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모습
preface
전쟁과 난세의 시기는 '영웅 탄생'을 갈음하고 대중에 부응하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처칠과 샤를 드 골, 롬멜과 맥아더는 이런 시기에 등장한 영웅이지만
영웅을 가장한 미치광이들의 출현도 적지 않았다.
전쟁의 결과는 결국 상호 파괴이다.
도시와 건물이 무너지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된다.
버튼 한방으로 끝나는 핵무기 시대의 도래는
현대 전쟁을 장기 냉전(cold war)화 시켰다.
'오멘'은 이러한 장기 냉전의 분위기 속에 등장한 오컬트영화이다.
유혈 낭자가 등장하지 않고 악마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도 않는다.
어떻게 이런 식의 공포가 가능했을까
오멘은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에서 사용한 '어린 소녀' 메타포의 반댓길을 걷는다.
기존 문학과 미디어에서 묘사된 악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완전히 뒤집는다.
" 우리 사회의 악인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아 "
이러한 메시지는 1970년대에도,
히틀러의 시대에도, 현대에도 관통되고 있다.
본래 오멘에 대한 비평은 6월 호국의 달과 맞물려 작성하려 했다.
전쟁이 예로 들어간 것이 거기에 있다.
게으름 때문에 7월로 미뤄졌고 미뤄진 만큼 평소 글쓰기보다 더한 심혈을 갈아 넣었다.
본 비평은 타인의 칼럼을 참고하지 않았으며
미장센과 몽타주에 대한 분석보다 역사적 문학적 접근 방식을 택했음을 밝힌다.
1장
USA of the 1970's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뒤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종전 이후에는 소련과 쿠바와 엮이며
3차 대전의 위기에도 몰렸지만 케네디 정부는 이를 슬기롭게 극복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나지 않아 대통령이 암살되고
다시 1년 뒤에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이념 전쟁이 도래하니 '월남전'이 그것이었다.
안으로는 전쟁을 반대하는 젊은이들의 히피 문화와
마틴 루터 킹, 말콤 엑스가 도화선을 지핀 흑인 민권운동이 한창이었고
공화당의 반공정책과 워터게이트와 같은 부정에 피로를 느낀 유권자들이 이내 민주당에게 다음 정권을 위임했지만 곧 카터 행정부의 무능력함에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본토가 직접적인 전장은 아니었지만 국제 질서의 첨병으로서 다인종, 다면적 국가로서 미국은
단 한순간도 편할 날이 없는 어수선함의 연속이었다.
1970년 중반을 넘어서자 지리멸렬했던 월남전의 종식과 함께 미국에게도 모처럼의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다.
일본이 거품 경제 시기를 유흥과 사치 거기서 태동한 시티 팝과 애니메이션 같은 대중문화의 향유들로 점철된 호화롭고 낭만적 시절을 보냈다면 미국인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에 까닭 모를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동아시아와 중동, 동유럽 어디에서 터져도 이상할 게 없는 지구의 화약고들과 종전이 되면 또 어디선가 시작되는 전쟁의 레퍼토리는 또 한번 미국인들에게 깊은 피로와 불안함을 느끼게 했다.
이 시기 중동의 친 소련 국가들과도 본격적으로 적대관계에 들어서면서 미국은 평화가 찾아오는 동시에 새로운 냉전시대에 돌입하는 중의적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사진 설명:
왼쪽 1970년대의 뉴욕 월 스트리트, 오른쪽 상단 필립 카우프만의 '외계의 칩입자'의 유명한 장면,
오른쪽 하단 '대부'로 유명한 프랜시스 코폴라의 또 다른 수작 '컨버세이션'의 포스터.
당대 할리우드의 작가들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대중 심리의 기저를 읽어내고 거기에 걸맞은 상업적 작품들을 뽑아냈는데
영화라는 매체가 궁극적으로 '제7의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에는 시대의 상황을 대변할 뿐, 시대가 나아갈 이상향을 제시하지 않는 한계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절의 시대 상황을 절묘하게 반영한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은 외계인이 사회와 이웃, 나아가 내 가족에게까지 잠식해 나간다는 sf 호러 '우주의 칩입자'(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 1978), 대기업 오너와 도청 전문가 사이의 첩보전을 그린 '컨버세이션'(1974, 27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시사(時事) 하지만 정부와 대기업의 눈치를 보며 주요 뉴스를 컨택해 나가는 매스미디어 세계를 일갈한 네트워크(network 1976) 그리고 엑소시스트(1974)와 함께 오컬트 영화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오멘'(1977) 등이 있다.
거론했던 영화들은 당대의 미국인, 나아가 서방의 국민들이 느꼈을 안보 의식과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첩자주의' 심리를 영화 내에 잘 풀어냈다.
다음 장에는 시대의 불안감과 함께 '오멘'이 '영웅 신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은유했는지를 살펴본다.
2장
영웅신화의 역설
본래 왕좌의 자리는 하늘이 점찍어 준 것이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초월적 능력과 비범함을 갖추었기에 일개 백성은
용안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금해야 했다.
몇몇 국가에선 국왕 혹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신의 아들로 둔갑시키거나 신 자체로 여기기도 했다.
몇 천년 동안 사람들은 이러한 '코끼리의 밧줄'과 같은 의식과 관념 속에서 살았다.
왕권 강화나 영웅 세뇌의 효시는 아마도
'건국 신화' 혹은 특정 인물의 '탄생 설화'에 있을 것이다.
'카멜롯'과 '아서왕'의 이야기처럼 결국 건국사와 영웅신화는 함께 읽혀진다.
