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54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이별
이별
대전 성모병원의 내과 교수는 아버지의 진료 기록을 보더니,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떻게 이런 상태가 되셨나 그래.” 무수히 많은 암 환자를 보았을 의사가 혀를 찰 정도면 아버지의 병세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폐 엑스레이를 찍다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 검사는 무리였다. 병원을 옮기느라 비슷한 검사를 반복하게 한 주범이 나였다. 나는 끝까지 미숙한 아버지의 보호자였다.
성모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은 병원 안에서 특별한 별도의 공간이었다. 마치 궁전 안에서 후궁들이 칩거하는 별궁이라고 할까. 병동으로 들어서는 육중한 문을 닫으면 밖의 세상과 차단됐다. 가운데 넓은 로비를 두고 몇 개의 병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병실마다 환자들이 거의 다 차 있었음에도 병동 전체는 늘 고요함과 적막함이 감돌았다. 환자들의 신음마저 간간이 들려올 뿐,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 중간 지대였다. 매일 한 명 이상의 환자가 임종을 맞이했다. 그곳에서 죽음은 매일 일어나는 일상이었다. 처음에 6인실에 들어갔던 아버지는 섬망이 올 때 기저귀를 잡아 뜯고 자다가 소리를 지르곤 해서 옆 병상에 있던 환자가 불만을 제기했다. 할 수 없이 이인실로 옮겼다. 옆 병상은 비어 있었는데 의식을 잃은 할아버지가 들어오셨다가 밤사이 돌아가셔서 다시 나가시고 난 후 계속 비어 있었다. 다시 일인실이나 마찬가지가 된 셈이었다.
병동 안에는 기도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마리아상이 놓여 있는 성당 기도실이었지만 그곳에서 내가 개신교 신자라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잠이 들어 할 게 없으면 기도실에 가서 조용히 앉아있거나 짧게 기도하곤 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곁에 있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내가 러시아에 있을 때나, 수업이 많아서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어도 곁을 지킬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 학기에 수업이 없었던 것을 감사했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그토록 오랜 기간 공포만을 불러일으켰던 죽음은 막상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그리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인생에서 가장 의미로 충만하고 아름다울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그때만큼 자부심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프다고 투정 한마디, 불평 하나 하지 않는 아버지가 장하기만 했다. 살아있을 때 삶의 모델이 되어주지 못했던 아버지는 죽어가면서 ‘이렇게 죽는 거란다’라며 모범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통증을 호소하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내 유일한 기도를 들어주심에.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내쉬고 떠나는 순간을 위해 기도했다. 고통스럽지 않게 하소서. 그 순간 아버지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어느 날 병원에 가기 위해 준비를 마치고 막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휴대전화기가 울렸다. 간병인 아주머니였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왜요, 아주머니?”
“에고, 빨리 와요. 아버지 돌아가시겠어.”
“왜요?”
“지금 피 토하시고 난리났어.”
“금방 갈게요.”
평소에는 지하철을 타고 중앙로역에 내려 걸어가곤 했었다. 전화를 받은 나는 도로로 뛰어가 택시를 잡아탔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 돼요, 아직은. 제발요, 하나님. 오늘 돌아가시지 않게 해주세요.’ 간절한 마음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아직 아버지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병실까지 뛰어가면서 ‘제발, 제발’을 연발했다. 다시 전화가 오지 않는 걸 보니 아직 무사하시다는 증거였다.
병실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몸을 일으키고 앉아있었고 간호사가 바삐 아버지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흑’하더니 아버지 입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입원 중에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말기 암의 실체를 마주하는 듯했다. 아버지의 연약한 육체를 사정없이 짓이겨놓은 그 병이 내게 “어떠냐?”라고 말을 걸었다. 이래도 내가 무섭지 않아? 라고. 아버지가 가엾어서 눈물이 철철 흘렀다. “다행이야. 무사히 넘기셨어. 난 돌아가시는 줄 알았어. 얼마나 놀랐는지.” 간병인 아주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다행히 피가 멈추고 아버지 상태가 진정되었다. 지친 아버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버지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며 이제는 고생 그만하시고 가시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그날 돌아가시지 않은 것이 감사했다. 조금은 더 시간이 필요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 아버지는 잠을 잤다. “찬송가 불러.” 눈을 뜰 때마다 아버지는 이 말만 되풀이했다. 나는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만 작은 소리로 아는 찬송가를 다 뒤져가며 불렀다. 남편이 오면 남편이 나를 대신해 찬송가를 불렀다. 넓은 성모병원 전체를 휠체어로 구경시켜 주려던 내 작은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시는 휠체어에 앉을 수가 없었다. 조금씩 꺼져가던 아버지의 의식은 어느 날 완전히 무의식 상태로 빠져버렸다. 이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눈을 뜬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물러주고 찬송가를 부르고 병동을 몇 바퀴 돌면서 하루하루가 지루하게 흘렀다.
