제가 있는 게 당연해. 그런데 만약 큰 병이면? 암이라도 발견되면?’ 안산의 고대병원에 검진 예약을 해놓고 기다리는데 그때부터 불면증이 시작됐다. 밤에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아 음악을 들어보기도 하고 일어나 거실을 빙글빙글 돌며 걸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하룻밤을 불면으로 날려 보내면 다음 날은 피곤해 잠이 들었다. 그렇게 이틀에 한 번씩 잠을 잤다.

  대학병원이라 검진받고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 총 3주가 걸렸다. 그때 검진 결과를 바로 확인했더라면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3주 동안 키워진 불안이 나를 나락으로 빠뜨렸다. 나는 최악의 결과를 상상했다. 코아의 특징인 파국적 사고가 발현되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것, 그래야만 그 상황을 마주할 전투태세를 갖추는 데 나는 여전히 익숙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무지 마음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돌봐드리러 왔는데 만약 아버지에게 큰 병이라도 발견된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분명 안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은 그 상황을 기다리는 긴장이 나를 극도로 압박했다. 불면에 두통이 더해졌다. 목 윗부분부터 시작된 두통은 잠시도 가라앉지 않고 머리 위로 퍼져 올라갔다.

  마침내 검진 결과가 나왔다. 신기하게도 결과는 그다지 별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나는 믿기지 않았다. 너무 좋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아 감사하다. 이제 되었다.’ 나는 그것으로 긴장이 끝나고 내 마음도 평온을 되찾을 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불면과 두통은 가라앉질 않았고 거기에 다른 증상들이 더해지기 시작했다. 두통은 점점 심해져 마치 머릿속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폭탄이 곧 터져 머리가 날아가 버릴 듯 머리에 손을 대면 뜨끈뜨끈했고 아프지 않은 지점이 없었다. 병원과 약국을 다니며 진통제를 처방받아도 전혀 듣질 않았다. 평생 가라앉지 않을 끔찍한 두통과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그 사이 시부모님이 돌아오셨고 3월이 되어 부산대에 출강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시부모님께 내 증상을 숨겼지만, 곧 탄로가 나고 말았다. 시부모님은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KTX가 없던 그때 부산까지 가는 데 통일호를 타고 다섯 시간이 걸렸다. 기차 안에서도 불안 증세가 나타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나갔다 돌아왔다 반복했다.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갑자기 왼쪽 가슴에 묵직하게 누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건 또 뭐지?’ 통증은 약해졌다 강해졌다 반복하며 찾아왔다. 부산대 안에 있는 상암 회관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 날 두 과목을 수업했다. 수업 시간 전에 안절부절못하다가도 수업 시간에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강의했다. 얼마나 서고 싶던 대학 강단이었는가. 그런데 첫 학기부터 강의를 즐기기는커녕 수업 준비와 부산에 내려가는 일이 고문이 되었다. 강의를 마치고 구포역으로 와서 수원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다. 플랫폼에 서 있는데 비참함이 몰려왔다. 한국에 오면 모든 게 순조로울 거라 여겼는데, 이 무슨 복병을 만났단 말인가.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쌀쌀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러시아에서 불었던 바람 못지않게 차가웠다. 눈물이 맺힐 뿐 울음이 터지지도 않았다.     

  병원을 찾아 검사했지만, 가슴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의사는 스트레스성일 거라고 했다. 다음에는 장이 꼬이는 통증이 왔다. 오른쪽 아래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밤낮으로 괴롭혔다.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불안이 문제였다. ‘대장암에 걸린 거 아냐?’ 검진을 받는 게 두려워 바로 병원에 가지 못했다. 그때쯤 나는 우연히 건강염려증이란 질병에 대해 알게 됐다. 증상이 나와 똑같았다. 실제 몸에 이상이 없어도 몸에 각종 증상이 나타나고 그걸 큰 질병의 징후라고 추측하며 불안해하는 병이었다. 나는 건강염려증이라는 걸 알고 나서도 여전히 내게는 뭔가 큰 병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게 바로 건강염려증이었다.

