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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21.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52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마침내 풀린 비밀

마침내 풀린 비밀     


  내가 코아라는 사실과 중독이 중독자뿐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장기적이고 파괴적인 심오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나는 어쩌면 평생 갈 수도 있는 긴 치유의 길로 들어섰다.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았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신분석을 비롯한 상담도 받아보았다. 꾸준히 치유에 관련된 책을 읽었음은 물론이다. 2009년에 생명나무 치유 사역이라는 것을 접하게 됐다. 일주일에 한 번 강의를 듣고 나눔을 하고 기도하며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애도하지 않은 상실의 아픔과 혼자 남겨지는 데 대한 가공할만한 공포, 동반 의존, 과도한 성취욕, 파국적인 사고 등 치유해야 할 상처 목록에 압도되었다. 몇 년간 이어진 치유 과정을 통해 치유란 극적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대부분 매우 느리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치유에 있어서 애도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는데 애도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 회고록을 쓰는 것도 애도 작업의 일환이다.

  2010년 러시아의 트베리라는 작은 도시에서 대전으로 와 살고 있는 이야라는 고려인 여성을 만났다. 신앙심이 깊었던 이야는 친구를 통해 한국 남자를 소개받아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은 과거 환각과 환촉까지 경험했을 정도로 지독한 알콜 중독자였다. 그는 살기 위해 대전에 있는 라파라는 중독자 공동체를 스스로 찾아왔고 피나는 노력 끝에 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 후 건실한 생활인이 된 그는 이야와 결혼해 딸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이 모든 일은 라파 공동체를 설립해 이끌어온 윤 성모 목사님과 사모님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이야에게서 그녀의 남편과 라파 공동체에 대해 듣고 흥분했다. “중독자가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구나. 그런 공동체가 다 있었다니!” 당장 그곳에 가보고 싶었다.

  라파 공동체는 당시 보문산 아래 자리하고 있었다. 교회와 공동체가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도로에서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마지막으로 계단이 나왔다. 그 계단을 올라가면 작은 문이 나타났고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아담한 라파 공동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마당 왼쪽으로 교회 건물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중독자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있었다. 생활공간은 직접 들어가 보지 못했지만, 얼핏 보아도 아주 작은 방이 몇 개 이어져 있었다. 최소한의 생활이 가능한 소박한 공간이었다. 공동체가 세워진 지는 벌써 십 년이 넘어 있었다. 그동안 무수한 중독자들이 공동체를 거쳐 갔는데 목사님은 열 명 중 두 명 정도가 중독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나는 경이로웠다. 중독은 치료할 수 없고 오로지 격리만 가능하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여지없이 깨졌다. 중독에서 회복되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니. 꿈이요 기적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공동체에서 일주일에 몇 번 교육이 진행되었는데 나도 중독자의 자녀라는 자격으로 매주 한 번씩 교육에 참석할 수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병원 밖에서 중독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중독자들이 그렇게 말을 잘하고,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잘 알고 있고, 중독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깊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들의 갈망은 처절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 아버지도 젊었을 때 저랬을까. 아버지도 저렇게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망 없는 인생으로 보였던 중독자가 노력하기에 따라서 회복될 수 있는 망가진 보석 같은 존재라는 인식에 처음 눈을 떴다. 술을 먹지 않을 때 그들은 너그러웠고 유머 감각이 풍부했으며 인간다웠다. 나는 그들 사이에 끼어 마냥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듣고만 싶었다. 무용담처럼 펼쳐지는 중독의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새롭고 다채로웠고 슬펐다.         

  라파 공동체를 알고부터 오랫동안 내 안에 잠재된 물음이 되살아났다. 도대체 아버지는 왜 중독자가 된 것일까. 공동체 안에서 중독자들은 그들이 중독에 빠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자 교육받고 자신을 성찰하고 있었다. 그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회복에 결정적인 단계였다. 자신에 대해 알아가고 중독의 원인을 찾아내고 회복의 여정을 걷고 있는 그들이 아버지의 모습과 겹치면서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도 젊었을 때 이곳에 오셨다면 회복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물음을 할수록 가슴이 진하게 아려왔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평생을 중독의 노예로 살아온 아버지가 가여웠다. 누군가 아버지를 제대로 도와주었더라면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제는 너무 늦어버려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한번 아버지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중독의 원인만큼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아버지를 면회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잠시 나누다 나는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 아버지는 왜 그렇게 술을 드셨어요?”

“세상이 내 맘대로 안돼서 마셨지.”

“세상이 내 맘대로 안된다고 다 술 마시나? 혹시 아버지 어렸을 때 무슨 가슴 아픈 일 있었어요?”

