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없이 핀 진달래가 내게 알려준 것.
나는 무릎이 좋지 않아서, 등산을 가면 오를 때는 속도를 내지만 내려올 때는 거북이보다 못한 속도로 내려온다. 그 덕분인지, 오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내려올 때는 보이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 발견한 진달래가 바로, 그 예였다.
진달래가 11월 말에 핀다고?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휑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 사이에서 꽃분홍 진달래는 유난히 눈에 띄었다. 이 시기에 진달래라니... 계절을 잊은 진달래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여러 마음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상적인 흐름이라면 내년 봄이나 되어야 피었을 텐데... 분홍색으로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 무리가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나는 새삼스럽게 눈앞의 진달래를 바라보았다.
이 진달래가 봄에 피었어도 이렇게 신기했을까?
이 진달래가 봄에 다른 진달래들과 함께 평범하게 꽃을 피웠다면,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보았을까? 절대 아닐 것이다. 그냥 진달래구나, 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기를 달리해서 폈더니, 시선을 받고 관심을 받는다.
이 진달래도 이번 봄에는 이런 미래(?)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왜 자기는 꽃도 피지 못할까? 하고 우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뒤늧게 꽃을 피워냈고, 덕분에 시선을 독차지할 수 있다.
늦게 피는 것도 괜찮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우리 인생도 그렇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과 같은 속도가 아니더라도 괜찮다. 남들이 다 피어날 때, 피어나지 못했다고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진 시기에 피어난다면, 우리는 지금 받지 못한 사랑, 그 이상을 받을 테니까.
그런 생각에 위로가 되었던 것도 잠시였다.
그럼 피어내지 못하면 어쩌지?
결국 이 진달래도, 결국은 피어냈기에 시선을 받았다. 만약 끝까지 꽃을 피워내지 못했으면? 그럼 단 한 번의 시선도 받지 못하고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이 생각은 산을 내려와서도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저렇게 굴려도, 위로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피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겨울바람에 윙윙거리는 나뭇가지처럼 시끄러웠다. 한참의 고민 후, 이 이야기를 친한 선배 J에게 했다. 그러자 J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진달래의 의미가 꼭 꽃을 피워야 하는 거야?”
“네?”
“진달래의 목적이 꽃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만은 아닐 수 있잖아. 뿌리를 더 깊게 뻗는 것, 나뭇가지를 더 넓게 펼치는 것, 생존 그 자체가 될 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목적이 많을 수 있잖아. 우리가 뭐라고 진달래의 모든 것을 알겠니. 무엇보다 꽃은, 너무 우리 위주잖아?”
“아-”
그렇다. 지금껏 나는 힘들 때마다, 나는 언젠가 피어날 거라고, 그래서 나도 꽃피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큰 소리 칠 것을 기대해 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타인이 인정하는 꽃을 피우는 것이, 열매를 맺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나는 어째서 그렇게 타인의 시선에 얽매여 있던 것일까? 인생의 목적이 하나일 수 없는데.
꼭 피어내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나의 목적을, 의의를 찾는 일. 나로서 살아남는 일이다.
11월에 핀 진달래에게, 그리고 J에게서 나는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