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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18.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51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보상은 없다

보상은 없다     


  나는 교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운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문학을 강의하고 연구하고 싶어서 러시아까지 갔지만 박사 논문을 쓰면서도 교수가 되겠다는 꿈이나 야망이 생기지 않았다. 함께 공부하는 유학생들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교수가 되기 위해 학위를 따려는 게 뻔히 보였다. 그건 어쩌면 당연했다. 학문 자체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 공부한다는 건 내 자부심을 채워주기에는 부족했다. 왜 나는 남들처럼 교수가 되겠다는 야심을 갖지 못하는 것일까. 기를 쓰고 노력하고 경쟁해도 될까 말까인 현실에서 나 같은 태도로는 아예 경기장에 들어설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고질적인 비교 의식과 경쟁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문학 연구소에서 함께 공부하던 서울대 출신 종철이라는 유학생이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저명한 문학 연구잡지인 『러시아 문학』에 논문을 게재한 일이 있었다. 종철의 주변에 서울대 후배들이 빙 둘러싸고 그를 축하하는 모습을 먼발치서 보았다. 종철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웃음이 만연해 있었다. 내 속에서 시기의 벌레가 심장을 갉아 먹었다. 종철에게 딱히 경쟁심을 가진 적도 없는데 내가 패배자가 된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후 나도 그 잡지에 내 논문을 싣게 되었다. 그제야 패배자라는 의식에서 해방됐다.

  우울증을 겪을 때 좋았던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비교 의식과 경쟁심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남과 비교한다는 건 우울증 환자인 나에게는 사치 중의 사치였다. 남들이 어떤 성취를 해도, 무슨 찬사를 들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세상사가 관심의 영역에서 물러나 버렸기 때문에,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자극받지 않았다. 그런 마음 상태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우울증에서 벗어난 후 여지없이 다시 주위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무려 삼 년 동안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날려버린 셈이었다. 그동안 어떤 후배는 교수가 되고 다른 동료나 후배들은 최소한 논문을 쓰고 번역서를 출간하고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마흔한 살이 되어 나는 인생에서 처음 내가 꼴찌라는 씁쓸한 자괴감을 맛보았다. 늘 일등을 놓칠까 봐 전전긍긍했던 학창 시절에는 올라갈 일만 있는 꼴찌가 부러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꼴찌라는 생각이 드니 그 비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흔이면 이미 인생에서 성공을 맛본 사람들도 적지 않고 자신의 분야에서 입지를 굳히기 충분한 나이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한 게 공부밖에 없는 나는 이제 갓 첫발을 내디딘 사회 초년생이었다. 학위를 딴 것 말고는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 최소한 중간은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학회지에 논문을 한 편, 한 편 차곡차곡 발표해 쌓아나갔다. 내가 쓴 논문이 학회지에 실리면 잠시 뿌듯한 작은 성취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곧 논문을 쓰는 연구자들이면 누구나 부딪히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최소 삼 개월을 걸려 쓴 논문을 막상 읽어주는 사람은 논문을 심사하는 세 명의 연구자 외에 거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 연구의 성과물을 공유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나를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는가. 과연 학문의 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있는 것이 맞나. 논문을 쓴다는 건 고독하고 자기 가치를 의심하게 하는 괴로운 작업이었다. 그래도 연구자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니까, 남들이 하니까 나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꼴찌라는 의식에서 벗어났다. 이 정도면 나도 할 만큼 하고 있다고 자신을 인정해 주게 됐다.