다른 때 같으면 “그런 거 없었다.”고 했을 아버지였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갑자기 아버지가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전쟁이 나서 이북에서 아버지, 머니, 형하고 나, 그리고 동생이 피난을 떠났어.”

“어, 동생이 있었어요? 큰아버지만 계셨던 거 아니에요?”

아버지의 동생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있었어. 내가 열세 살이고 동생은 다섯 살이었어. 피난 오고 나서 여름에 동생하고

강에서 헤엄을 치고 놀았어. 그런데 동생이 갑자기 꼬르륵하더니 물속으로 가라앉았어. 내가 손을 써볼 틈도 없이.”

“네? 진짜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아버지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왜 지금까지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데 더 놀랍게도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아버지의 메마른 눈가가 촉촉이 젖고 있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이야기하는 내내 눈 아래에 눈물방울이 고여있었다. 지어내는 이야기로 눈물을 흘릴 수도 있는 걸까.

“그래서요?”

“그래서 동생이 죽었어. 그 애가 아주 똑똑해서 할아버지가 이뻐했어. 큰 인물 될 거라고. 그 애를 묻고 오면서 할아버지가 대성통곡을 했어. ‘네가 죽고 그 애가 살아야 했는데...’ 하면서.”

  아아. 내 눈앞에 그림이 펼쳐졌다. 강에서 헤엄치다 죽은 아이. 자신의 온 희망이었던 그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할아버지. 아이를 묻고 오면서 북받쳐오는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을 입 밖에 낸 할아버지. 내가 어릴 때 알았던 할아버지와 전혀 연결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정말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된 거였어. 우리 아버지 너무 불쌍하다.”

나는 아버지의 눈에 고인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아버지의 마음속에 맺혀있는 사건이 있음에는 틀림없었다. 그 사건은 아버지가 중독자가 된 이유를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네가 대신 죽었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아버지가 그 후 무슨 목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왜 그렇게 대통령이 되겠다는 터무니없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살았는지 그 의문도 풀렸다. 똑똑한 동생을 대신해 할아버지의 희망을 성취시켜주어야만 했던 아버지는 자신의 인생을 살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말은 아버지에게 ‘너는 너로 살면 안 된다’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삶을 살 수 없었던 아버지가 중독 외에 갈 곳이 어디 있었겠는가. 내 눈에서도 눈물이 나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버지, 힘들었겠다. 그것도 모르고. 진작 얘기해주지.”

아버지는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서 후련한지 얼굴이 한결 밝아 보였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사촌 언니들도 들은 바가 없다고 했다. 두 형제는 같은 아픔을 가지고 살아온 걸까. 큰아버지는 아버지의 상처를 알기에 성인이 된 아버지를 끝까지 돌보려고 하셨던 것일까. 아버지의 큰 비밀을 알아버린 나는 그 어릴 때 사건이 아버지 중독의 원인이었다고 지금도 믿고 있다.

     

쇠약해 가는 아버지

     

  2009년에 동생 진의 가족이 5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여섯 살이었던 예영이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돌아왔다. 그 사이 진은 한국 본사에 올 때마다 아버지를 뵈러 갔다. 동생 가족에게 아버지에 대한 짐을 덜어줄 수 있어서 러시아에서 진 빚을 갚는 느낌이었다. 예영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한국에 잠시 나온 적이 있었다. 삼 남매의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하는 자리에서 갓 한 살 된 가영이가 기어서 자꾸만 예영이 옆으로 갔다. 예영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손을 만지곤 했다. 처음 보는데도 언니인 줄 아나 보다 신기했다. 동생이 없는 예영이는 가영을 보며 어찌 대해야 할지 난처한 모양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잔잔히 행복이 밀려왔다. 진이 귀국한 여름에는 삼 남매 가족 전체가 단양으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 가족이 했던 여행이었다. 내가 얼마나 행복의 절정을 경험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리도 그리워했던 진이 돌아왔으니 아버지가 무탈하게 잘 지내기만 하면 될 것이었다. 나를 제일 예뻐했다던 아버지도 장남이라 그런지 진이 없으면 허전해하고 진을 찾곤 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걸 당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해 가을, 면회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아버지가 오는지 내다보고 있었는데, 병원 문을 나서서 걸어오는 아버지가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버지는 걷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앉았다. 간호사가 아버지를 일으켰다. 조금 더 걷다가 다시 한번 주저앉으려고 하는 아버지를 간호사가 부축했다. ‘무슨 일이지? 아버지가 왜 저러지?’ 아버지가 면회실로 들어섰다. 간호사에게 물었다.

“아버지가 왜 주저앉으신 거예요? 어디 문제 있으신가요?”

“아버님이 요즘 좀 기운이 없으셔요. 그래서 그러신 거예요.”

