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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13.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48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남편의 취직

남편의 취직     


  귀국했을 때 남편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한창 왕성하게 일할 나이였다. 일반 직장에서 일한 적은 없지만 군 복무로 공군사관학교에서 교수로 일했던 경력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취직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이 이력서를 보낸 곳 중에서 와 보라고 연락이 오는 데가 없었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면서 취직이 쉽지 않은 현실의 벽을 절감했다. 남편의 나이가 경력직이 아닌 곳에서는 이미 많은 편이었고 학력도 불필요하게 높았다. 지금은 러시아어 학원, 출판사, 문화센터로 탄탄하게 자리

잡은 푸쉬킨 하우스 원장이 우리 과 후배였다. 잠시 아르바이트라도 할까 해서 부탁해 학원에 나갔는데 사흘 동안 앉아만 있다가 돌아왔다.

  남편은 우선 번역회사에 연락해 번역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거리가 조금씩 들어와 남편은 거의 매일 책상에 앉아 번역했다. 독립한 후에는 시부모님의 도움 없이 우리가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번역료는 달마다 들쑥날쑥했다. 둘이 생활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았지만, 번역료만으로는 불안불안했다. 대학 졸업 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과외가 끊길 때마다 불안했던 때가 떠올랐다. 물질에 대한 훈련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결혼 후 다시 시작된 셈이었다. 우울증이 겹쳐있으니 불안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간혹 친구 집에 방문할 때도 나는 돈 쓰기가 무서워 아무것도 사 들고 가지 못했다. 천 원짜리 한 장 쓰는 것도 무서웠다. 러시아에서보다 더한 내핍생활을 해야 했다.

  친구들은 나에게 왜 일을 구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라면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며.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당시 나에게는 남편이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사고가 벗어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남편이 취직하면 그때 나도 일할 거야. 남편이 나 의지하고 취직하지 않으면 어떡해?”라고 답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무책임한 모습을 남편에게서 보게 될까 봐 두려워 미리 방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이력서를 계속 보내면서도 막상 취직에 그리 열성적인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집에서 번역하는 게 편한지 아무 데서 연락이 오지 않아도 태평하기만 했다. 남편의 성격이 원래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라 그랬던 것인데, 나로서는 취직의 의지가 없어 보여 속이 탔다.

  그렇게 연말이 되고 새해가 되었다. 나는 절망 상태였다. 이제 남편의 취직은 영영 불가능해진 것으로 보였다. 나와 남편 모두 이 사회에서 도태된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했던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인가.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고려대학교를 나온들 막상 사회에서 받아주지 않는데 학력이 다 뭐란 말인가. 오십 통째 이력서를 썼을 때 나는 남편에게 그만 쓰라고 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여보, 우리 순복음교회 철야기도 가요.”

기도하지 않고 있던 내가 남편에게 기도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우리 집에서 여의도는 가까웠다. 중1 때 어머니를 따라 철야기도 갔던 기억이 났다. 어머니가 철야기도 가시다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 주부터 금요일마다 밤 열 한 시에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찾아갔다. 15년 만에 찾아간 교회였다. 순복음교회 철야 기도회는 예나 그때나 별반 다름이 없었다. 장의자에서 사람들이 기도하거나 누워 잠을 자기도 했다. ‘여기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구나.’ 집에서는 한 마디도 기도할 수가 없었는데, 신기하게 그곳에 있으니 기도가 술술 나왔다. 사람들의 기도 소리에 묻혀 아무리 크게 기도하고 울부짖어도 나의 절박함은 누구에게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곳에 와 있는 사람 중 나보다 절박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으랴. 기도하다 울고 다시 기도하다 울고를 반복했다. 무슨 말로 기도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두세 시간 기도하고 밖으로 나오면 새벽 한, 두 시가 되어 있었다. 겨울철이라 밤 기온이 찼다. 기도하느라 출출해진 남편과 나는 근처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과 오뎅을 시켜 먹었다. 캄캄한 한강 물이 막막한 우리 미래처럼 보였지만, 기도해서 그런지 곧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낙관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세 주 연속 기도를 한 어느 날이었다. 우리 아파트는 당산동에서 목동으로 넘어가는 다리 바로 앞에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목동에 있는 하나로 농협에 가서 장을 보고 마을버스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그날도 장을 보고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남편의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대학 후배 재영이었다. 대전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러시아 교사로 있는 후배였다.