  강의를 하는 건 즐거웠다. 강의실이라는 공간은 내게 무대와 같았다. 유머 감각이 없어 학생들을 웃길 줄은 몰랐지만 나는 내 강의 콘텐츠에 자신이 있었다. 강의에 몰두해 애드리브를 섞어가며 하다 보면 학생들에게 전기가 통하는 듯한 짜릿함을 맛볼 때가 있었다. 강의실을 나설 때 그날 강의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내릴 수 있었다. 잘 된 강의는 때로는 한 편의 예술 작품 같기도 했고 학생들과의 합동 공연 같기도 했다. 물론 망친 강의는 쑤다 만 죽이나 다름없었다. 평생 강의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강사의 신분은 강의를 보장해 주지 않았다. 강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종종 뚝 뚝 끊겼다. 어느 날 갑자기 과외를 끊겠다는 통보를 받았던 과거처럼 다음 학기에는 강의를 줄 수 없다는 연락이 오면 꼼짝없이 다시 강의가 생길 때까지 실업자 신세가 됐다. 비정규직의 불안정과 설움은 십 년이 넘어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흐름의 희생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생기며 사회와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똑같이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똑같은 연구를 수행하고 강의하는데 교수와 강사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컸다. 단지 강의를 계속해서 하기 위해서라도 교수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수는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혹독하고 잔인할 뿐 아니라 공정이 없는 이 사회는 노력한 만큼 대가를 돌려주지 않았다. 공부만 잘한다고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 분야에서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이 사회에서 안정된 자리를 얻기란 요원했다. 처음에는 교수가 되는 과정에 어떤 요인이 작용하는지 몰랐던 나는 점점 이 세계의 작동 원리를 간파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작동 원리를 따를 수도, 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당시에는 취직이 잘됐다. 같은 과를 졸업한 남학생들은 모두 사회의 어디선가 자리를 잡았다. 그 물결을 타지 못한 나는 이천년대 이십 대 청년들과 같은 시대의 흐름 속에 표류했다. 대학을 나와도, 스펙을 쌓아도 취업이 되지 않는 청년들의 비애와 좌절은 나의 것이기도 했다. 기회를 잃은 세대였다.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문학을 비롯해 인문학이 죽은 시대에 내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진다는 건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바다에서 익사하지 않기 위해 튜브에 의지해 발버둥을 치는 것과 같았다.

  내가 어린 시절 꿈꾸었던 보상은 없었다.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큰일을 해내면 어린 시절에 겪은 고통이 보상될 거라는 생각은 그 시절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에 불과했다. 나는 보상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억울했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이 다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인생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는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 내게 필요했던 건 안전하고 두려움 없는 가정이었다. 지금 그런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는 자체가 이미 보상받은 셈이었다. 성공이 곧 보상이라는 세상의 기준에는 맞지 않지만 말이다. 뭔가 되어야 하고 더 해야 하고 대단한 성취를 이뤄야 하는 강박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됐음을 깨달아갔다. 흔들리며 왔지만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한 나를 인정해줘야 했다. 오래전에 아버지를 용서했지만, 이제는 삶을 용서하고 있는 그대로 삶을 수용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오십이 넘어서야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일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뭘까를 고민하게 됐다. 어릴 적 꾸었던 작가의 꿈이 다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재능이 부족하다고 대학 시절 포기했던 그 꿈. 그래도 언젠가 되살아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로 마음 한구석에 조심스럽게 접어두었던 꿈을 다시 꺼내 살포시 펼쳐보았다. 용기가 없어서 미뤄두고 실패가 두려워 밀쳐두었던 그 꿈을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었다. 실패하더라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죽음이 찾아올 때 가장 후회할 일이 되지 않을까. 내 삶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언젠가는 글쓰기의 재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그 재료는 쌓일 만큼 쌓였다. 나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삶이 내게 쓰라린 레몬을 주었다면 이제 나도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시간이 됐다. 그 첫걸음으로 이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러시아어권 여성들

     

  2005년 가을에 시작된 러시아 예배는 십 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데니스와 인나 부부, 대전에 살고 있던 경숙 선생, 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났던 기동 선교사 부부 등과 함께 작은 공동체를 이룰 꿈을 꾸었다. 시간이 지나며 이사 등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생겼고 새로 합류하는 이들도 생겼다. 데니스와 인나의 추진력은 대전에 살고 있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중앙아시아에서 온 러시아와 고려인, 중앙아시아 여성들을 가정 밖으로 끌어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여성들을 만나러 찾아다녔고 그들의 친구가 돼 주려고 애썼다. 낯선 타지에 와 말이 통하지 않는 남편과 살면서 익숙하지 않은 문화에 적응해가느라 그들이 흘리는 눈물과 한숨을 곁에서 많이도 지켜봤다.

  러시아에서 6년 반 동안 살면서 타국에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정해진 기간이 아니라 아예 삶을 한국에서 다시 시작한 여성들이 내 눈엔 대단하고 용기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한 걸음씩 들어설 때마다 그들이 겪어야 하는 아픔에 가슴이 저렸다. 조금이라도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옆에 함께 있어 주고 싶어 십 년의 세월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내가 한 일은 별 게 아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필요하면 통역을 해주고 병원에 데려가 주고 예수님을 전하는 게 전부였다. 그들 덕분에 나는 러시아어를 잊어버리지 않고 계속 사용할 수 있었고 러시아에 대한 추억을 그들과 공유할 수 있었다. 십 년 동안 나는 한국 사람들보다 그들과 더 가까이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아냐는 키가 크고 늘씬한 여성이었다. 흰 피부와 회색 눈동자, 갈색 머리칼, 조용조용한 말투를 가진 아냐에게는 친구가 많았다. 아냐는 러시아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적인 여성이었다. 그래서인지 성경에 대해 의문이 많고 몇 년 동안 교회를 다녀도 쉬 믿음을 갖지 못했다. 아냐의 남편은 일을 해도 집에 월급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도박에 손을 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나 있는 아들을 키우기 위해 아냐는 남편과 별거하고 취직을 해 돈을 벌었다. 몇 년 후 아냐는 남편과 정식으로 이혼했다. 아냐를 더 닮아서 러시아인으로 보이는 아냐의 아들은 늠름한 대한민국의 현역 군인으로 복무했다.

