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정리를 위해 할머니는 버스를 탄다
고령층에게 비대면 금융서비스가 필요한 이유
사무실 자동문이 열리고, 보행기를 밀며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할머니, 어떻게 오셨어요? 뭐 필요하신 일 있으세요?”
그러자 할머니는 내 앞으로 와 보행기 속에서 가방을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며느리가 돈 보냈다고 해서 찍어보려고.”
찍어본다-는 통장을 기장해 달라는 이곳의 언어다.
할머니는 힘겨운 몸짓으로 가방을 뒤지고 그 속에서 통장을 꺼내어 내게 건넨다. 나는 그 통장을 단말기에 넣는다. 그 짧은 순간, 머리가 복잡해진다. 제발 돈이 들어와 있어야 할 텐데! 간혹 가족들(혹은 누군가)이 돈을 보냈다는 말에 농협을 방문하지만, 들어온 돈이 없는 때도 있다. 돈이 들어왔을 거라고 기대 하나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온 농협까지 온 수고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돈이 들어와 있다.
“며느리 이름이 XX 에요? 20만 원 보냈네요”
내 말에 할머니의 얼굴이 단숨에 환해진다. 나는 통장 내역을 보면서 다른 것도 봐 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그러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기초연금도 들어왔고요, 전기요금이랑 전화 요금은 빠져나갔네요.”
“전기요금이 왜 그렇게 많아!”
“그렇네요. 지난달 보다 많이 나왔네요.”
“애들이 와서 선풍기를 하루종일 켜놓더라고!!”
할머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노여워진다. 아이고, 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꾼다.
“그래서 통장에는 전부 이만큼 돈이 있어요. 좀 찾아드릴까요?”
“다음 장에 가려면 돈이 좀 있어야 하긴 한데…. 다른 건 손대지 말고 며느리가 보낸 것만 찾아줘.”
“20만 원만 찾을까요?”
“응. 며느리가 준 것만 찾아줘.”
“네. 도장 가져오셨어요?”
“아이고, 도장을 안 가져왔네!”
“네? 도장 없으면 돈 못 찾아요! 가방 잘 살펴보세요!!”
“아이고, 안 가져왔…. 아, 있네! 여 있네!”
할머니가 아이처럼 기뻐한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도장을 받아 확인하며 묻는다.
“만 원짜리로 들릴까요? 오만 원짜리 드릴까요?”
그러자 할머니는 오만원권으로 달라고 하신다. 그래서 오만원권 4장을 드리니, 오만원권 하나를 꺼내서 만 원권으로 바꿔 달라고 한다. 그래서 만 원권 다섯 장을 드리니, 이번에는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천 원권으로 바꿔 달라고 한다.
“버스 기사들이 천 원짜리 안 내면 막 승질을 내. 잔돈 안 낸다고.”
할머니는 내게 일을 여러 번 시킨 것이 미안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덧붙인다. 나는 이렇게 돈 바꿔주는 게 제 일이니 괜찮다고 대답한다.
더 하실 일이 있냐고 여쭈니 없다고 하신다. 나는 조심히 가라고 인사하는데, 할머니는 안 갈 거라고 하시며 창구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말한다.
“버스 기다려야 해.”
“아, 버스 타고 가세요? 몇 시 버슨데요?”
“2시 버스.”
“..... 네?”
나는 시계를 본다. 지금 시간은 10시 45분이다. 나는 아득한 기분이 되어서 말한다.
“통장 찍어보시려고 일부러 나오신 거예요?”
“응. 그럼 왜 나왔겠어. 온몸이 이렇게 아픈데. 아이고고”
할머니의 앓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숨이 턱, 막힌다. 통장에 돈이 들어온 걸 확인하기 위해, 걷기도 힘겨운 몸을 이끌고, 버스를 타고, 농협에 온다. 그리고 5분도 안 걸리는 일을 보고, 두세 시간 뒤에 오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패턴을 젊은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통장의 거래내용을 확인하는 것은 어플만 켜면 바로 확인이 된다. 현금을 찾는것과 도장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른다. 심지어 젊은이들에게는 현금이 필요하지도 않다. 카드만 있다면 (거의) 모든 곳에서 결제가 되니까. 물론, 잔돈 문제로 버스 기사와 실랑이를 할 필요도 없다. 후불교통카드가 있으니까. 심지어 요즘은 핸드폰만 있어도 이 모든 것이 가능하고.
