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47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약을 너무 빨리 줄였던 탓일까. 이 정도면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몇 달이 지나자 깊은 우울감이 매일 지속됐다. 약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생각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약 효과가 하루 종일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약을 빨리 끊어보려고 힘들어도 참다가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약을 먹었다. 장로님도 나보고 약을 먹는 횟수를 조절해서 알아서 먹으라고 하셔서 그리 한 것이 우울증을 겪는 내내 불필요한 고통을 겪게 된 원인이 아닌가 싶다.
성경 시편 23편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는 구절이 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는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두 텍스트는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겪게 되는 필연적인 고통스러운 과정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비유로 표현한다. 내게는 2003년부터 시작된 우울증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다. 다윗이나 크리스천과는 달리, 나는 그 기간 내내 해를 두려워했고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갖지 못했다. 나는 그 시기를 견뎌내지도 이겨내지도 극복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버텨낸 것조차 아니었다. 내가 한 것은 그저 그 골짜기를 통과한 것이었다. 죽지 않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 통과하게 되었다. 내게는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성경에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라는 구절이 있다. 우울증을 겪는 나를 격려하느라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구절을 들었다. 나는 우울증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이런 시험은 인간이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항변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리고 이 구절의 ‘시험’은 유혹을 말하는 것이지, 인생에 닥쳐오는 감당해낼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나 시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우울증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약을 먹고 치료받아야 한다.
나는 지난 내 삶을 돌아봤다. 그 이전에는 우울증이 없었을까. 되돌아보니 대학에 입학할 때도, 대학을 졸업할 때도, 러시아에 갔을 때도, 결혼했을 때도 나는 우울증을 겪은 게 분명했다. 인생의 큰 전환점에 서거나 상실을 경험할 때, 좌절을 겪을 때 나는 늘 우울증에 걸렸었다. 그것도 3년에서 5년 정도 주기가 있었다. 아버지의 알콜 중독이 심해진 주기와 거의 일치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내 몸이 기억하는 그 주기를 우울증으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때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텨냈는지 신기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아무리 우울하고 힘들어도 일상생활을 어떻게든 꾸려나갔다는 점이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공부하고 책을 읽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모든 일상이 무너졌다. 치료를 받기 전 먹고 자고 걷고 숨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약을 먹기 시작한 후에도 기본적인 일상은 회복되었지만, 삼 년 동안 나는 공부를 할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우울증이 회복되고 나서 나는 숨 쉬고 먹고 자고 뛰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
나는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이었다. 내 인생은 끝났다. 대학 입학 후에도, 졸업 후에도, 러시아에 가서도 이제 내 인생은 끝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나는 하던 공부를 여전히 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그 긴긴 하루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난감했다. 책과 공부가 내 삶에서 사라지자 시간의 여백이 사막처럼 넓게 펼쳐졌다. 사람들을 만나러 돌아다녔다. 6년의 공백이 있었으니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 영주에 사는 사촌
언니 집도 다녀오고 친척들을 만나러 한 바퀴 돌았다. 그런 내 모습이 꼭 일 년에 한 번씩 집을 비우고 친척들을 찾아다니는 아버지를 닮아 보였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결과가 이거란 말인가. 러시아에서 그 무서운 시기를 겪어가며 견딘 대가가 이거라고. 큰 것을 바라진 않았지만 그립던 고국에 돌아와 그 푸근한 품에도 안겨보지 못하고 이게 뭐란 말인가. 나는 페테르부르크에 갔을 때보다 더한 외로움을 느꼈다. 고국에서 나는 외국인 같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한국은 변해 있었고 나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배우 김정은이 하는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를 들었다. 그 문구가 외계인의 소리같이 생경하고 기이하게 들렸다. 혁명기의 시인 에세닌은 미국에서 돌아온 후 혁명으로 변화된 고국의 현실에서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결국 페테르부르크 이삭 대 성당이 내다보이는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혁명 후 유럽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던 천재적인 여성 시인 츠베타예바는 고국에서 유럽에서보다 더한 고독을 맛보다가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했다. 그들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들과 달리 내가 자살 충동을 느끼지 않았던 건 순전히 죽음의 공포 때문이었다.
죽음의 두려움과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었다. 매일 근거 없는 죽음의 공포를 맛보면서도 동시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나는 죽음의 문제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찾아올 죽음이 가공할 정도로 두려웠다. 이미 러시아에서 시작된 공포가 이제는 내 속에 깊이 둥지를 틀고 잠시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왜 이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인 걸까,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겪는 고통일까, 죽음 후에 있을 사후의 세계에 대한 불안일까. 명료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켜진 회로처럼 늘 혼란스러웠다. 뚜렷한 원인도 해결책도 찾지 못한 채 죽음의 주변을 뱅뱅 돌았다. 톨스토이가 『참회록』에서, 소설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 유명한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집요하게 죽음의 문제를 파고들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위대한 대작가가 풀지 못하여 죽을 때까지 고민했던 문제라면 나 같은 사람이 쉽게 풀 수 없는 문제인 건 당연했다.