  나스짜는 전형적인 러시아 미인이었다. 금발에 발그레한 볼, 큼직한 눈에 긴 눈썹. 나스짜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한국 남자들이 있을까 싶었다. 한국 남편과의 사이에 환상적일 정도로 어여쁜 딸을 낳아 길렀지만, 가부장적인 남편과 충돌이 잦았다. 우리는 그 부부를 중재하느라 그들이 하던 작은 식당을 매주 방문해 밥을 먹고 이야기를 들어줬다. 둘 다 성격이 강했고 서로에게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성격 차이로 이혼했고 딸은 남편이 키웠다. 나스짜는 다른 남자를 만나 자신을 닮은 잘생긴 아들을 낳았지만 새 남편과도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리자는 남편이 잘해 주겠다는 약속만 믿고 결혼해 한국에 왔지만, 그들 부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리자는 똑 부러진 성격에 야무진 여성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지적인 면에서나, 외모에 있어서나 리자의 남편감으로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어려운 살림에도 리자는 두 아들을 키우며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보려 했다. 그러나 리자의 남편은 자신을 무시한다며 자주 리자를 때렸고 아이들은 아빠를 두려워했다. 집을 나온 리자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간 적도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나에게 전화해 리자가 교회에 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리자는 교회에 피해를 줄 수 없다며 연락을 끊었다. 나중에 리자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 쉼터에서 생활하면서 남편의 폭행을 증거로 제시해 이혼에 성공했다. 

  나타샤는 몰도바에서 온 여성이었다. 키가 나만큼이나 작고 오밀조밀한 얼굴에 당차고 똑똑한 여성이었다. 나타샤는 선교사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고 남편을 소개받아 한국에 왔다. 루마니아어와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나타샤는 남편에게 영어를 배워 거의 현지인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다. 한국어 습득도 빨랐다. 언어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나타샤도 나와 같은 코아였다. 코아가 없는 나라는 전 세계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나타샤가 겪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한국과 몰도바의 차이가 지워졌다. 아직도 술을 마시며 어머니를 괴롭히는 아버지 때문에 머나먼 한국에서 나타샤의 마음은 편할 날이 없었다. 이것이 코아의 숙명인가 싶었다. 고국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나타샤의 마음이 언제나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스베타는 바이칼 호수 근처에 많이 사는 소수 민족인 부랴트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남편에게 이혼당했다며 교회를 찾아왔다. 환각을 보고 피해망상이 있는 스베타를 도저히 견디지 못한 남편이 쫓아내다시피 그녀와 아들 원준이를 집에서 몰아냈다. 전 남편은 아이의 양육비도 지급하지 않았다. 기초수급자가 된 스베타는 사회복지사의 도움을 받으며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원준이와 지냈다. 그녀가 사는 집에 몇 번 찾아갔다. 한국 요리를 잘하지 못하는 스베타는 원준이가 밥을 안 먹고 말을 듣지 않는다며 울었다. 그녀는 종종 내게 전화를 걸어 맥락을 파악하기 힘든 말을 하며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쏘냐...원준이가 너무 힘들어요...내가 나쁜 엄마예요...밥도 안 먹고 말도 안 들어요...내가 때렸어요...쏘냐, 나 죽고 싶어요...”

간신히 그녀를 진정시키면 “쏘냐 아줌마, 고마워요.”하며 전화를 끊었다. 왜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는지 몰랐다. 그녀가 들려준 어린 시절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눈앞에서 어머니가 아버지를 살해했고 어머니는 감옥에 갔다 왔다. 언제부터인지 환각이 보여서 러시아에서 정신병동에 입원했었고 한국에서도 재발해서 입원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현재는 약을 먹으며 지내고 있지만 이 모자가 살아가기에 세상은 너무 막막한 곳이었다. 