너무나 간단하고 편리한 금융서비스에 익숙한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나도 그랬다. 이렇게 편리한 금융서비스를 두고, 굳이 수고로운 방법을 고수하는 어른들이 너무 답답할 뿐.
노년층들은 이 편리한 금융서비스를 왜 이용하지 않는 걸까? 요즘 휴대전화는 유치원생들도 만질 줄 안다. 그만큼 쉽고 간편하다. 그런데도 어렵다고만 하고 배우지 않는 건, 왜일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을 배우기는 쉽지가 않다. 배워도 자꾸만 잊게 된다.
학교 다닐 때를 생각해 보자. 모르는 문제가 있다. 당신은 선생님께 쉽게 질문을 했나? 나는 모르는 게 많아서 자주 물어야 했다. 선생님은 대부분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지만, 문제는 대답을 잘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꾸 물어보는 건 왠지 꺼려졌다. 다른 사람은 한 번에 이해하는데 나만 멍청해서 이해 못 하고 자꾸 물어보는 것 같고, 계속 물어보는 건 바쁜 선생님을 괴롭히는 일 같았다. 눈치가 보인다고 할까? 그러다 보니 점점 묻는 일은 줄어들고 답안지를 보는 일이 늘어났다. 결국엔 포기해버리기도 하고....
신입사원 때를 생각해 보자.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용기를 내어 선배에게 물어보기도 하지만, 대답을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어떨 때는 저번에 분명히 물어보고 답도 들었던 내용이 분명한데, 대답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르지만 다시 묻기에는 눈치가 보인다. 선배가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나는 왜 배운 것도 제대로 모르는 멍청이일까, 하는 자괴감이 든다.
젊은, 아니, 어렸던 나도 그랬다. 계속 묻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묻는 것이 얼마나 더 부끄러워지겠는가. 이래도 공감이 안 된다고? 그럼 엄마가 같은 말을 몇 번씩 하게 만들 때, 우리가 얼마나 쉽게 짜증을 내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더 오래 살아온 어른들은 더 자존심이 상한다.
반대로 익숙한 것은 편하다.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니까 편하다. 새로운 것을 익히고 바꾸는 것은 참 어렵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주말에 평소처럼 휴대폰을 하면서 누워서 보내기는 참 쉽다. 하지만 운동을 하고 자기 계발을 하는 것은 어렵다. 그것이 아무리 몸에 좋고 정신에도 좋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노령층에 금융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것, 그러니까 인터넷 뱅킹과 같은 비대면 서비스가 좋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생활에 접목하기는 절대 쉽지 않다. 묻는 것도, 배우는 것도,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결국 ‘자신이 아는’ 방법을 유지한다. 그 방법은 ‘자신이 잘 아는 확실한’ 방법이니까. 그것이 비록 더 귀찮고 복잡한 방법이라 힘들더라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에서 경험해야 하는 힘듦보다는 덜하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많은 것들이 비대면으로 바뀌고 있다. 은행 영업점은 자꾸만 줄어들고, 그나마 만질 줄 알았던 ATM도 자꾸만 축소된다. 이런 상황에서 고령층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마 당장이라도 그런 행동을 멈추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그냥 기존에 하던 데로, 창구에 많은 직원을 앉히고, ATM을 유지하라고 하고 싶다. 실제로 그렇게 하라고 많은 조합원이 주장하고, 조합원의 인기에 민감한 조합장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을까?
농협의 주 고객이 노령층이라는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령층이 점점 더 많은 건강 상의 문제를, 거동의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대면’ 서비스를 받기 위해 ‘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장벽이 된 것이다.
결국, 대면 서비스가 제일 필요한 사람이 바로 비대면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즉, 비대면 금융서비스에 적응하는 문제는 노년층에게 필수적인 부분이다.
