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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15.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50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우울증의 끝

우울증의 끝    


  아버지는 면회를 갈 때마다 퇴원시켜 달라고 졸랐다. 방을 얻어주면 혼자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야 한다고 조급해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혼자 살아요?”

“왜 못 살아? 방이나 얻어줘. 내가 밥도 해 먹고 다 할 수 있어.”

“안 돼요, 아버지. 여기 그냥 계셔요.”
 “나 국회의원도 출마해야지. 여기서 아무것도 못 해.”

그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입원한 지 삼 년이 지났다. 아버지의 등쌀에 마음이 약해졌다.

  “여보, 아버지 우리가 모시고 살면 안 될까?”

“괜찮을까?”

“한번 해보고 안 되겠으면 다시 입원하시게 하면 안 될까?”

“그래봐요, 그럼.”

아버지를 퇴원시켜 대전 우리 집으로 모시고 왔다. 결혼하고 한 번 정도는 아버지와 살아보고 싶었다. 이제 우리 집도 생겼고 내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어쩌면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병원에만 계속 두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최선을 다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영락없는 옛 모습으로 돌아갔다. 방에 누워 다리를 꼬고 발가락을 까딱까딱하면서 흘러간 옛노래를 메들리로 불렀다. 얼마 만에 듣는 아버지의 메들리인지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우리 집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뿌듯하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나 곧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낮에 아파트 경로당에 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전화기가 울렸다.

“거기 허 성운 할아버지 댁이오?”

“네, 그런데요.”

“실례지만 누구시오?”

“저 딸인데요.”

“아,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아버님 좀 모셔가요. 아버님이 경로당에 오시면 사람들한테 담배 달라, 돈 달라 아주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서 곤란해요. 아버님은 여기 오시면 안 돼요. 사람들이 아주 질색해. 따님이 잘 얘기해서 못 오시게 해요.”

“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역시 아버지는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화가 나면서도 경로당에 나오는 노인분들이 좀 야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버지, 경로당 가지 마세요. 거기 할아버지들이 아버지 때문에 힘드시대요.”

“내가 뭘 어쨌다고?”

“담배 달라, 돈 달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다 싫어해요. 이제 가지 마시고 집에 계셔요.”

아버지는 한동안 경로당 출입을 삼가고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만 지내도 괜찮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심심해진 아버지는 다시 경로당에 가기 시작했고 또 전화가 왔다. 그렇게 삼 개월을 버텼다. 이제는 남편에게도 미안해졌다. 조금씩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나의 우울증에 알콜성 치매까지 있는 장인까지 남편이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결국 다시 아버지를 입원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삼 개월 밖에서 계셨으니 그래도 갑갑증이 좀 풀렸을 거라 스스로 위안했다. 아버지는 순순히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대전에 와서 대전 온누리 교회를 다녔다. 교회의 소그룹인 순모임에 참석했는데 내 우울증에 대해 말하면 다들 잠자코 들어줬다. 특히 리더인 순장의 아내는 과거 자신에게도 심한 우울증이 있었다면서 약을 먹지 않고 극복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에게 꼭 나을 거라며 희망을 줬다. 부동산을 하던 한 여자 집사님은 사업 실패와 질병 등 고난을 종합세트로 겪은 분이었다. 내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한번 집에 갈게.”라고 했다. “언제 오실 거예요?”라고 물으면 “너무 바빠서. 그래도 꼭 한번 갈게.”라고 했다. 아버지를 다시 입원시키고 난 어느 날 집사님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한번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 되네. 미안해서 전화라도 했어.”

  집사님은 아버지를 왜 계속 모시지 못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냥 모시고 살지 그랬느냐고 말씀하시고 싶은 눈치였다. 나는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된 이야기가 어느덧 나의 어린 시절을 거슬러 내 인생 전체로 확장됐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동안 집사님은 단 한 번도 “으응.”이나 “그랬구나.”라는 짧은 응답조차 없이 온몸이 귀가 되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무려 두 시간 동안 내 인생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야기하다 울먹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또 이야기를 이어갔다. 누군가 내 말을 그렇게 오랫동안 끊지 않고 들어준 적은 없었다. 말을 마치고 나는 집사님이 어떤 충고를 할까 기다렸다. 그런데 집사님의 말은 아주 짧았다. “자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네. 잘 살아왔어.”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내 눈에서 폭포 같은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서러움의 눈물도, 슬픔의 눈물도 아니었다. 이해받은 데서 오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감동의 눈물이었다. 순간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음을 깨달았다. ‘이거였구나, 내가 원했던 것이.’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통찰이 섬광처럼 나의 뇌를 0.1초 만에 스쳐 지나갔다. 죄책감! 그거였구나, 내가 아팠던 이유가. 집사님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었다. 수고했다, 잘 살아왔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 뭔가가 풀어진 것 같았다. 비밀의 문을 굳게 채워놓았던 자물쇠가 열리고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가 드러났다.

