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49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자기 삶을 찾아서
자기 삶을 찾아서
2004년에 동생들의 삶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96년부터 LG전자에서 근무했던 진은 미국 지사로 발령받았다. 페테르부르크 미르 한인교회에도 LG전자 주재원들이 출석했었다. 진도 언젠가는 해외에 나갈 기회가 올 것이라 여겼는데 내가 귀국하자 바톤 터치라도 하듯 진이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동안 아버지 문제로 가정 중심으로 살아보지 못한 진과 올케가 안쓰러웠다. 훌훌 가족사에서 벗어나 미국에서 오붓하게 가족끼리만 지내면 홀가분하려니 생각했다. 조카 예영을 몇 년 동안 못 보게 되어 아쉬웠지만 어린 시절 조카에게도 미국 생활이 귀한 추억과 자산이 될 것 같았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동생 가족을 배웅했다. 아버지는 이제 내가 챙길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너희만 잘 지내라고 했다. 미국에 가서도 진은 매달 아버지 병원비 중 이십만 원을 꼬박꼬박 보내왔다. 러시아에서 6년 반, 미국에서 5년, 총 십여 년 동안 진의 가족을 보지 못하고 지낸 셈이었다.
늦깎이 졸업을 한 철은 우리와 함께 지내며 활동을 넓혀가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제 삼십 대 중반이 된 철이 결혼해야 할 텐데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철이 활동 중에 만난 아가씨와 사귀고 있다고 했다. 곧 진의 가족과 우리 부부, 철과 그 아가씨가 만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버지는 빠졌지만 온 가족이 함께 한 시간이었다. 유일한 아이 예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사이를 돌아다니며 누가 삼촌이고 누가 고모이고 고모부인지 어른들과 자신과의 관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처음 보는 삼촌의 애인에게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샐쭉하니 조금 떨어져서 관찰하는 모습이 앙증맞고 귀엽기만 했다.
얼마 후 철은 그 아가씨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일사천리로 상견례와 결혼식이 이어졌다. 12월 초 하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결혼식 날 비가 오면 잘 산다는 말이 있다고 오히려 좋은 징조라 했다. 나는 러시아에서부터 모은 돈 천만 원을 철에게 결혼 비용으로 주었다. 삼 남매가 천만 원씩 쓴 셈이었다. 일단 돈에 관한 한 셈을 다 치러 후련했다. 결혼식은 철이 지휘자로 있었던 목동 제자교회에서 치렀다. 나와 진의 결혼식에서는 어머니 자리에 우리 남매가 어머니 다음으로 의지했던 외숙모가 앉으셨다. 그런데 철은 내게 그 자리에 앉아달라고 부탁했다. 고작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누나지만 철에게는 내가 어머니를 대신하는 존재였나 보다. 나는 기꺼이 그 역할을 수락했다. 동대문 시장에 가서 파란 색감의 한복을 빌렸다. 올케의 어머니와 함께 초에 불을 밝히고 아버지 옆에 앉아 철의 결혼식을 지켜보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다. 어머니가 이 자리에 계시면 어땠을까. 이제 세 자녀가 다 결혼하여 어른이 되었는데 어머니는 보고 계신 건가요.
드디어 우리 삼 남매는 각자 가정을 꾸리고 서로에게서 분리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는 각자 가정 중심으로 지내다 때때로 함께 만나는 시간이 그리 행복했다. 특히 결혼 초기 아이가 없을 때 우리 부부와 철 부부는 자주 만나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고 별일 없이 만나기도 했다. 2007년에 철의 가정에 두 번째 조카 가영이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신생아 때부터 보아온 가영의 존재는 내게 황홀함 그 자체였다. 한, 두 살 때까지는 나를 빤히 응시하던 가영이가 세 살 무렵부터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꼬모, 꼬모.”하며 내게 처음부터 반말을 쓰던 가영은 지금도 존댓말 쓰기를 거부한다. 입양해 딸이 생기기까지 조카들은 내 삶의 윤활유였고 살아있음의 기쁨을 문득문득 느끼게 하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새로운 정착지 대전
2005년이 되자 남편은 더 이상 주말부부로 생활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하고 집에서 출퇴근을 시도했다. 6개월 동안 출퇴근한 결과 한 달에 교통비 지출이 생활비의 3분의 1 수준이 되었다. 결국 나는 대전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대전은 평택과 서울 다음으로 내 인생에서 새로운 정착지가 되었다. 여름에 대전의 중심인 둔산동에 있는 수정아파트에 전세를 구해 이사했다. 수정아파트는 내 어머니 이름과 같았다. 우연이겠지만 어머니 이름을 살고 있는 아파트 명칭에서 매일 확인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당시 나의 우울증은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우울증의 회복 사이클을 그래프로 그려보자면 아마 한동안 변화가 없다가 어느 지점에서 약간의 도약을 보이고 또 한동안 변화가 없다가 도약을 보이는 식으로 그려질 것이다. 약 외에 가장 도움이 된 것은 일이었다. 강의하면서 아주 천천히 생기가 돌아왔다. 강의하고 있는 동안 어떤 학생도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열정적으로 강의한다는 평을 받았다. 중간에 강의가 끊어진 적이 있었다. 그럴 때는 다시 우울감이 심해졌다. 어떤 일이라도 사람들 틈에서 하고 싶었다. 나는 저녁에 역 근처에서 가판대를 벌이고 장사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전에는 생계 때문에 아등바등하는 그들이 안쓰러워 보였지만, 이제는 그들의 몸놀림과 외침이 팔팔 뛰는 생선처럼 생동감 있어 보였다. 어떤 일이든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정직하게 일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을 진심으로 수긍하게 되었다.
