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지킴이 Jul 27. 2023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55화. 5장 코아의 발견, 그리고 이별.  애도

애도   

  

  짙은 회색의 행렬이었다. 사람인지 시체인지 구분할 수 없는 형체들이 끝없이 늘어서 지그재그로 줄을 맞추어 어디론가로 가고 있었다. 형체들은 모두 비쩍 말라 있었고 그들이 입은 회색빛 옷은 헐렁했다. 얼굴은 무표정하거나 고개를 숙여서 분간할 수 없었다. 그 무리 가운데서 아버지가 보였다. 아버지도 회색 옷을 입고 아주 천천히 행렬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볼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눈은 초점을 잃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형체들은 아버지를 지나쳐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형체들을 쳐다보았다. 누구도 아버지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오르고 심장이 녹아내렸다. “아버지, 아버지...”

  꿈이었다. 새벽 네 시. 이틀 동안의 장례 절차를 마치고 발인하는 날 새벽이었다. 왜 그런 꿈을 꾼 것일까. 내게는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가는 길에서 힘이 없어 더 가지 못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의 신앙과는 도저히 합치될 수 없는 그런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편안히 가시지 못하는 이유라도 있을까. 혹시 그 길이 지옥으로 향하고 있어서 두려움 때문에 주저앉은 것일까. 나는 슬픔과 아픔에 가슴이 찔려 아버지 영정 사진 앞에서 대성통곡했다. 진정되지 않은 채 몇십 분을 울고 있으니 남편이 내게 다가와 나를 안아줬다. 나는 횡설수설하며 꿈 얘기를 했다. “여보, 아버지가 천국에 못 가나 봐. 엉, 엉, 엉.” 나는 천상 어린아이처럼 흐느꼈다. 잠시 후 진이 나를 발견했다. 누나 왜 그러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은 악몽을 꾸었다고 답했다. 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누나, 그만 해.”라고 말했다. 내가 동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가까스로 울음을 진정시켰다.

  그 후에도 한 번 더 비슷한 악몽을 꾸었다. 나는 두 가지로 꿈을 해석했다. 첫째는 아팠을 때의 아버지 모습을 내가 잊지 못해 꿈에 나타난 것이었다. 둘째는 아버지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나의 불안이 꿈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내 마음 상태를 나타낸 것이었지 아버지에 대해 알려주는 꿈은 아니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내 꿈에 젊었을 때 모습으로 몇 번 다시 나타났을 뿐 아플 때 모습으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꿈속에서 아버지는 술을 마셨고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부끄럽고 무서웠다.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친 후 생활은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이전과 달라 보였다. 나는 진짜 고아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보호자였던 때가 없었는데도 아버지가 있는 나와 없는 나는 달랐다. 세상이 꿈에서 본 것처럼 온통 회색으로 보였다. 텅 빈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세상에 더 이상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고 허전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가 그립고 보고 싶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찾아갈 수 있을 때가 좋았다. 아버지 목소리라도 녹음해둘 걸, 아버지 동영상이라도 찍어둘 걸, 때늦은 후회가 찾아왔다. 아버지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유언을 들을 수 있는 자녀들이 부러웠다.

  나는 아버지 인생을 회고해 보았다. 가족의 가해자로 살아온 삶이 아닌 아버지 자신의 인생을. 자녀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날 때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삶을 평가하게 된다. 아버지도 나름 행복하고 보람있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 중독으로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했던 아버지가 가여웠다. 자녀들에게 준 상처와 아픔은 차치하고라도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없었던 아버지. 나의 존재가 아버지의 삶을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어쩌면 그러고 싶어서 나도 더 힘들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부모로서 자녀에게 이런 아픔과 짐을 남겨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사랑과는 별도로 나는 냉정하게 아버지의 삶을 심판했다.