  나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음을 알았다. 내가 그 순간 우울증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이다. 폭포처럼 흐르던 눈물이 잦아들고 시냇물처럼 계속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 천변에 앉았다. 4월이었다. 새하얀 목련이 바람에 흩날렸다. 따스한 봄 햇살이 천을 흐르는 물과 깔깔거리며 장난을 쳤다. 온 세상이 생명의 약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삼 년 동안 산 채로 무덤 속에 갇혀 있던 내가 나사로처럼 무덤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코아의 발견

     

  회복은 ‘아하!’와 함께 홀연히 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날 0.1초 만에 내가 깨닫게 된 우울증의 작동 방식은 이런 것이었다. 결혼한 후, 더 이르게는 러시아에 유학하면서부터 내 마음에는 원가족에 대한 죄책감이 자리 잡았다. 시간이 지나도 죄책감은 해결되지 않았고 한국에 돌아오면 나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왔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나의 해소되지 않은 죄책감은 결국 나를 심리적으로 처벌했다. 죄에는 용서 아니면 처벌 두 가지 해결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가차 없는 나의 양심은 자신을 처벌하여 죽음과 같은 상태에 처하게 했다. 삼 년이라는 기간은 나의 무의식이 선고한 형벌의 기간이었다. 그 시간이 다 차서 드디어 내 양심은 내게 방면을 명했다. 만약 집사님의 말을 듣지 못했더라면 그 기간은 더 길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듣고 나서 나의 무의식이 나를 놓아주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해결됐다. 우울증은 결코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었다. 나를 벌한 것은 내 양심이었지 하나님이 아니었다. 자신을 벌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울증으로 자신을 벌하는 동안 하나님은 가슴 아파하면서 내가 자신을 놓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더 일찍 깨닫도록 하시지 않았을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 깨달음에도 꼭 적합한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거짓된 죄책감으로 고통받았음을 알게 됐다. 집사님의 말을 통해 내가 잘못한 게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러시아에 간 것도, 결혼해서 돌아올 수 없었던 것도 내 잘못이 아니었다. 나로서는 그 순간 최선을 다한 것일 뿐, 가족이 고통스러워한다고 해서 그게 내 탓은 아니었다. 러시아에서 내게 그런 말을 해준 사람들이 많았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나 나는 한사코 “아니야, 내 탓이야.”라고 말했다. 그만큼 나는 경직되어 있었고 어쩌면 고집스러웠다.

  스물세 살에 거듭남을 체험한 이후 나는 다시 한번 커다란 정신적, 영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때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고도 돌이킬 수 없는 변화였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범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됐다. 소위 정상성의 범주 밖에 있는 현상들이 더 이상 이상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우울증을 비롯해 불안장애, 공포증 등 정신적인 문제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코아’라는 단어를 접하게 됐다. 코아(COA)는 ‘알콜 중독자의 자녀’(Children of Alcoholics)라는 영어 단어의 약자였다. 역기능 가정이라는 용어도 만났는데, 그 용어가 알콜 중독자 가정을 연구하면서 생겨났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특정한 용어로 정의되고 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학문적인 연구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새로웠다. 나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 우울증의 원인이 멀게는 나의 어린 시절, 알콜 중독자를 아버지로 둔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나치게 책임감이 강하고 스스로 많은 것을 떠맡으려고 하는 내 성향은 우울증에 취약했다.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중독이 대물림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걸 고려한다면, 우리 삼 남매 중에 알콜 중독자가 출현하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우리는 중독의 환경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된 대가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아플 수밖에 없었다. 우울증은 나를 가장 먼저 찾아왔고 이어 진에게 찾아갔다. 막내인 철은 다행히 우울증의 방문을 피했다.

  나의 관심은 자신을 넘어서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도 확장됐다. 언젠가부터 내 주변에 우울증, 불안장애, 사회 불안증, 성격장애, 심지어 조현병으로 아픈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넘쳐나고 우리 사회가 그런 이들을 낳을 수밖에 없는 혹독하고 잔인한 사회임을 보게 되었다. 전에는 이해의 영역 밖에 있던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됐다. 나는 언젠가 심리상담을 공부해 그런 이들을 돕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우울증이 나은 후 무려 십 칠 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을 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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