우울증이 낫고 나서도 죽음의 문제는 근 이십 년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나에게는 멸절 불안이 있다. 아마도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난동을 부리면 어린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잃은 상처가 내게 작용했을 것이다. 내게 죽음은 폭력과 동의어였다. 그저 자다가 조용히 죽는 죽음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거기에는 폭력이 없으니까. 그러나 사고나 살해, 병으로 인한 죽음에는 반드시 폭력적인 요소가 끼어 있었다. 사람은 그렇게는 죽고 싶지 않은데 죽어야 하는 현실을 강제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죽음은 인간에게 불가항력으로 덮쳐오는 폭력이고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비웃는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거하는 인간을 경탄하고 존경했다. 그들만큼은 죽음보다 인간이 강하다는 걸 증명하는 이들이었다. 죽음은 인간을 가장 나약하게 만들고 비굴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존엄사를 지지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죽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부여해주길 원한다.
죽어야만 하는 인간의 유한성 앞에서 신에게 굴복했던 나는 아직도 죽음을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기독교는 죽음을 결코 부정적인 것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죽음은 단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문턱에 지나지 않을 뿐, 이 세상의 수고를 다 마친 사람은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태도를 습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부끄러웠고 남들에게 드러내기가 힘들었다. 이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죽음이 그렇게까지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됐다. 그 시작은 아버지의 죽음이었지만 갱년기를 거치며 극도의 쇠약함을 경험하면서, 나는 죽음이 나를 이 육체의 고통에서 해방해 줄 수 있는 고마운 친구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막상 죽음의 순간이 닥치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전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며 살지는 않는다. 어떤 논리적인 해결이 아니라 삶의 경험이 가져다주었고 고통의 시간이 벌어다 준 고마운 깨달음이다. 이제는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를 날마다 고민하며 살고 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익숙해진 내 삶의 방식이다.
독립
시댁에서 지내는 생활은 나의 우울증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입이 없는 남편과 나는 시부모님에게 얹혀사는 신세였다. 손님맞이를 좋아하던 나는 시댁에 있는 동안은 우리 손님을 맞이할 전망이 없다고 판단되자 갑갑해졌다. 집에서 내가 결정하고 집행할 수 있는 자유도 없었다. 열여섯 살 때부터 집안의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고 처리해왔던 나로서는 시부모님에게 종속된 처지를 견디기 힘들었다. 독립적인 나의 성향으로는 우리의 삶에 자꾸만 개입하시는 시부모님의 태도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나는 남편에게 독립하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남편은 방법을 찾지 못해 난감해했다. 밖을 나가보면 아파트고 빌라고 집들이 참으로 많았다. 저 중에 우리 부부가 살 방 한 칸이 없단 말인가. 이 나이가 되도록 방 한 칸 마련할 능력이 없는 우리 부부가 한심스러웠다. 그 와중에 내가 방법을 생각해냈다. 아버지가 병원에 가신 후 철이 혼자 방 두 개 있는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나는 철에게 우리에게 방 하나를 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독립해야겠으니 당분간 같이 지내자고 했다. 철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남편도 동의했다. 시부모님에게 허락을 구하는 게 문제였다. 시부모님은 일 년 정도는 우리와 함께 지내길 원하셨다. 우리가 나가겠다고 하면 서운해하실 게 뻔했다. 그래도 내 강경한 태도를 본 남편은 시아버님과 대화를 시도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시아버님은 남편이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는 걸 눈치채셨다.
“응, 무슨 일이냐?”
“저희 독립해야겠어요.”
“어떻게? 방법은 있어?”
“처남이 같이 살재요. 처남 사는 집에서 당분간 방 하나 저희가 쓰려고 해요.”
시아버님은 우리가 독립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걸 알아채셨다.
“어떻게 그렇게 사니? 그럼 이렇게 해라.”
말릴 수 없다는 걸 아신 시아버님이 해법을 내놓으셨다. 우리에게 돈을 좀 보태주고 시아버님 명의로 대출을 얻어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대출 이자와 원금은 우리가 갚는 조건이었다.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생각해냈다 해도 남편 성정상 요청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만류하지도 않으시고 독립할 방법을 찾아주신 시아버님이 고마웠다. 시어머니도 서운해하시긴 했지만, 말리지는 않으셨다.
한여름 땡볕 속에서 신림동 일대를 돌아다녔다. 예전에 집 보러 다니던 경험이 있어서 독립할 수 있다는 생각에 며칠을 혼자 돌아다녀도 힘들지 않았다. 빌라만 보다가 우연히 당산동에 있는 아파트를 알아보게 됐다. 우리가 예상한 금액보다 비쌌는데, 철에게 함께 살면서 이자를 같이 감당하겠냐고 묻자 철이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예기치 않았던 동생 철과의 동거가 시작됐다. 일 층에 상가가 있는 복도식 낡은 아파트였다. 한국에서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는 나와 철에게는 주거 조건의 파격적인 상승이었다. 26평대의 방 셋이 있고 제대로 된 거실이 있는 아파트. 전세였을망정 우리만의 그런 집을 갖게 된 건 생애 최초였다.
아파트에서 걸어서 오 분 정도 가면 한강 공원이 나왔다. 당산 철교로 지하철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고 다리를 건너면 한강 가운데 떠 있는 선유도에 갈 수 있었다. 맞은 편은 내가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을 보냈던 망원동이었다. 넓디넓은 한강 공원에는 매일 저녁 근처 사는 주민들이 배드민턴을 치기도 하고 달리기도 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혼자서 공원에 가는 게 일과가 되었다. 사람들이 뭐 하는지 쳐다보며 천천히 걷다가 그네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는 게 습관처럼 매일 반복됐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하고 그 시간에 나와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했지만, 나에게는 그 시간에 나가 사람들은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루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