  길을 가다가도, 집안일을 하다가도 불현듯 아버지가 떠올라 멍하니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가끔 눈물이 터지면 참지 않고 울었다. 아버지의 애도는 어머니처럼 평생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삼 개월 정도 지났을 때 대전 성모병원에서 카드가 한 장 배달되었다. 최근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을 모시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던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초대받은 날짜에 혼자 병원을 찾아갔다. 모임 장소는 호스피스 병동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 입구부터 꽃으로 정갈하게 장식이 되어 있는 홀 안으로 들어섰다. 홀 안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수녀님 한 분이 앞에서 말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저희의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어떻게들 지내셨어요? 여기 오신 분들 가운데 어떤 분은 부모님을, 어떤 분은 배우자를, 어떤 분은 자녀를 최근에 떠나보내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겪은 슬픔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여기 계신 분들은 아마 비슷한 마음들이실 겁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어요.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면 서로에게 위로를 주실 수 있을 거예요.”

수녀님은 이렇게 모임의 취지를 설명하고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본인의 이야기, 고인의 이야기를 나와서 들려달라고 부탁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남자분이 나가시더니 아내를 떠나보낸 이야기를 했다. 그분의 뒤를 이어 젊은 여자가 나가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렇게 한 명씩 나가서 짧게 고인을 보낸 후 그들이 겪은 심정을 나눠줬다.

  나는 홀에 들어서면서부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렀다. 자리에 앉아서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홀 안에서 그렇게 계속 우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할 것 같았다. 나도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수녀님이 나에게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우시던데 나오셔서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앞으로 나갔다. 나도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였다는 것,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나의 상태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말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눈물이 진정되었다.

  사람들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있었는데, 그 테이블 위에는 카드가 놓여 있었다. 수녀님이 얘기했다. “여러분 앞에 카드가 보이시죠? 이제 그 카드에 고인에게 보내는 짧은 인사말을 적어보세요. 작별 인사인 셈이죠. 카드를 다 쓰고 나면 함께 옥상으로 올라가서 풍선에 카드를 매달아 하늘로 올려보낼 거예요.” 나는 그것이 애도의 예식임을 이해했다. 너무나 멋지고 의미 있는 애도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 나는 천천히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적어 내려갔다.     

  아버지, 저 선화예요. 잘 계세요? 아버지가 떠나가시고 나서 벌써 석 달이 흘렀어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이 허전하고 쓸쓸해요. 아버지를 이렇게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 이제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해요. 저 잘 살게요. 아버지도 이제 편안하게 쉬세요. 아버지, 사랑해요. 잘 가세요. 안녕.

  

  그때 나는 아버지가 내 아버지여서 좋았다고, 고맙다고 쓰지 못했다. 내가 죽기 전에 그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수녀님을 따라 병원 옥상으로 올라갔다. 빨간색, 분홍색, 초록색, 흰색, 파란색, 보라색, 노란색 온갖 색깔의 풍선이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분홍색 풍선을 골랐다. 그리고 카드를 넣은 봉투를 풍선에 매달았다. “자, 다 준비되셨으면 이제 풍선을 날려 볼까요? 풍선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바라보세요. 그리고 이제 고인을 보내드리는 거예요.” 나는 손에 붙들고 있던 풍선을 놓았다. 헬륨 가스를 먹은 풍선은 저절로 공기 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한꺼번에 수십 개의 풍선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갖가지 사연을 담은 카드를 매달고 풍선은 고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높이, 높이 올라갔다. 나는 내 풍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하늘을 바라보았다. 쉼 없이 분홍색 풍선이 올라가고 있었다. “아빠, 안녕. 안녕.” 다시 그쳤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 밀려들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 이상 풍선들이 보이지 않았다. 점만큼 작아진 풍선들이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밝아진 얼굴로 옥상을 떠났다.

  삼 개월 후 다시 한번 병원에서 카드가 왔다. 나는 한 번 더 병원에 갔는데, 그때는 다과를 나누며 간단히 지낸 이야기를 한 것이 전부였다. 그날은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한 번 더 카드가 왔지만 나는 더 이상 병원을 찾아가지 않았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코아였다. 알콜 중독자 자녀의 회고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