  거주지를 옮기면서 러시아권 여성들과의 인연이 끊어졌다. 무려 십 년의 세월을 그들과 보냈는데 잘 살아가는 모습보다는 가정이 깨어지는 아픔을 더 많이 목격했다. 그 당시는 여성들이 당하는 어려움만 보였지 그들의 자녀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자녀들 가운데도 코아가 있었다. 코아가 아니더라도 다문화 가정에서 성장하며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아이들이 어떤 상흔을 입고 살아갈지 커가는 그들이 마음에 걸린다.     


남편의 임용

     

  2007년 여름 남편의 기간제 교사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많지 않은 월급에 풍족하진 않았지만, 우리 부부가 살아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기간제를 마치게 되면 남편은 다시 실업자가 될 신세였다. 이제 남편의 나이도 사십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험난한 구직 활동이 시작될까. 살짝 겁이 났다. 그런데 또 한 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러시아어 교사 임용고사 공고가 인터넷에 떴다. 그것도 대전에서 가까운 청주에서. 청주에도 외국어 고등학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그 공고를 보는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이건 남편을 위한 자리다.’라고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그런 직감을 느낀 적이 몇 번 있었는데, 매번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미리 알게 하신 것이라 믿었다. 그 확신은 나를 배반한 적이 없었다. 

  남편은 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교육학 공부만 하면 됐다. 러시아어 공부는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1차 시험에서는 교육학을 60점만 넘기면 되고 러시아어 성적이 좋아야 했다. 남편은 간신히 교육학 60점을 넘겼다. 러시아어 시험을 잘 보았는지 최종 두 명안에 들었다. 남편이 2등이었다.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최종 결과만이 중요했다. 2차 시험은 논술과 면접이었다. “당신이 될 거예요.” 나는 남편을 격려했다. 또 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우리보다 절박하진 않을 터였다. 

  나는 남편의 논술 준비를 도왔다. 나는 학력고사에 논술이 추가된 첫 학번이었다. 내가 쓴 논술을 당시 종로인지 대성인지 큰 입시학원에서 예시로 학생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었다. 고등학생 때 이 년 동안 교지 편집을 하면서 숙달된 실력을 오랜만에 발휘할 기회가 왔다. 매일 남편에게 논술 주제를 내주면 남편이 원고지에 글을 써왔다. 나는 빨간 색연필을 들고 남편의 글에 줄을 긋고 띄어쓰기를 표시하고 다른 표현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하루하루 연습을 거듭하니 남편의 글이 조금씩 다듬어졌다. 마침내 2차 시험일. 남편은 편안하게 시험을 치르고 돌아왔다. 같이 시험 본 상대는 남편보다 어린 여자 선생이라고 했다. “당신보다 어리다니 다행이다. 그 선생한테는 또 기회가 올 거야.”

  그사이 해가 바뀌었다. 2008년 1월. 발표날이 다가왔다. 남편의 미래가 이 결과에 달려 있었다. 공교육을 담당할 교사가 되느냐, 다른 직업을 찾아 철새처럼 떠돌 것이냐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순간이었다. 나는 비정규직일망정 남편만은 정규직으로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길 원했다. 남편은 교사가 천직인 사람이었다. 학생들은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해주는 남편을 편안해하고 좋아했다. 남편의 수업은 대학생이 된 제자들이 대학 수업보다 낫다고 할 정도로 내용이 깊고 충실했다. 그런 남편이 교사가 되는 게 마땅했다. 더구나 임용 절차가 공정했다. 공정한 게임이라면 승산이 있었다. 그런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나는 남편이 부러웠다. 

  아침 열 시. 남편과 나는 컴퓨터를 앞에 놓고 앉았다. 나 떨고 있니. 남편도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노트북을 열고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남편이 접수번호를 입력했다. 이제 누르기만 하면 결과가 뜰 것이었다. 차라리 눈을 감을까.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도 심장은 제멋대로 두근거렸다. 남편이 입력 버튼을 눌렀다. “됐다!” 화면에는 남편의 이름이 합격자 난에 적혀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여보, 축하해요.” 남편과 나는 서로 껴안았다. 남편의 눈시울도 살짝 붉어져 있었다.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 한국에서 정규직 교사가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지. 남편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을 이십 년 이상은 하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그 고민은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나 이제 그 선생을 위해서 기도할래. 그 선생이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 경쟁에서 이겼지만, 임용에 좌절된 그 선생이 신경 쓰였다. 그에게도 얼마나 절실했을지 알고도 남았다. 다음 기회에는 꼭 그 선생이 임용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정말로 몇 년 후 그 선생은 다른 도에서 치른 임용고사에 합격해 현직 교사로 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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