농협의 주 고객들이 그런 노령층이라는 점에서 농협은 누구보다 더 깊게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이는 농협 조직의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농협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첫째로, 농협은 고객들을 위한 비대면 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시행해야 한다. 몇 번이나 묻는 것이 부끄럽지만, 그런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상황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그 예로 찾아가는 금융 교실을 운영하는 방법이 있다. 농촌 지역에서 이동이 어려운 고령층을 위해 마을 회관 등을 찾아가 교육을 진행하는 것이다. 직원들이 직접 찾아가거나, 지역 내 학생들로 구성된 봉사단을 활용할 수도 있다. 디지털 소외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만큼, 해당 부분을 관공서와 연계하여 해당 시간을 학생들의 봉사활동 시간 등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한다면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농협에서도 해당 학생들을 통해 잠재 고객을 확보할 수 있어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다.
또한, 영업점에 비대면 금융 교육 전담 직원을 마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는 특히 큰 비용과 시간이 들지 않으면서도, 고객들 관점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실용도가 높다고 본다. 이런 프로그램 진행하는 것은 주 고객층인 고령층의 불편함을 줄이는 것을 넘어, 지역민과 지역 사회와의 신뢰를 강화하는데도 이바지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데는 초기 비용이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비용은 장기적이고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해당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 대면 서비스의 축소에서 오는 반발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영업점 축소나 업무 효율화를 진행할 수 있어 절감할 수 있는 비용도 고려해야 한다. 장기적인 농협의 이미지와 고객과의 관계에서 오는 이점은 물론이고.
그 밖에도, 앞서 언급했듯이, 디지털 소외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만큼, 사회적 역할의 강조를 통해 공공사업으로 연계하여, 정부지원금 등을 활용할 수 있다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농협이 이미 하는 사회 공헌 활동 중 하나로 포함하는 방법도 있다. 비대면 금융 교육 프로그램을 현재 농협이 진행하고 있는 다양한 환원 사업 중 하나로 포함한다면 충분히 수용 가능한 영역일 것으로 생각한다.
두 번째로, 농협은 현재의 일괄적인 비대면 금융서비스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노년층의 눈높이에 맞는 다양한 서비스를 고민하고 개발해야 한다고 본다. 그 예로 나는 고령이나 거동이 어려운 고객들을 위한 새로운 디지털 금융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이는 보통 고령 고객들이 특정 직원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는 점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인데, 개인과 영업점, 그리고 특정 직원을 연결하여 계약을 맺는 것이다. 구체적이고 명확한 계약을 통해 유선 통화 등을 통해 처리할 수 있는 업무 영역을 설정해 두는 것이다. 그리고 해당 직원과 해당 영업점을 통해서, 내방 없이 업무 처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고령 고객들은 새로운 기술/기계 사용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데, 특정 직원과 통화로 진행한다면 디지털화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마다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으면서 디지털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 또한, 이 경우는 완전히 비대면으로 전환이 아닌 오프라인 요소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하여 고객이 디지털 서비스를 이용하면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단, 이 서비스를 제공할 경우, 명확한 업무 범위 설정은 필수이며, 직원에 대한 점검은 필수일 것이다. 직원이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나는 만큼, 문제 발생 시 그에 대한 책임도 분명하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직원과 고객을 모두 보호할 수 있는 기술이 전제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오늘날의 농협이 있는 것은 솔직히 농협이 뛰어난 금융서비스를 제공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농협이 있는 것은, 농협이 제공하는 것이 단순히 금융서비스가 아닌 농촌과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단체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따라서 농협은 디지털 사회로의 변화 속에서, 단순히 디지털화를 추종하여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농협을 있게 만든 기존의 노령 고객들을 소외시키지 않는 디지털화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교육 프로그램이나 새로운 금융서비스는 그를 위한 예시다.
농촌 사회와 조합원들과 함께 성장해 온 농협이 본래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디지털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도 농협의 강점인 인간적인 연결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함께 해야만 농협의 미래가 있다. 내 밥줄의 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