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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쏭쏭 Jun 05. 2023

머리를 숏컷으로 잘랐다

실연당한 건 아니라고요.


예전부터 숏컷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미용실에 머리를 하면서 몇 번 용기를 내어 "숏컷하면 어떨까요?"하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아쉽긴 했지만 다들 그렇게 거절하는 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때 숏컷으로 잘랐었는데, 그때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도 같다.


난 보통 긴 머리를 유지했다. 단발로 잘랐다가 다시 긴 머리로 기르고, 너무 길면 다시 단발로 자르는 것을 반복해 왔다. 작년 머리카락 기부를 하면서 짧은 단발로 잘랐고, 어느덧 지금 내 머리는 중단발이 되어 있었다.


올해는 벌써 덥다. 게다가 거북목이 심해진 건지, 어깨를 다쳐서 그런 건지 머리가 너무너무 무거웠다. 지금 머리는 어깨에 닿는 중단발이었는데, 목을 덮는 게 싫어서 거의 묶고 있다. 그런데 묶으면 묶인 머리카락이 너무 무겁고 앞머리가 당기는 느낌이 너무 불편했다.(앞머리를 내지 않고 길렀다.) 잊고 있던 욕망이 불현듯, 솟구쳤다.


숏컷으로 잘라볼까?


하지만 여름옷들은 대부분 원피스다. 원피스에 숏컷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숏컷을 하게 된다면 그에 어울리는 스타일로 옷을 다 사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짧은 머리는 더 손질도 많이 해야 하고(나는 손질하고 이러는 거 너무 싫다) 미용실도 자주 가야 하고(돈 아깝다).... 사실 여름에는 묶는 게 제일 시원하니까...


생각하니까, 숏컷 더 귀찮을 것 같은데?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얼마 전 후배의 결혼식을 다녀왔다. 샤랄라 원피스에 중단발 머리를 곱게 세팅해서 다녀왔다. 그런데 갑자기 너무 답답했다. 짧은 머리를 한 선배가 너무 부러워 보였다. 맥주를 한잔 하고, 알코올이 몸에 번지자 용기라고 하기엔 우스운, 어떤 욕구가 치솟았다.


그래. 자르자!


숏컷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지 10년이 넘었다. 대학생 때부터 잘라보고 싶었는데, 사람들 시선이 두려워 자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다 해봤어야 했다! 학교는 머리 망해도 괜찮지만, 직장은 머리 망한 채로 고객을 볼 수 없으니까!


하지만 술이 깨자, 마음이 흔들렸다. 숏컷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니까 그냥 단발로만 자를까?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숏컷인데?


이렇게 미루기만 하다간 정말 단 한 번도 숏컷을 못할 것 같았다. 아마, 퇴직하고 나서나 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때는 노령층일 텐데.. 노년의 숏컷과 젊을 때의 숏컷은 다르잖아? 난 상콤한(!) 숏컷을 해보고 싶었던 건데! 물론 지금도 상콤하진 않다.


그래! 어차피 머리는 기는 거고,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잘라보자!


결심을 하고 미용실에 전화를 했다. 에전에는 머리를 하러 큰 도시의 유명 미용실을 찾아가기도 했지만 이제 그럴 힘은 없다. 지역에 새로 생겼다는 미용실을 예약했다. 후기가 나쁘지 않았고, 무엇보다 같은 회사 후배가 거기를 다닌다고 했다. 전화를 해서 평을 물어보니 "명예를 걸고 추천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 미용실 인기가 얼마나 좋은지 무려 1주일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이런 건 마음먹었을 때 잘라야 하는데!


미뤄진다니 애가 탔다. 내 갈대 같은 마음은 일주일이면 3만 번은 더 흔들릴 거라고! 고민 끝에 예약을 했다. 다음 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 예약 완료!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마음이 흔들렸다.


괜히 자르기로 했나? 옷 입기 불편할 것 같은데... 게다가 만약 스타일이 안 어울리면 어쩌지? 안 그래도 늙어 보이는데(?) 더 늙어 보이면 어쩌지? 아줌마 같으면 어쩌지? 그냥 숏 단발을 할까? 짧게 자르면 커트만큼 자를 수 있고, 옷 입는데 장애는 없고, 여러모로 '합리적'인 선택인 것 같은데...


그러던 중 날씨가 엄청나게 더운 날이 있었다. 아니 5월에 이렇게 덥다니?! 밥을 먹을 때마다 샤워를 하는(정말 수도꼭지 밑에 머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땀을 쏟아낸다) 직원이 말했다.


"삭발할까?"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의 질문에 심드렁하게 대답하던 나는, 순간, 내 대답에 내가 놀라고 말았다. 그래! 다른 사람들이 삭발을 한다고 해도 상관 안 하잖아? 삭발도 그러려니 하는데? 숏컷이 뭐가 대수라고?!


자르는 거야!


