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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지킴이 Jul 23.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53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시한부 선고

시한부 선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버지를 옮겨올 날짜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나는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마치고 같은 순의 자매가 운전하는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집에 거의 도착해가는데 휴대전화기가 울리며 민들레 병원이라는 신호가 떴다. 직감적으로 나는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허 성운 님 따님이시죠?”

“네, 네.”

“저, 아버님이 어제부터 황달 증세가 나타나서 오늘 시내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왔거든요. 검사를 해보니 아버님이 췌장암 말기라고 하시네요.”

“췌..장..암이요?”

“네... 저희도 미처 몰랐어요. 병원에서는 이미 치료 불가능한 상태라고 해요. 한 달 정도 사실 수 있을 거라고 하시네요.”

그때 느꼈던 감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눈물이 터져 나와 제대로 말을 이을 수 없었던 것밖에는. 운전하던 자매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그동안 아버지 모셨으니까 남은 시간도 저희가 아버지 잘 돌봐드릴게요. 저희한테 맡겨주세요.”

그동안 아버지에게서 나타났던 모든 증세가 췌장암 때문이었다는 게 드러났는데도 병원에서는 아버지를 끝까지 맡겨달라고 했다.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자식들도 살피지 못했는데 병원이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원망한들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니요. 내일 가서 아버지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바로 가능한가요?”

“그렇게 하시겠어요? 가능하긴 해요.”

“그럼 준비해 주세요. 내일 몇 시쯤 가면 되나요?”

“오후 한 시쯤 오세요. 준비 다 해놓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차 안에서 펑펑 울었다. 그런 전화를 받을 때 곁에 누군가 있었다는 게 위로가 된다는 걸 알았다. 자매는 말없이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고마워요. 내릴게요.”

“아버지 잘 모셔요.”

집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남편과 올케에게 전화했다. 진이 해외 출장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식을 들은 올케도 울음을 터뜨렸다. “며칠 전 뵙고 왔을 때 괜찮아 보이셨는데요.” 올케는 나를 위로했다. 진에게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철에게도 전화했다. 철은 “뭐라고?”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눈물을 삼키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그려졌다. “알았어. 어느 병원으로 모실 거야?...내일 가볼게.”

  전화로 소식을 알린 후 나는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울 수 있는 만큼 실컷 울었다. 한 달.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은 한 달이었다. 그 한 달 동안 아버지를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살아오면서 아버지에게만 온전히 관심이 집중된 시간은 그 한 달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한 달만이라도 나의 모든 관심을 쏟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그날부터 아버지에 대한 나의 애도가 시작되었다. 어머니를 보낼 때는 울지 못했던 나는 이제 성인이 되어 마음껏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남편이 돌아오자 다시 한번 눈물샘이 터졌다. 남편도 내 옆에서 함께 울었다.

“아버지가 암에 걸린 줄도 모르고...살이 빠지는 게 암이라는 신호였는데...내가 너무 무심했어...아버지 불쌍해서 어떡해...”   

“당신 잘못 아니에요. 암 발견했어도 치료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랬을까? 오히려 치료하느라 더 고생하셨을까? 췌장암은 발견하기 힘들다던데...그래도 알았으면 빨리 가까이 모셔 오기라도 했을 텐데...아버지 혼자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래서 그렇게 자꾸 전화했나 봐...난 그것도 모르고...자식 있어야 다 필요 없어...”

나오는 대로 쏟아내는 내 말을 들으며 남편은 내 등을 토닥거릴 뿐이었다.

  다음 날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아버지를 이송할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병원 별관 로비에 나와 있었다. 담요를 두르고 로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멍한 눈길로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았다. 휑한 두 눈과 푹 파인 볼, 앙상한 팔과 다리. 영락없는 말기 암 환자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구조를 요청하듯이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 기운이 없어 입을 열지도 못했다. 가슴이 미어졌다. 눈물을 흘릴 새도 없었다. 간호사들이 아버지를 병상에 눕히고 신속하게 앰블런스에 태웠다. 나는 정산을 다 한 후 아버지의 병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병원을 떠났다. 아버지가 2003년부터 6년 동안 머물렀던 병원은 달리는 차 뒤로 멀어졌다.