간호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왜 기운이 없으신데요?”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요. 노인들이 그렇게 갑자기 기운이 약해지시곤 해요.”

그럴듯한 말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칠십삼 세였다. 왠지 가슴 한구석이 콕 쑤시면서 아려왔다. 이제 아버지도 늙어가시는구나.

“아버지,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픈 데 없어.”

“걷는 거 힘드세요?”

“괜찮아.”

“근데 왜 넘어지셨어요? 평소에 걷는 운동 많이 하셔야 해요.”

“그래.”

아버지와 대화하는 건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크게 기운이 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면회를 마치고 다시 돌아갈 때도 아버지의 걸음은 예전과 달랐다.

  무심한 나는 간호사의 말만 믿고 그저 나이 때문에 쇠약해지시는 거려니 생각했다. 그 후로는 아버지의 걸음걸이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버지의 걸음이 무슨 병의 징후로 보이지는 않았고 병원에서도 아무 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때부터 아버지의 병세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도 한 달에 한 번 멀리서 찾아가는 자식은 세심하게 살필 정신이 없었다.

  한동안 아버지 상태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2010년 어버이날에 삼 남매 가족이 아버지를 근처 식당에 모시고 식사하기로 계획했다. 나는 오랜만에 모두 모이는 자리가 기대되고 설렜다. 미리 병원에 연락해 아버지 외출을 신청했다. 그런데 그날 아버지를 본 나는 충격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아버지에게 한 벌 있는 양복을 입혀 외출을 준비시켰다. 회색 줄무늬 양복을 입은 아버지는 한 달 사이에 살이 쏙 빠져 볼 아래쪽이 움푹 파일 정도였다. 양복 입은 아버지 모습이 막대에 옷을 걸어놓은 모양이었다. “아버지, 왜 이래?” 나는 놀라고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버지를 차에 태워 식당으로 가서 식사하는데 아버지는 계속 스스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래도 갈비탕 한 그릇을 천천히 다 비웠다. 아버지 건강에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병원에 가서 물어보니 아버지 틀니가 자꾸 빠져서 식사를 잘 못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식사를 잘 못하니 살이 갑자기 빠지는 게 당연했다. “아버지 틀니를 교체해야 할 것 같아요.” 병원에서 내놓은 처방이었다. “아버지, 아 해보세요.” 아버지의 틀니 상태를 보니 간호사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이 틀니로 식사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조금 전에 갈비탕은 잘 드셨는데...어쨋든 원인이 틀니라니 우리는 틀니를 교체해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런데 틀니를 교체하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외래로 치과를 데려가야 하는데, 알아봐 달라고 해도 병원에서는 빨리 서두르지 않았다. 생활에 바쁜 동생들이 와서 아버지를 모시고 치과에 가는 건 무리였다. 운전하지 않는 우리 부부는 아예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빨리 손을 쓰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몇 달이 지나갔다. 다음 달에는 아버지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간호사는 좀 더 지켜보자고, 노인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고 했다. 간호사의 말만 계속 믿었던 것이 나중에 큰 후회로 돌아올 줄을 그때 어찌 알았으랴. 부모는 자식을 살뜰히 살펴도 자식은 부모를 그리 살피지 못하는 법이다.

  여름이 되었다. 7월이 되어 무더위가 시작됐다. 나는 무더위가 끝나고 나서 면회를 갈 작정이었다. 그런데 자꾸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허 성운 아버님이 따님 찾으세요.” 전화를 받았는데 아버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왜 울어요?”
 “선화야, 선화야...”

“말씀하세요, 아버지.”

“선화야, 선화야...”

아버지는 내 이름만 부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린아이같이 울기만 했다. 아버지가 그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슴이 칼에 베이듯 아팠다.

“저희 아버지 왜 그러세요? 어디 아프세요?”

간호사를 바꿔서 물었다.

“아버지가 자주 자식들을 찾으세요. 면회 자주 오세요.”

“아프신 건 아니구요?”

“괜찮으세요. 너무 걱정은 마세요.”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병원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분명 아버지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혹시 치매가 온 건가 싶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를 멀리 떨어진 병원에 둘 수 없다고 결심했다.

  아버지에게 가기 전 대전에 있는 요양병원을 알아봤다. 미리 알아놓고 바로 모셔 올 생각이었다.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아버지를 한 달에 한 번 가서 보고 오는 건 방치나 다름없었다. 다행히 적당한 가격에 시설이 좋은 요양병원을 찾았다. 아버지의 건강 상태도 체크해야 했다. 치매를 염두에 둔 나는 대전 충남대병원 신경외과에 예약했다. 그곳에서 검사한 후 바로 요양병원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그때 틀니도 교체하기로 했다. 내가 자주 아버지를 찾아가면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시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나의 판단은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곧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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