“선배, 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세요?”

“응, 잘 지내고 있어. 무슨 일이야, 오랜만에?”

“선배, 혹시 우리 학교에서 기간제로 일하실 수 있으셔요?”

“기간제 자리가 났어?”

옆에서 듣던 나는 얼굴에 있는 모든 근육을 움직이며 빨리 승낙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건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네, 제가 곧 러시아로 유학을 가거든요. 몇 년 동안 저 대신 기간제로 일할 교사가 필요해서요. 선배 생각이 났어요.”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주님, 감사합니다. 남편은 대학교 다닐 때 교직 이수를 하지 않았는데, 교사 자격증을 부여하는 시험을 치러서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편입한 직후여서 러시아어에 자신이 없어 시험을 치르지 않았었다.

“그럼 나야 너무 고맙지.”

“그럼, 내일 바로 대전으로 오실 수 있으세요? 교감 선생님과 면접을 보여야 할 것 같아요.”

“응, 알았어. 고마워.”

  남편이 전화를 끊자 나는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여보, 여보. 이건 응답이다, 응답. 기도에 응답해 주셨네.”

“그러네.”

남편은 얼굴이 상기됐지만 나처럼 흥분하지는 않았다. 늘 그렇게 감정의 기복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음날 남편은 모처럼 양복 차림으로 깔끔하게 차려입고 대전으로 내려갔다. 나는 남편의 취직을 의심하지 않았다. 면접을 마친 남편은 전화해 바로 다음 날부터 출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4년 정도 대전 외국어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기적이 따로 없었다. 모든 희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한 순간, 뜻하지 않은 길이 열렸다.

  다음 날부터 남편은 매일 대전으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아침 6시 전에 나가야 출근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영등포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내려 또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야 했다. 출퇴근의 고단함도 일할 수 있다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녁 7시쯤 퇴근했다. 그러나 그런 일과를 계속하기에는 몸도 피곤하고 교통비도 만만치 않았다. 나는 남편과 함께 대전으로 내려가 학교에서 가까운 내동에 원룸을 구했다. 남편과 주말부부로 지내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터널은 끝이 있을까?

     

  남편이 취직되었어도 나의 우울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2003년에는 그해 말이 되면 나아질까 기대했다. 해를 넘겨도 우울증이 계속되자 나는 이제는 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에 낙담했다. 우리는 한국에 와서 바로 아이를 가질 생각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내가 논문을 쓰느라 아이 가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이를 두고 온 엄마들은 하나같이 논문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덜컥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으니 어쩐단 말인가.

“선생님, 우울증 약을 먹어도 임신해도 괜찮나요?”

“뭐 직접적인 상관은 없어요. 임신해도 돼요.”

“그래도 태아에게 영향이 가지 않나요?”

“아무래도 엄마가 약을 먹으면 그 성분이 아이에게 영향이 어느 정도 가기는 하겠지...”