  일단 파주 시내에서 아버지의 암을 발견한 병원으로 아버지를 이송했다. 그곳에 가서 아버지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듣고 아버지를 돌볼 계획이었다. 차는 금세 병원에 도착했다. 아버지를 응급실에 옮기고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내게 아버지의 복부를 촬영한 CD를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암은 이미 복부 전체로 퍼져 있어서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의사는 한 달 정도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황달을 잡기 위해 담즙을 밖으로 빼내는 시술을 당장 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며칠 내로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했다. 바로 시술을 시작해야 했다. 아버지가 시술하는 동안 나는 병원 컴퓨터로 CD를 남편에게 보냈다. 남편은 온누리교회에서 일대일 양육을 해주셨던 박영태 장로님에게 CD를 보내드렸다. 고대 의대 교수이자 고대 구로병원에서 권위 있는 내과 전문의였던 박영태 장로님은 별것 아닌 건강상의 문제로 연락을 드려도 늘 친절하게 상담해 주셨던 분이었다. 이번에는 별것 아닌 일이 아니라 장로님의 전문성을 활용할만한 중대한 문제였다. 장로님은 남편에게 파주 병원 의사의 소견에 동의한다고 하셨다. 한 달 이상 살기는 힘들어 보인다며 아버지를 호스피스 병동에서 돌보라고 권하셨다. 나는 그 말을 염두에 두고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보기로 했다.

  아버지의 시술이 끝나자 어느덧 밤이 되었다. 응급실로 돌아온 아버지는 낮보다는 상태가 나아 보였다. 나를 알아보고 말도 할 수 있었다.

“아버지, 많이 아파요?”

“아니, 안 아파.”

아버지는 내가 곁에 있어서인지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의 습관대로 시트 밖으로 드러난 발가락을 까닥까닥했다. 기분이 좋다는 표시였다. 그동안 아버지가 불안했구나. 딸이랍시고 곁에 있으니 안정이 되나 보다 싶었다. 응급실에는 아버지 외에 다른 환자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병상 옆에 놓인 침상에서 밤을 지낼 생각이었다.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응급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철이었다. “왔구나.” 철은 아무 말 없이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버지는 잠들어있었다. 철은 아버지 얼굴을 보자마자 “흑”하며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몇 분 뒤 울음을 멈췄다. 내 앞에서 철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건 거의 처음이었다. 그날 올케와 통화했을 때 미국에 있는 진이 전화로 아버지 소식을 듣고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아내 앞에서는 감정을 드러내는 동생들이 내 앞에서는 여간해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철은 한 시간 정도 응급실에 머물다 다시 오겠다며 돌아갔다.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버지 상태에 대한 것 말고는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남매들은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필요한 이야기 외에는 하지 않았고 특히 감정에 대해서는 말하는 법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마음이 애틋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아버지의 암 선고를 듣고 각자 무엇을 느끼는지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감정을 말하지 말라. 그것이 코아의 삶의 방식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감정을 잘 나누었지만 나 역시 동생들과는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여전히 어색했다.

  밤이 깊어졌다. 아버지의 숨소리가 편안해지고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나도 침상에 누웠다. 병원에서 자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시한부를 선고받은 아버지 옆에서 잠드는 기분은 다른 행성에서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 꿈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 미안함, 통렬한 아픔이 가라앉고 아버지를 잘 지켜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한 달이라도 아버지를 외롭게 내버려 두지 말아야지. 아버지 옆에 있어야지. 아버지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 드려야지. 그 생각만 떠올랐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 1 퍼센트의 가능성도 없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쉬웠다. 나는 “왜?”라고 묻지 않았다. 내가 원한 건 단 하나였다. 아버지가 너무 큰 고통을 받지 않고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췌장암은 통증이 극심하다고 알려진 암이었다. 아버지가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걸 볼 자신이 없었다. 부디 큰 고통 없이 지내다가 돌아가시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그 외에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와 마지막 한 달

 

  파주 병원에서 사흘을 지내는 동안 주말에 철이 아버지와 하룻밤을 보냈다. 해외 출장 중인 진에게서 올케를 통해 연락이 왔다. 친구가 일하는 대림역 부근의 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겼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바로 아버지를 그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다시 아버지를 앰블런스에 태우고 그 옆자리에 앉았다. 파주에서 대림동까지는 차로 한 시간 넘게 걸렸다. 8월 말이었는데 아직 무더위가 물러가지 않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길가의 나무들은 힘찬 생명의 약동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가는 내내 턱을 위로 올려 앰블런스의 좁은 창을 통해 밖을 바라봤다. 눈에 들어오는 하늘과 구름, 나무의 꼭대기를 보며 아버지는 곧 떠날 세상과 작별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장엄한 순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한 인간이 다시는 보지 못할 세상과 무언의 이별을 하는 장면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감동과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했다.