그렇게 토요일이 왔다. 전날 진탕 술을 마셔 숙취에 시달리던 나는 설렘과 두려움 없이, 그냥 하나의 숙제를 마치는 기분으로 미용실을 향했다.(아이고, 머리야) 미용실에는 대학생처럼 어려 보이는 젊은 남자 미용사가 있었다.


나는 최대한 짧게! 를 외쳤고, 그는 내게 보고 온 사진이 있냐고 했다. 나는 캡처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가위질이 시작되었다. 싹둑 싹둑.


나는 내가 숏컷으로 짧게 자르면,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얼굴이 갑자기 확 살아나거나(아싸!) 혹은 아줌마가 되거나(흑흑). 오랫동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인만큼 뭔가 엄청나게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울 속에는 여전히 '내'가 있었다. 그냥 머리가 짧은'나'가 있었다.

아. 머리를 자르는 건 별거 아니구나.


이 별거 아닌 걸 왜 그렇게 오래 고민했을까?


시간이 지나며 점점 머리가 완성되고 있었다.


거울 속 내 모습에서 눈을 땔 수가 없다.


"... 저.."

"?"

"저 지금 너무 시어머니 같지 않아요?"

"... 네?"

"그.. '너 같은 애가 지금 우리 아들을 만난다는 거얏!'하고 달려가는 시어머니요."


내 반응에 미용사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흠. 자기도 공감하는 게 분명하군. 나는 신라 선덕여왕의 왕관을 연상케 하는 머리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용사는 다운펌을 하면 좀 나을 거라며 몸을 바짝 엎드리며 먼저 2만 원을 할인해 주겠다고 말했다. 흠. 역시, 자기가 봐도 망했군.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숏컷을 했다고 카톡을 보냈다. 그러자 다들 인증샷을 보내란다. 하지만 카메라 속 내 얼굴이 너무 적나라하게 늙어서 민망했다. 결국 얼굴을 스티커로 붙이고 친구들에게 보내주니 다들 나쁘지 않다고, 시원해 보인다고 했다.


그래! 내가 원한 건 시원함이었지! 목적 달성을 한 거야! 어차피 머리는 또 길 거고.. 이제 앞으로는 숏컷을 안 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면 좋은 거지 뭐.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볼 때마다 흠칫 놀란다. 낯선 아주머니의 존재 때문이었다. 흠. 어디서 많이 보던 분 같은데? 아. 나군... 그런데 이 숏컷, 아무리 봐도 익숙하다.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다.


보통 요즘 많이 하는 여성들의 숏컷은 연예인 장도연의 숏컷이다. 하지만 나는 앞머리가 있다. 음. 환갑을 넘은 우리 엄마 머리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야. 그런데 엄마는 나보다 머리가 더 짧잖아? 펌도 없고.. 흠. 그럼 이 머리를 어디서 봤지? 나는 오후 내내 끙끙 앓으며 머리 주인을 고민했다. 그 끝에 깨달았다.


내 숏컷은 아모르파티를 부르는 김연자 님의 스타일과 똑 닮아 있었다!!!



이제보니 고길동 느낌도 들고....




출근을 했다.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긍정적이었다.


1. 젊어 보인다

이 말이 가장 긍정적인 말인데, 조금 심란하기도 했다. 그래. 난 이제 젊어 보이는 나이지, 젊은 나이는 아니구나.. 하.. (이렇게 현타를 느낄 줄이야.)


2. 세련되어 보인다

연세가 드신 여자분들 위주로 이런 말을 많이 해주셨다. 연예인 김연자 스타일이라서 그런가


3. 나쁘지 않다/괜찮다

젊은 직원들이 이런 평가를 해주었다. 사실 크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나도 옆의 직원이 삭발을 해도 관심이 없으니....


그리고


4. 모르는 사람도 있다.

진짜 놀랐는데, 정말 말하기 전엔 머리를 잘랐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나와 9개월째 근무하신 분이다.)



나한테는 정말로 엄청난 도전이었던 숏컷. 하지만 남들은 정말 1도 신경 쓰지 않는다. 내 머리니까 이상해보이고 엄격해보이는 것일 뿐! 그러니까 해보고 싶은 게 있으면 해 보자! 남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고, 아무리 망해고 머리는 2주만 지나면 웬만하면 다 괜찮아지니까!




* 머리를 자르고 처음으로 머리를 감았는데... 아, 진짜 신세계였다. 여자분들은 알 테지. 머리를 적시고 샴푸를 손바닥에 올리고 거품을 내고 머리에 올리면, 그다음에 머리카락을 붙잡고 비벼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비빌 게 없다..... 뭔가 해야 하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게 없음ㅋㅋ종료! 진짜 너무 간편하다.



** 머리 말리는 시간도 확실히 줄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일 때는 뻥 안치고 30분 정도 걸렸는데.. 중단발일 때도 10분 정도 걸렸고, 지금은 살짝 신경 써서 말려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에는 더 짧게 잘라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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