나는 장로님의 말을 우울증이 낫지 않는 동안에는 임신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우울증이 걸린 나는 사실 아이를 가질 시도 자체를 할 수 없었다.  나는 내 나이를 생각했다. 언제 나을지 모르는 병. 곧 마흔이 될 텐데 임신은 영영 불가능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길에서 임신한 여자들의 부른 배를 보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내가 엄마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될 줄 알았다. 아이를 좋아했던 나는 결혼생활에서 아내 역할보다는 엄마 역할에 더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영원히 엄마가 되지 못할지도 몰랐다. 한 달 정도 그렇게 나의 임신 가능성의 상실을 애도하고 난 후 나는 깨끗이 임신을 단념해 버렸다. 그 후 임신하지 못한 데 대해 슬퍼하거나 애석해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입양을 꿈꾸기 시작했다. 엄마가 되는 걸 포기할 순 없었다. 그로부터 십 년 후 우리 부부는 마침내 딸을 입양했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내 나이 마흔여덟이었다.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렸을 때 무엇이 힘드냐고 종종 묻곤 한다. 여러 가지가 있다. 죽음의 공포와 죽고 싶은 마음 외에도 극도의 외로움을 겪는다. 내겐 익히 익숙한 외로움이었지만 더 깊고 처절한 외로움이었다. 날마다 한강 공원에 나가면 사람들이 짜장면을 시켜서 함께 먹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 누군가와 함께 저렇게 음식을 시켜서 함께 먹을 날이 올까. 러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단절된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도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철저한 고립 속에서 나는 마치 수족관 안에 들어있는 물고기 같았다. 수족관 밖의 사람들은 서로 어울리며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만 수족관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그들을 보았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고통도 있었다. 사람들은 의지니 믿음이니 하는 말을 했다. 내 주변에 우울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이야 너무 흔한 질병이 되었지만 이십 년 전만 해도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빈약했다.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는 충고와 조언들이 다 부질없었다. 할 수 있는 힘도 없었고 해본 들 효과가 없었다. 나는 이해받고 싶었다. 공감의 언어가 절실했다. “네 맘 알아. 얼마나 힘드니?” 그런 말이 듣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단순한 처방을 내렸고 쉬운 낙관주의로 나를 단숨에 우울에서 끌어올리려 했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라지만 그 감기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사람들은 몰랐다.

  무엇보다 힘든 건 도대체 왜 우울증이 왔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불안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원인이 해소되었는데도 우울증은 지속됐다. 뭔가 다른 더 깊은 원인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도, 차 준구 장로님도 그 원인을 몰랐다. 이유라도 알면 좀 낫겠는데 병이 온 이유를 모르니 답답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앞으로 이런 삶 아닌 삶이 계속되리라는 예상,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자꾸 나를 덮쳐왔다. 길고 긴 터널이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터널. 사람들은 이 터널이 반드시 끝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희망을 줬다. 나는 아무것도 없어도 좋으니 어서 이 터널이 끝나기만을 염원했다. 과연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나는 그 터널에서 걷지 않았고 무빙워크에 타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신앙은 완전히 박살 나 버렸다. 그래도 하나님이 있다는 믿음 하나는 있었지만, 그 하나님은 내 삶에서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다. 철야기도 후 다시 기도할 수 없었다. 성경을 읽지도, 기도하지도, 찬양을 부르지도 못했다. 믿는 이들과의 교제도 단절되었고 예배에 참석해도 자리만 채울 뿐이었다. 봉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믿음의 이름으로 행했던 모든 행위가 멈춰 섰다.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나님은 나를 내버려 두실 수가 있을까. 완전한 하나님의 부재. 흔히들 말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는 걸 내가 통과하고 있는 것일까. 이 밤이 지나면 아침이 밝아오기는 할까. 영영 밤에 갇혀 그대로 끝나고 마는 건 아닐까. 소스라치게 무서웠다.

  2004년이 되어 고려대 노어노문학과에서 강의를 하나 줬다. 다시는 강의를 못 할 줄 알았는데 고 일 교수님이 기회를 주셨다. 러시아 작문 수업이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이틀 캠퍼스에 가서 학생들 얼굴을 보고 강의를 하니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다음 학기에도 같은 수업을 했다. 2005년이 되어서는 내 전공인 도스토옙스키를 강의할 기회가 주어졌다. 한 학기 동안 열성을 다해 강의했다. 첫 문학 강의였다. 평소에는 책을 읽지 못했지만, 강의 준비를 위해서는 책을 읽었다. 『가난한 사람들』과 『지하로부터의 수기』,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 형제들』 무려 네 작품을 학생들에게 읽혔다. 토론식 수업이었는데 당시 이천년대 학번 학생들은 꽤 사고력이 깊고 자기 생각이 뚜렷했다. 교수님과 토론을 벌였던 학생의 자리에서 이제 내가 가르치는 자리에서 학생들과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잠시나마 희열을 맛봤다. 강의하는 동안은 내가 우울증 환자라는 걸 잊었다. 세 학기를 강의하고 가을부터는 다시 부산대로 출강하기 시작했다. 내 강사 생활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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