아버지가 의식을 잃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는 아버지를 보내드릴 준비가 다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아버지가 돌아가실 수 있다는 생각을 매일 하며 병원에 갔다. 밤사이에 전화가 올지도 몰랐다. 진은 해외 출장이 잡혔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일정을 미뤘다. 9월도 끝나가고 있었다. 추석 연휴가 다가왔다. 추석 당일, 명절을 지내러 간병인 아주머니가 서울 집에 올라가고, 대신 대전에 와 보기 어려웠던 진과 철이 내려왔다. 남편과 진, 철, 세 남자가 처음으로 아버지 병상 주위에 모였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장남인 진을 자주 찾았다. 진이 오면 얼굴이 환히 빛나곤 했다. 아버지에게 장남은 어떤 의미인 걸까. 자신이 장남의 어깨에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던 걸 조금이라도 아시기는 할까.
세 남자가 아버지 병상 맡에서 함께 찬송가를 불렀다. “아빠, 듣기 좋지? 남자들이 같이 부르니까 내가 혼자 부를 때보다 멋있지?” 아버지의 얼굴에는 이제 어떤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볍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만이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표시였다. 까딱까딱하던 발가락의 움직임도 멈춘 지 오래였다. 나는 셋이 오랜만에 뭉친 김에 온천이라도 다녀오라고 했다. 온천으로 유명한 유성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듣고 있다면 아들들과 사위가 함께 온천에 간다는 말이 듣기 좋을 것이었다. 셋이 온천에서 돌아오니 오후가 되었다. 이제 아들들이 떠날 시간이 됐다. “다시 올게요, 아버지.” 진이 아버지 얼굴에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그때 놀랍게도 아버지 입에서 ‘헉’하는 소리가 나면서 아버지의 두 손이 가슴으로 올라갔다. 의식을 잃은 아버지가 진이 간다는 말에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네가 가서 서운하신 모양이네.” 진은 아버지 손을 잡아드렸다. 아버지는 다시 부동의 자세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감은 눈에 살짝 물기가 어린 것도 같았다.
진과 철이 떠나고 나와 남편이 남았는데 오후 네 시경이 되자 간호사의 움직임이 갑자기 부산해졌다. 아버지의 혈압과 맥박을 자주 체크하러 들어오더니 얼마 후 나를 불렀다.
“마음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오늘 환자분이 돌아가실 것 같아요.”
“어떻게 아세요?”
“최고 혈압이 60밖에 안되세요. 그럼 돌아가시는 사인이에요.”
“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드실 거예요.”
내 마음은 의외로 차분했다. 다만 아침에 얘기해주었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진과 철이 가지 않았을 텐데. 동생들이 같이 아버지 임종을 지킬 수 있다면 좋았을걸. 아쉬웠다. 아버지의 팔과 다리가 며칠 전부터 많이 부어있었다. 그것이 전조였다. 혈압이 60까지 내려가면 곧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나와 남편은 바빠졌다. 교회 담임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추석 당일이었는데 집에 계셨다. 혹시 와 주실 수 있느냐고 했더니 오시겠다고 했다. 순모임 식구들과 나타샤 부부에게도 연락했다. 감사하게도 시간이 되는 분들이 많았다. 저녁 8시부터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병실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평일이라면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떠나는 순간 나와 남편만 아버지 옆에 있지 않게 된 것이 좋았다. 한 달 동안 아버지 면회를 온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아버지를 기억하고 찾아와 줄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돌아가시는 순간만이라도 쓸쓸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 바람이 추석 덕분에 이뤄진 것이었다. 9시가 되자 병실 안이 사람들로 거의 꽉 찼다. 사람들은 병실 밖 로비에 나가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렸다. 나도 오랜만에 사람들로 활기가 도는 병실에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곧 있을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9시 반이 넘었을 때 목사님이 오셨다. 나는 병실 밖으로 목사님을 모시고 나가 그간의 일과 아버지의 상태를 나눴다. 갑자기 병실에 있던 남편이 나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같아요.”
“응?”
나는 병실로 달려 들어갔다. 내 눈앞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아래서부터 점점 노랗게 변해갔다. 그 점 외에는 어떤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버지 돌아가신 거야?”
“조금 전에 크게 세 번 숨을 내쉬셨어요. ‘후’ 하시더니 아무 소리가 없었어요.”
간호사가 들어왔다. 아버지의 눈을 열어보고 목에 손을 대 보더니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잠깐 나간 사이에 임종을 놓친 것이었다. 남편이라도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것만도 다행이었다. 노랗게 변해가던 아버지의 얼굴이 나를 향한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아버지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드디어 모든 고통이 끝났다. 내 속에서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이 퍼져 나갔다.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빠, 잘 가요.”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곧 예배가 시작되었다. 모인 사람들이 아버지를 둘러싸고 찬송가를 불렀다. 그리고 목사님이 기도를 해주셨다. 아버지와 나를 위해 이보다 큰 배려는 있을 수 없었다. 처가댁인 강릉으로 운전하던 진에게 전화했다. 진은 바로 차를 서울로 돌렸다. 진의 집에서 가까운 목동 이대병원에서 장례를 치르기로 했다. 방금 영혼이 떠난 아버지의 몸이 병실을 떠났다. 남편이 운구차를 타고 바로 서울로 향했다. 나는 남은 손님들과 인사말을 나누고 혼자 집으로 돌아갔다. 아무 생각도 없이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진의 집으로 향했다. 추석 연휴가 끝나지 않아 장례식은 다음 날로 예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