  이인실 병실에 들어갔는데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병원 원장인 진의 친구가 배려를 해줘서인지 아버지가 있는 동안 옆 병상에 환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인실을 일인실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진의 친구는 아버지를 성심껏 보살피겠노라고 말했다. 호스피스 병동처럼 모시겠다고. 아버지에게는 치료가 아닌 완화요법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고통을 최대한 경감시키는 게 입원의 목적이었다. 나는 간병인을 구했다. 도저히 내가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목욕시키고 머리를 감겨줄 자신이 없었다. 남편이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아버지의 기저귀를 갈 수 있었다. 처음 온 간병인은 조선족 여성이었는데 하루 일하고 나서는 아버지가 까다롭다며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다행히 두 번째 온 간병인은 나이가 칠십이 넘은 분이었는데도 체력이 좋고 경험이 많아 노련한 분이었다. 아주머니는 본인이 드실 반찬을 다 챙겨 갖고 와서 냉장고에 넣었다.

“염려 말아요. 내가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드릴 테니.”

“너무 감사합니다.”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항상 아버지 옆을 지킬 믿음직한 간병인이 생기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나는 낮에는 병원에 있다가 저녁에 양평동에 있는 진의 집에 가서 자는 식으로 아버지 옆에 있기로 했다. 주말에는 대전 집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처음 며칠은 우유니 바나나니, 요구르트 같은 가벼운 음식을 드셨다. 그러더니 곧 모든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몸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나마 요구르트라도 떠서 아버지 입에 넣어드릴 때의 작은 만족감마저 사라졌다. 간호사가 와서 매일 팔의 이곳저곳에 주사를 찔러넣어 영양제와 수액, 진통제를 투여했다. 평소에는 통증을 호소하지 않던 아버지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아야, 아야” 소리를 냈다. 주사가 아픈 양반이 어떻게 암 통증을 견디는 것일까. 간호사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아버지가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한 번도 아프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모른다.

  문제는 통증이 아니었다. 곧 아버지의 섬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낮에도 자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는 “저놈 잡아라, 저놈.” 하면서 공중에 대고 마구 욕을 퍼부었다.

“아버지, 왜 그래? 누구한테 그러는 거야?”

“저놈, 저놈이 소를 훔쳐 간다. 나쁜 놈.”

“무슨 소?”

아버지가 횡설수설하는 말을 종합해 보면 북한에 있을 때인지 피난 때인지 누군가 집에서 물건과 가축을 훔쳐 간 모양이었다. 그 기억이 꿈에 나타났는지 몇 번씩이나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곤 했다. 피난 시에 있었던 일은 아버지의 기억 속 가장 어두운 곳에서 기어나와 아버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꾸만 기저귀를 잡아 뜯었다. 갑갑한지 기저귀를 끄집어내서 갈기갈기 찢었다. 그리고 숨을 편히 쉬라고 코에 끼워준 초록색 끈이 달린 호흡기를 자꾸만 떼어냈다. 얼마나 답답하면 그럴까 싶으면서도 간병인 아주머니와 나는 그럴 때마다 아버지에게 호통을 쳤다. 한번은 갑자기 방 한구석을 쳐다보면서 “저 뱀 잡아라, 뱀.” 했다.

“아버지, 뱀이 보여?”

“응, 큰 뱀이 여러 마리. 잡아!”

나는 근심에 휩싸였다. 뱀이 보이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아버지 마음에 괴로움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대학 시절 내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장 세학 형제님에게 연락했다. 이미 아버지는 나를 따라 교회에 다니며 여러 번 복음을 들었고 예수님을 영접하겠노라고 했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신앙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장 세학 형제님이 찾아오셨다. 죽어가는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해본 경험이 많은 형제님이었다. 쉬운 말로 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예수님을 전했다. 아버지는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았다. 휠체어에 앉아 형제님의 말에 “네, 네.”하며 응답했다. 순순히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따라 했다. 그 기도를 따라 했다고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온누리교회 담당 목사님에게 전화를 드려 아버지가 세례를 받으실 수 있는지 여쭤봤다. 목사님은 준비해 올라오겠다고 하셨다.