일 외에 도움이 된 것은 여행이었다. 우리 부부는 주말에 기차로 갈 수 있는 곳이면 무조건 어디론가 떠났다. 봄에는 산수유와 벚꽃, 매화를 보러 지리산 주변으로, 여름이면 산과 바다가 있는 강원도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유명한 내장산 자락으로, 겨울이면 따뜻한 남도나 겨울 바다를 보러 동해안으로 떠났다. 아직 해외여행을 갈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러시아에 가기 전에 국내 여행을 거의 해보지 못했던 우리는 아이 없이 자유로운 몸으로 비행기를 타야 하는 제주도나 배를 타야 하는 섬 빼고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한번은 단양을 거쳐, 강원도 태백, 정동진, 강릉까지 삼박사일을 여행했는데, 그럴 때만큼은 우울증이고 뭐고 다 잊고 즐거운 기분에 들떴다. 외향적인 성격 덕분에 어디 가나 사람들이 있으면 우울감이 잠시나마 자리를 비켜주는 듯했다.
자연은 치유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나무들이 뿜어내는 향내를 맡고 멀리 산봉우리 뒤에 또 산봉우리가 솟아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시나마 마음에 평화가 찾아 들었다.
내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매주 어김없이 규칙적으로 전화를 걸어주었던 친구 지연과 대화 선배였다. 그 두 사람은 일주일 동안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고 나는 두서없이 떠오르는 대로 변하지 않는 나의 감정 상태를 일기에 적듯이 그들에게 들려줬다. 두 사람은 나의 회복을 재촉하지도, 내 상태에 한숨을 짓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내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들어주었다. 우울증 환자를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고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 준 위안은 컸다. 나는 우울증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어디에서 도움이 될 인연을 만날지 누가 알겠는가. 불가항력으로 내게 닥쳐온 우울증에 대해 내가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적어도 숨기거나 창피해할 일은 아니었다.
남편은 공감 능력에 있어서는 거의 제로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 우울증의
회복에 남편의 기여가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내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지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남편은 일등 공신이라 할 만했다. 어쩌면 공감 능력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주위 사람들은 남편의 인내에 혀를 내두르고 최고의 남편감이라는 후광을 씌워줬다. 나는 극도로 우울해질 때면 남편에게 “나를 버리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 정도로 우울해하는 아내라면 버림받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전으로 이사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최동규 교수님을 통해 한 부부를 소개받았다. 데니스와 인나였다. 데니스는 한국 사람이었는데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산 경험이 있었다. 한국 이름보다 데니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통했다. 인나는 키르기즈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이었다. 그들에게는 세찬이라는 두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그 부부는 부산 러시아 선교회에서 만나 결혼했는데 오랫동안 부산에서 러시아 예배를 함께 섬겼다. 데니스가 목회자가 되기 위해 대전에 있는 침신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대전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교수님이 마침 역시 대전으로 온 우리 부부를 소개해 주신 것이었다. 그리고 함께 대전에서 러시아 예배를 개척해 보라고 하셨다.
데니스와 인나는 내가 보아온 사람 중에 평범하지 않은 매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두 사람은 나이 차가 열 살 정도 났는데도 마치 친구 같았다. 데니스는 한국 사람, 게다가 크리스천치고 사고가 자유분방했고 독특한 자기만의 견해가 뚜렷했다. 인나는 크고 둥근 눈이 재기발랄하게 빛나는 미모의 여성이었다. 인나 역시 돌발적인 질문과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주제로 화제를 끌고 가서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을 주었다. 두 사람은 대전에 오자마자 오후에 교회 예배 공간을 빌려 무작정 러시아 예배를 시작했다. 추진력 하나는 불도저 같았다. 우리 부부는 데니스, 인나를 따라다니며 대전에 있는 러시아어권 여성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러시아 예배 사역이 시작되었다.
데니스와 인나 덕분에 다시 한번 도약이 일어났다. 그러나 2005년이 다 지나가도록 우울증에서 벗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삼 년이 다 되어가도록 낫지 않는 우울증을 평생 품고 갈 각오를 했다. ‘그래, 벗어날 수 없다면 받아들이자. 우울증과 같이 사는 거지, 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2006년을 맞이했다. 그런데 기적처럼 2006년은 내게 회복의 해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