  가라앉지 않는 두통이 제일 큰 문제였다. 나는 뇌종양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안산 고대병원 신경외과에 가서 증상을 얘기하니 의사는 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며 신경정신과 예약했다. 그러나 예약한 날짜까지는 한 달이 남아 있었다. 그때 바로 신경정신과에 갔더라면 최악의 고통까지는 맛보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에서 경험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다시 엄습했다. 안절부절하고 초조해 밥맛을 잃었다. 한 달 사이에 45킬로그램이던 체중이 38킬로그램까지 줄었다. 걸을 기운조차 없었다. 다섯, 여섯 살 꼬마가 뛰는 모습을 보면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 걸까 부러웠다. 나는 다시는 뛸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우리 부부는 내가 다니던 관악교회와 온누리교회를 동시에 다니기 시작했다. 관악교회는 전과는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속사정으로 교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교회였는데 교회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할 형편이 아니었다. 형제, 자매들은 찢어진 관계로 고통스러워하며 신음했다. 나를 좀 돌봐달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나를 동생처럼 아껴주시던 재영 형제님, 분희 자매님 부부가 우리를 식사에 초대했다. 내 몸을 보신해야 한다며 추어탕을 시켜주셨는데 나는 식사를 하다가 그대로 뒤로 쓰러져버렸다. 그분들은 놀라서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일주일 동안이나 보살펴주었다. 일주일 내내 나는 혼미한 상태에서 자다 일어나 자매님이 해주시는 식사를 하고 다시 눕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래도 그 일주일 동안만큼은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내가 잘 알고 좋아하고 신뢰하는 분들이 곁에 있으니 안정감이 들었다. 일주일 후 몸은 좀 회복되었지만 그래도 두통은 여전히 가라앉질 않았다.

  두통이 너무 심해져 불안이 극도로 치솟은 어느 날 나는 광인이 되어 울부짖었다. 남편은 바로 다음 날로 영등포 건강검진센터에 예약했다. 뇌종양 판정이 나오면 나오는 거지 하는 마음을 먹은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나 다름없었다. 검사하러 가는 도중 지하철 안에서 느낀 그 불안, 검진 시간까지 기다리는 몇 시간의 죽을듯한 초조함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머리를 하얀 MRI 통 안에 집어넣고 두려움과 끔찍한 소음에서 벗어나고자 눈을 감고 몇 분 동안 쉼 없이 숫자를 세었다. 결과는 정상이었다. 긴장이 풀리며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제 괜찮으려나 싶었다. 그러나 안정감은 잠시뿐. 두통은 계속되었고 뇌종양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몸 어딘가에 다른 심각한 질병이 있을 거라는 두려움이 떠나지 않았다.

  시부모님은 이제 내 증상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시고 며느리가 정상적인 사람인지 의심하시는 것 같았다. 너무 입맛이 없어 어느 날은 시어머니께 “어머니, 갈비찜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시어머니는 갈비찜을 해주셨다. “네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다. 믿음으로 이겨내야지.” 그런 말씀을 하곤 하셨다. 나는 이게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억울했지만 항변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더 불안해져서 자꾸 피하고만 싶었다. 교회에서 박 만근 형제님이 심방을 오셨다. 십수 년 전 나와 같은 날 침례를 받았던 형제님이었다. 형제님은 내 증상에 대해 들으시더니 “귀신이 들렸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귀신이 나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귀신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귀신은 나를 중병에 들게 하고 결국은 나를 죽게 할 힘이 있는 존재로 보였다. 누군가 귀신 얘기를 하기만 해도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나는 러시아에서처럼 집을 떠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갈망에 시달렸다. 산과 강이 있는 곳이면 마음이 안정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남편이 내 소식을 지인들에게 알렸고 한 목사님이 침을 잘 놓는 집사님 한 분을 소개해 주셨다. 마침 안산에 침을 놓으러 오는 날 그 집사님을 만났다. 그가 큰 침으로 머리 정수리에 침을 꽂자 신기하게도 통증이 금세 사라졌다. 대단한 실력이었다. 그는 내게 아산에 있는 본인 집에 가서 계속 침을 맞아볼 것을 권유했다. 나는 당장 그러겠다고 했다. 그날로 남편과 함께 그의 차를 타고 내려가서 일주일을 지내며 침을 맞았다. 아이 둘에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지만, 그는 나 외에도 자궁경부암으로 고생하시는 할머니 한 분을 집에 모셔놓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매일 아침, 저녁 식사를 차려 냈다. 아침이면 아이들이 먼저 깨어 TV를 틀고 어린이 프로에서 흘러나오는 동요를 따라불렀다.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이 깨었다. 나는 다시 노래 부를 수 있을까. 누군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나의 불안과 황폐함은 대조적으로 더 강해졌다.

  불안에 우울감이 더해졌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여보? 한국에 오면 좋을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괜찮을 거예요. 나을 거예요.”

