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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11.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46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정신과 치료

정신과 치료    

 

  병원은 송탄 전철역 가까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탄은 어렸을 때 살았던 평택과 이웃해 있었기 때문에 내게 친숙한 곳이었다. 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송탄 신경정신과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니 작은 공간 안에 사람들이 의자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담하고 깔끔하게 꾸며놓은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 나와 비슷한 증상들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유대감마저 느꼈다. 빈 의자가 생겨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내 옆에 얼굴이 갸름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모의 젊은 여성이 앉아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조금 더 들어 보였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나에게 관심을 나타냈다.

“자기는 어떻게 여기 왔어?”

처음 보는 사람보고 자기라고 하는데 여성스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사랑스럽게 들렸다. 어색하기보다 친근하게 느껴져서 말문이 열렸다.

“아는 집사님이 소개해 주셨어요. 온누리교회에서.”

“그랬구나. 자기 그동안 엄청 힘들었구나.”

마치 내 사정을 아는 듯한 그 말에 내 마음이 녹아버렸다. 나는 짤막하게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녀는 “흠, 흠” 소리를 내기도 하고 고개를 거세게 끄덕이기도 하면서 ‘나도 다 알지’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냈다.

“고생했구나. 에휴, 여기 오는 사람들 다 고생 고생하다 오는 거야. 나도 죽는 줄 알았잖아.”

“언니는 어떠셨어요?”

“내 얘기 궁금해? 해줄까?”

“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녀도 온갖 신체 증상으로 우울증이 시작됐다. 국내에 있는 병원을 안 가본 데가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극도로 안 좋았다. 어떤 검사를 해도 원인을 밝히지 못했는데, 그녀는 분명히 큰 병을 찾아내지 못하는 거라고 확신했다. 미국에 있는 유명한 병원까지 가 검사를 받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거액의 돈을 쓰고서도 원인을 찾지 못했고 결국 누군가의 권유로 이곳 정신과에 오게 되어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때부터 약을 먹었고 신체 증상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검사를 받으러 미국까지 갔다는 얘기가 놀라웠고 그러면서 이해도 되었다.

“지금은 좀 어떠세요?”

“많이 좋아졌지, 뭐. 그래도 남편하고 사이가 안 좋아서 스트레스가 많아.”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성이 남편과 왜 사이가 좋지 않을까. 우울증을 앓고 있는데 남편이 좀 잘해 주면 좋을 텐데. 우리는 서로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차례가 되어 그녀는 진료실에 들어갔다. 그 후에도 몇 번 우리는 병원에서 우연히 만났고 서로 전화 통화도 했다. 그녀의 삶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지만, 아직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없던 나는 무엇이 그녀를 우울증으로 몰고 갔는지는 파악할 수 없었다. 우리 둘 모두에게 우울증은 그 실체가 잡히지 않는 액체 괴물처럼 우리에게 들러붙어서 어떻게 떼어내야 할지 모르는 공동의 적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섰다. 차 준구 장로님은 이미 온누리교회에서 몇 번 보아 익숙한 원장님이었다. 머리 가운데가 약간 대머리였고 웃지 않을 때는 까다로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웃을 때는 사람 좋은 분이라는 신뢰가 들었다. 대기실에 비해 진료실은 꽤 넓었고 책장에는 영어로 된 전문 서적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너무 불안해서요.”

나는 어떻게 내 증상을 설명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뭐가 불안해요?”

“제가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안해요.”

장로님은 살짝 코끝을 찡그리더니 다시 물었다.

“언제부터 그래요?”

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버지의 건강검진부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줄줄이 이야기했다. 장로님은 내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교회에서는 뭐라고 해요?”

“귀신 들렸다고.”

“본인 생각은 어때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장로님은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셨다.

“본인은 우울하고 불안한 거예요. 그건 약을 먹어야 하는 거지 기도하거나 해서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귀신 들렸다고 하는 사람들 말은 아예 듣지 마세요.”

온누리교회의 장로님이고 예배까지 인도하시는 분이 그리 말씀하시니 속이 다 후련했다.
 “약을 먹으면 정말 낫나요?”

장로님은 한 20분 정도 약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에 대해 처음 들었다. 우울증은 본질적으로 이 신경전달물질에 문제가 생겨서 걸리는 병이었다. 약은 그 물질의 분비를 도와주어서 우울한 기분을 조절해주고 불안을 낮춰준다.

“내성 같은 건 생기지 않나요?”

“이 약은 평생 먹어도 괜찮은 약이에요.”

장로님은 약에 대한 나의 거부감과 저항감을 누그러뜨리는 말씀을 덧붙였다.

  나는 약을 처방받고 긴 설문 검사지를 받아 병원을 나섰다. 병원에서 바로 처방받은 약을 먹었다. 분홍색으로 된 원형 알약이었는데 나중에 약 이름이 브로마제팜이라는 걸 알았다. 그 약을 하루 세 번 먹으라고 했다. 시아버님의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십 분 정도 지났을까. 지난 두 달 반 동안 나를 떠나지 않았던 불안감이 사라지고 있었다.

“여보, 신기해. 나 지금 불안하지 않아.”

“그래요?”

약 한 알을 먹었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극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지? 나는 놀랐고 한편 ‘이제 살았다.’는 깊은 안도감에 행복하기까지 했다. 약 한 알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을 그동안 지옥에서 지냈다니.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더 빨리 알았더라면. 별별 생각이 다 스쳤다. 이런 정도라면 강의도 그만두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나는 그때 누구나 그런 극적인 약 효과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맞는 약을 찾기 위해서 병원을 전전하고 용량을 조절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처음 먹은 약이 나와 딱 맞았던 건 운이 좋았던 셈이었다는 것도. 나는 이제 곧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될 줄로 낙관했다. 앞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데 삼 년의 긴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장로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로?  