  목사님과 교회 자매님들 몇 분이 대전에서 올라왔다. 병상에서 세례를 주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아버지는 순순히 믿음을 시인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제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책을 아버지께 읽어드렸다. 그리고 찬송가를 불러드렸다. 아버지는 성경보다 찬송을 불러주는 걸 더 좋아했다. 찬송 소리가 끊어지면 “찬송가 불러”라고 말하곤 했다. 찬송가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모양이었다. 찬송가를 들을 때 아버지의 눈에 가끔 눈물이 맺혔다. 그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의 영혼의 금선이 건드려진 것일까. 나는 아버지 정신이 또렷하다 싶을 때마다 반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말해줬다.

“아버지, 무서워요?”

“아니, 안 무서워.”

“장하다, 아버지. 하나도 무서워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아버지 맞이하러 오세요. 걱정하지 마요.”

“그래...”

평생 외면했던 천국에 대해 들을 때 아버지는 절박하게 그 소망을 붙잡는 것 같았다. 나는 설사 천국이 없다고 할지라도 죽어가는 사람에게 천국에 대해 말해주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위안도 줄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믿음이 있는 자녀가 있다는 건 죽어가는 부모에게는 참 좋은 일이었다.

  생명나무 치유 사역에서 만난 한 자매님이 전화해서 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나누라고,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라고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들려주라고 했다.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까. 나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아버지에게 해 드렸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죽음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이 연약한 아버지가 과거에 나를 그렇게 두려움으로 몰고 갔던 사람이 맞을까. 아버지를 용서하긴 했지만,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이 안타까웠다. 한번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한테 미안하지 않아요?”

“뭐가 미안해?”

“술 먹고 무섭게 한 거.”

“안 미안해.”

“왜 안 미안해요?”

“다 술 때문인데, 뭘.”

기대하진 않았지만, 아버지는 정말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사과나 용서를 구하는 말을 바라진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을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끝까지 자신의 양심을 마주할 수는 없었던 아버지. 이제 양심이 깨어난다면 그 고통을 어찌 감당할까 싶었다.

“난 아버지 다 용서했어요. 마음 편히 가지셔도 돼요. 아셨죠?”

“그래.”

  한번은 병원에 도착하니 병실이 비어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니 간병인 아주머니가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병실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오세요?”

“아버지 모시고 시장 한 바퀴 돌고 왔어요.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몰라. 더 있다 가자고 하시는데 너무 힘드실까 봐 왔지. 아이처럼 좋아하시더라고.”

“그러셨어요? 힘드셨을 텐데 감사해요.”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셔서 또 나가야겠어.”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점점 체력이 약해져 다시 밖에 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되지 못했다. 시장을 돌면서 아버지 눈에 보였던 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시는 볼 수 없는 세상과 마지막으로 놀다 오셨구나. 그리 돌아다니길 좋아하셨으니 그 순간만큼은 행복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내게도 자주 휠체어를 태워달라고 했다.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도는 것을 좋아했다. 몇 바퀴를 돌아도 아버지는 “한 번 더, 한 번 더”를 연발했다. 아버지는 탐욕스러울 정도로 눈으로 사람들과 사물을 집어삼켰다. 1층 로비에서 밖이 내다보이는 현관 앞에 휠체어를 세우면 초점 잃은 눈으로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았다. 마치 세상을 향해 구애하는 사랑에 목마른 사람처럼.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렇게 아버지는 조금씩 세상과 작별하고 있었다.

  이 주일 정도 병원을 오 가던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동생의 집에서 잠을 자는 것이 아무래도 편치 않았다. 아버지도 좀 더 편안한 곳에서 계시게 하고 싶었다. 나는 대전 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봤다.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한 번 더 아버지를 이동시켜야 했다. 죽어가는 말기 암 환자를 몇 번이나, 그것도 서울에서 대전으로 옮기는 게 무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강행했다. 사실 아버지가 한 달 넘게 사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가까이서 아버지를 돌볼 수 있어야 했다. 다행히 간병인 아주머니도 대전까지 따라오겠다고 하셨다. 참 감사한 분이었다. 아버지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껴 잘해 주고 싶어 하셨다. 아버지는 마지막 앰블런스로, 나는 기차로 대전으로 내려왔다. 아버지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지낸 곳은 대전 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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