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진짜 말'을 찾습니다.
"다시 한번만 설명해 주시겠어요?"
언제부턴가 자주 듣게 되는 반문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약간 당황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내 생각이 무언가 잘 못 된 걸까? 하는 두려움을 음, 하고 앓는 소리로 삼키며 말을 다시 시작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입안을 뱅뱅 맴돌다 꿀꺽 삼켜지고, 나는 다른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든다. 그럼 인내심 강한 사람만이 내 말을 끝까지 듣고, “아, 이런 내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라고 되물어온다. 몇 번이나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나서야 나는 “그거예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나는 조금 우울해진다. 나는 왜 말을 이따위로 밖에 못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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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말을 못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릴 땐 오히려 말을 ‘너무 잘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말로는 지지 않는 아이, 말발 하나로 살아남는 아이였다. 그런 말들이 조금 더 크면서는 ‘잘난 척한다’는 소리로 바뀌었고, 그것은 나에게 꽤 뼈은 질책이 되었다. 그 이후로 말할 때마다 조심스러워졌다.
“이 말을 하면 저 사람이 날 어떻게 볼까?”
“이건 너무 단호하게 들리지 않을까?”
“혹시 기분 상하지는 않을까?”
자꾸 눈치를 보게 되면서 말이 점점 흐려졌다. 내 의사는 최대한 감추고, 상황에 따라 바꿔 말할 수 있게, 어떤 것도 확정 짓지 않게. 그렇게 나는 ‘돌려 말하기’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나는 백두산 얘기를 하려면 남북 분단의 역사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듣는 사람은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나 역시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게 된다.
“나, 원래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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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하기의 단점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나는 생각한 것과 다른 말을 자주 한다. 머릿속으로는 A를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B를 말한다. 심지어는 그 실수를 오랫동안 자각하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 적도 있다.
또 나는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안다고 착각하고(내가 알 정도면 다른 사람도 알겠지!) 말하는 경향이 있다. 맥락과 배경이 사라진 이야기를 듣게 된 상대방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고...
이는 어쩌면 내가 정보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나는 좀 심한 난독이 있다. 책을 읽을 때, 문장을 내 멋대로 읽어버린다. (이걸 처음 알게 된 것은 토익 스피킹 학원에서였다. 주어진 문장을 큰 소리로 읽어야 했는데, 나는 책을 보고 읽으면서도 전혀 다른 말을 읽어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건 혼자서 책을 읽거나 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회사에서는 큰 문제였다. 회사 문서의 중요 내용을 누락하거나 잘못 파악하는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야, 적어도 세 번은 정독을 해야 문서를 '글자 그대로' 읽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잘 읽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의 말이나 비언어적 맥락에 도리어 지나치게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그런 불안감이 나의 안 좋은 습관들을 더욱 성장시켰고...
이러한 깨달음은 고대서부터 내려온 격언, '말수를 줄이라'는 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말을 줄이라는 건, 말을 잘못하는 실수를 ‘절대적’으로 줄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말을 안 하면 말실수할 확률도 줄어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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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이디어 회의가 있었다.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내 단점은 유감없이(?) 실력을 드러냈다. 내 아이디어는 나름대로 괜찮았지만, 말을 빙빙 돌리다 보니 요점이 흐려졌고, 결국 상대방이 끈기 있게 나의 말을 하나하나 재구성해서 "좋은 아이디어"로 마무리 지어주었다. 결과는 좋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사실은 원래 내가 했어야 할 말들이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결국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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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심했다. 이제는 바뀌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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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안다. 이 과정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나의 단점을 깨달은 이후, 변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이후에도 내 실수는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포기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이미 여러 번, 말투의 변화를 겪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내가 장난스럽게 사용하는 ‘비속어’에 사람들이 당황하는 걸 느낄 때가 있다. 타인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어휘를 내가 너무 쉽게 사용했던 것이다. 그걸 깨닫고 나는 무척 놀랐다. 하지만 나도 처음부터 그런 말을 썼던 건 아니다. 나는 대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아주 고상하고 우아한 언어를 썼었다. 그런 내 말투가 변하게 된 것은 내 동생의 영향이 컸다. 나는 당시,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떤 주제로, 동생에게 열정적으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 내 말을 한참 듣던 동생이, 한참만에, 가까스로, 겨우 용기를 내어 내게 말했다.
"누나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무슨 말이야? “
”말이 너무 어려워. “
동생의 말은 나를 충격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그 뒤로 나는 내가 사용하던 말투를 버리고, 동생에게 친숙한, 그러니까 비속어를 포함한 거친 어휘를 일부러 골라 썼다. 그러자 동생은 훨씬 나와 대화하길 편해했다. 당시 나는 사람들에게 고 잘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평을 듣곤 했었다. 나는 그 ‘어려움’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가 나의 ‘어려운 말투’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저렴해 보이는(?) 비속어를 쓰면 나도 좀 ‘편한’ 사람이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고 그 결과, 지금의 이 모양(?)이 되어버린고.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비속어를 많이 쓰던 사람이었다. 엄마가 용돈으로 나를 유혹한 덕분에 그 나쁜 버릇을 고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번에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강하지만 불쾌하지 않고, 예의 바르면서도 나약하지 않으며, 간결하면서 오해가 없고, 정확하면서도 부드러운 말. 내 말을, 내 생각을, 내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말투.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면서도, 내 목소리를 잃지 않는 말.
그런 어른의 말을 쓰고 싶다.
이번엔 타인의 시선 때문이 아니다. 이번엔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한 변화.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진짜 나의 목소리로, 진짜 전하고 싶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