  

  처음에는 매일 아침, 점심, 잘 때 세 번 약을 먹었다. 마치 우울증이 다 나은 듯이 편안했다. 그 지독했던 불안이 이렇게 말끔히 사라지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장로님은 효과가 좋으니 약을 바로 두 번으로 줄이자고 했다.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먹어도 여전히 편안했다. 또 한 번으로 줄였다. 그 정도도 지낼만했다. 그렇게 하루 한 번 알약 한 알로 몇 달 동안 지냈다.

  곤지암 요양시설에서는 아버지의 검진 결과를 보고 입소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혀왔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입소 자격 박탈이었다. 병원에 가기 전에 나는 아버지는 어떻게 하나 생각만 하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관악교회에서 알던 지현 자매님이 운영하는 요양시설에 대해 알게 된 나는 자매님에게 전화했다.

“자매님, 우리 아버지 좀 받아주시면 안 돼요?”

“자매, 아버님 처지가 딱하긴 한데 여기서 잘 지내실 수 있을까?”

“제발 도와주세요. 가실 데가 없어요.”

지현 자매님은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기 힘들다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울면서 호소하자 일단은 모셔보자고 했다.

  병원에 다녀온 그 주는 5월 첫째 주였다. 그 주말에 아버지를 모시고 김포에 있는 그 시설로 아버지를 모시고 가기로 했다. 아예 짐을 다 가지고 입소할 준비를 해갔다. 짐이라야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옷, 속옷, 양말, 수건이 전부였다. 아버지에게는 아버지 것이라고 할만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 따뜻하고 햇살이 밝은 5월이었다. 진은 다섯 살 된 조카 예영을 데리고 왔다. 예영이는 내가 결혼한 해, 같은 달에 태어났다. 러시아에서 진이 보내준 예영의 사진을 보고 또 보고 조카와의 만남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랐다. 귀국해서 만난 예영은 환상 그 자체였다. 오밀조밀한 눈, 코, 입이며 통통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몸에 뽀얀 살결. 내 앞에서 살짝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는 모습에 나는 황홀해졌다. 고모를 처음 본 예영은 낯을 많이 가렸다. 아기 때부터 보아오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아쉬운 조카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설은 내 맘에 쏙 들었다. 이층으로 된 건물이었는데 일 층에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이 큰 방을 함께 쓰셨다. 이층에는 작은 방이 두 개 있었는데 병원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들이 쓰는 방이었다. 할머니들은 십여 분 계셨는데 이층에는 할아버지 한 분뿐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실 분이었다.

“저희 아버지 잘 부탁드려요.”

“아, 걱정 마요. 사이 좋게 잘 지낼 테니.”

그런데 아버지를 모셔놓고 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현 자매님의 전화가 왔다.

“이층에 계시는 다른 아버님이 자매 아버님하고 도저히 못 지내겠다고 하시네.”

“왜요?”

“자꾸 담배 달라고 하시고, 돈 꿔 달라고 하시고. 너무 귀찮게 하시나 봐. 여기 오래 못 계시겠어.”

“그럼 어떡해요, 자매님? 아버지 잘 설득해서 그런 행동 못 하시게 하실 수 없어요? 저희가 곧 가볼게요.”

우리는 자주 시설에 가서 아버지를 설득하기도 하고 함께 생활하는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잘 봐달라고 부탁드리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끌었는데 결국 지현 자매님에게 최후통첩이 왔다.  

 “자매 아버님이라 내가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 아버님은 이런 시설에 못 계셔. 병원으로 가셔야 해. 병원 모시고 가, 자매.”

  내가 더 호소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알겠어요, 자매님.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나는 진과 의논해서 일단 아버지를 일산 백병원 정신병동에 한 달 동안 입원하시게 했다. 그곳에서 아버지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후에 거취를 결정하기로 했다. 백병원 정신병동은 개방병동이었다. 가족들이 병동 안에 들어가 환자의 생활도 살펴볼 수 있고 면회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넓은 병동 안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어서 만족하셨다. 그곳에서 계속 지내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그곳은 장기 입원을 할 수 있는 병동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면회하러 가면 다양한 환자들을 볼 수 있었다. 젊은 사람들도 꽤 많았다. 한번은 내 옆에 슬쩍 다가오더니 자기 얘기를 두서없이 하는 남자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얘기를 들어주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정신 분열인가 보구나.’ 그의 얼굴은 전혀 무섭거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한 달 후 아버지에게 알콜성 치매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그리고 의사는 뇌혈관에 부풀어 오른 곳이 있는데 그게 터지면 언제든지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수술하면 오히려 터질 수가 있으니 그냥 두는 게 낫다고 했다. 터질 가능성이 크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언제든지 아버지의 뇌혈관이 터져 사망하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의 뇌혈관은 무사했다. 알콜성 치매는 그동안 왜 아버지와 제대로 된 소통이 되지 않았는지, 아버지가 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지 못했는지 설명해 주었다.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탓을 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병원에서 아버지가 가실 수 있는 알콜 전문병원을 소개해줬다. 파주에 있는 민들레 병원이라는 곳이었다. 한 달 병원비가 오십 만원이었고 입 퇴원이 자유로웠다. 무엇보다 장기 입원이 가능한 곳이었다. 바로 엠뷸런스로 아버지를 이동시켰다. 민들레 병원에서는 경의선 금촌역에서 내리면 정해진 시간에 병원 차량이 면회객을 데리고 오고 데려다줬다. 나는 매달 한 번씩 토요일에 아버지를 면회하러 갔다. 아버지는 2003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도중에 인천 병원으로 옮겼던 이 년을 제외하고는 인생의 말년을 그곳에서 보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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