남편은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증상과 행동을 옆에서 다 지켜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불쌍히 여길 뿐이었다. 어느 순간 이런 나와 결혼한 남편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아산에서 침을 맞았던 때는 4월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나는 더 이상 강의를 계속할 수 없었다. 최 교수님께 전화해 강의를 계속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교수님은 한번 강의를 중단하면 다시 하기 힘들다며 간곡히 만류하셨다. “도저히 강의를 준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교수님. 기운이 없어서 부산까지 내려가지도 못해요.” 교수님은 할 수 없이 내 청을 받아들이셨다. 침을 맞는 손님들이 스파비스로 왔다. 나와 남편은 집사님 차로 가까운 스파비스에 가서 하루 종일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내 차례가 되어 침을 맞으면 그걸로 할 일은 끝이었다. 그 일주일 동안은 두통이 없이 지냈다. 그런데도 불안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이제는 대장암이 걱정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검진받기로 결심했다. 그 후에는 다른 병이 없을 것 같았다. 집사님을 소개해 주셨던 목사님이 방문하셔서 나와 면담하셨다. 말씀 도중 귀신 얘기를 하시길래 불안을 느낀 나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상식에 벗어난 행동이건 아니건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산에서 시댁으로 돌아와 대장암 검진을 받았다. 결과는 정상이었다. 준비도 힘들었지만, 검사를 받고 나서 기운이 소진되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당시 나를 일대일로 양육해 주시던 이지숙 집사님 댁으로 갔다. 사실 양육은 전혀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집사님은 늘 내게 긍정적으로 “곧 괜찮아진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집사님의 긍정적인 말을 들으면 조금 안심이 되는 듯해서 자주 그분을 찾았다. 집사님은 서울대 간호학과를 나오신 분이었다. 결혼 전 정신과에서 간호사로 일하신 경험이 있는데도 나에게 정신과에 가보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분이었다. 나는 집사님에게 백숙 요리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염치와 체면, 타인에 대한 배려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 끙끙대는 동안 집사님은 백숙을 요리해 오셨다.

  한번은 아버지 집에 갔다가 불안해하는 내 모습을 철이 발견했다. 철은 별말 없이 나를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내가 “집에 간다.”고 하자 “누나, 맛있는 거 사 먹어.”하며 십만 원짜리 지폐를 내게 내밀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내 모습을 보는 게 마음 아플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만도 고마웠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내게 내밀자 마음이 뭉클했다. 내가 도움이 되자고 왔는데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고 있었다. 빚을 갚기는커녕 내가 짐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반이 무너져 내린 나의 정신은 미안하다는 느낌조차 감당하지 못했다.

  지연은 나의 상태를 대충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내게 지연이 전화했다.

“내가 신문 기사를 봤는데, 아무래도 너 우울증 같아.”

“우울증?”

“응. 너도 한번 봐. 그거 병원 가서 약 먹으면 괜찮아진대.”

“예약해 놓기는 했어.”

“언제까지 기다려? 가까운 병원이라도 빨리 가 봐.”

우울증...낯선 단어였다. 그때까지 내가 우울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 머릿속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지연 말고는 그런 말을 해준 사람도 없었다. 병원에 가면 괜찮아질 수 있다는 말이 터무니없이 들렸다. 나는 기약 없이 나을 수 없는 천형에 걸린 사람처럼 절망하고 있었다. 이런 증상에 치료법이라는 게 있을까.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무지했다.

  신문을 찾아 우울증에 대해 읽어보았다. 증상이 나와 똑같았다. 내가 우울증이구나. 마침내 내 병명을 알아냈다. 안산 고대병원에 예약한 날짜까지는 아직 두 주 정도 더 남아 있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불에 타는 날들이었다. 방법이 있다면 두 주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길었다. 온누리교회에서 신경정신과 전문의 차 준구 장로님이 하시던 회복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여자 집사님이 우울증으로 죽을 뻔했는데 장로님 병원에 가서 살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집사님이 기억나서 바로 전화했다. 차 준구 장로님이 하시는 병원 연락처를 아시냐고 물었다. 집사님은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시며 빨리 가보라고 했다.

“저 나을 수 있을까요?”

“그럼요. 나 보세요. 저는 더 심했어요.”

어떻게 나보다 더 심할 수가 있을까.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나는 그 말이 의아하기만 했다. 어쨌든 집사님의 말은 내게 캄캄한 암흑 속을 비추는 한 줄기 빛이었다. 병원에 전화해 위치를 물었다. 처음에는 남편과 버스로 가다가 길을 잘 몰라 되돌아왔다. 역시 정신과는 가는 게 아닌가. 그러나 며칠이 못 되어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나는 시아버님께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드렸다. 5월 첫 주 두 달 반 동안 알 수 없는 증상들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나는 드디어 정신과 문턱을 넘었다. 아버지하고만 연관되던 정신과가 내 삶의 일부로 들어온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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