이것은 당대 민중들이 받아들이기에 굉장히 매혹적인 이야기였을 것이며 동시에 오랫동안 그들의 정신을
사로잡은 강려크한 주술로 작동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게의 레퍼토리는 이러한데
"영웅은 일반적으로 난세에 태어난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하늘이 점찍어 준 존재로
영웅이 태어나기 전 그를 잉태한 모친은 기이한 꿈을 꾸고 하늘에서는 별똥별이 떨어진다.
갓 태어난 아이의 등에는 일곱 개의 점이 나 있으며
어느 나라의 왕은 알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아무도 뽑지 못하는 바위 속 검을 뽑으며
어느 나라의 영웅은 무기가 없을 때 솔방울을 수류탄으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프랑스혁명이 위대한 것은 평범한 민초들이 태양의 왕이자 짐이 곧 국가라고까지 한 거대 왕정의
세뇌와 권모술수에서 벗어나 시민 스스로가 계몽하여 사치스럽고 무능력한 왕정을 끌어내리고
사법적 심판에까지 오르게 한 데에 있다.
비록 또 다른 '전쟁의 신'을 황제로 보위하며
진정한 공화정을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우상 신화를 깨뜨리고 평범한 시민들이 봉기해
국정을 바로 잡았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헌데 왕정과 독재의 시대가 끝이 나고
시민 한 명 한 명이 동등한 주권과 자유의 책임감,
높은 교육을 받고 살아가는 오늘날에도
구세주에 대한 갈망과 '영웅 신화'에 대한 찬가는 사그라들지 않은 듯해 보인다.
특정 정치인에 대해 주권자임을 포기한듯한 일부 유권자들의 광신도적 행위나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이비 교단과 교주들이
우리 사회 저변에 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보면 진정한 탈 우민화는 아직까지도 요원하게만 보인다.
'오멘'은 얼핏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사탄의 재림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들린다.
그러나 해학적으로는 '영웅 설화'를 비판적으로 은유한다.
사탄의 아들 '데미안'은 6월 6일 새벽 6시에 태어난다.
데미안의 머리에는 사탄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징표 한 '표시 흔'이 있다.
이것은 '운명론'으로 아이는 들짐승에게서 태어나는데
이는 단군신화나 로마신화와도 맥을 같이 한다.(데미안이 태어난 곳도 '로마'이다.)
사탄의 아들을 지키려는 '적그리스도인'들은 아이의 존재를 알고 제거하려는 선지자들과 맞서 기꺼이 목숨도 불사한다.
데미안을 죽이려는 선한 자들, 아들을 살리려는 악한 자들.
이 심각한 모순 사이에 놓인 데미안의 아버지는 마치 선악과의 나무 앞에 놓인 아담의 딜레마를 겪는다.
말이 악마의 아들이지 '데미안의 설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웅 신화'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라이언 킹'이나 '매트릭스', '듄'과 같은 현대 영웅 서사 들과도 같은 플롯을 공유한다.
3장
슬래셔 공식을 오컬트로 이식한 하이브리드 무비,
현실로 넘어오는 공포.
데미안을 제거하려는 선한 사람들은 너무도 무기력하게 초자연적 현상으로 인한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서 살인을 하는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그저 허무한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신은 왜 이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일까?"
"저 귀여운 아이가 정말로 사탄의 아들이라고?"
오멘의 근원적 공포는 이 두 물음에 있다.
도무지 전세가 뒤집힐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절망적 상황과
기존의 스테레오 타입을 뒤집는 악인의 모습은
훗날 '데스티네이션'과 '오펀 천사의 비밀'같은 영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오멘의 초 자연적 살해 방식은 결국
'할로윈'과 '13일의 금요일', '나이트 메어'로 대변되는 '슬래셔 장르'의 영화적 공식을 답습하고 있으나
오멘은 이들 영화들보다 선배이기에 정확히는
히치콕의 '사이코(1962)', 마리오 바바의 '죽은 신경의 경련(1971)',
토브 후버의 '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1974)'같은 영화들의 공식을 따랐다는 게 맞을 것이다.
슬래셔 slasher 장르의 승패는 결국 서사의 완성도보다
희생자들을 어떻게 참신한(?) 방식으로 죽이느냐에 달려 있다.
오멘의 방식을 몇 가지 소개하자면
1) 적그리스도인 자체가 데미안을 위해 스스로 재물이 되어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이는 자살을 하면 지옥으로 가기 때문이다.
2) 낙뢰가 피뢰침을 때려 피뢰침의 낙하로 선한 신부가 찔려 사망한다.
3) 사이드 브레이크 오작동으로 인해 내리막길 차량에 치여 목이 잘려 죽기도 하고
4) 호수 얼음 위에서 아이스하키 게임을 하다 얼음이 깨져 안으로 수장되기도 한다.
5) 때로는 적그리스도인 자체가 직접 살인을 하기도 하는 등 오멘은 꽤 괜찮은 살인(?) 아이디어들로 구성되고 있다.
데미안의 아버지는 마침내 선한 사람들에 의해 각성되어지고 자신의 자식이 사탄의 아들임을 받아들이고
죽이려 한다. 허나 다른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처하나 입히지 못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어린 데미안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악마의 자식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순수한 모습을 한 채
대리 부모의 곁에 서 있는데
관객들은 그 낯선 대리부모의 존재를 곧 알게 된다.-무려 미합중국 대통령이다.-
배우는 연기하는 동안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지 않는다 이유는 영화상에서 카메라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불문율을 비웃고 데미안은 렌즈를 정면으로 응시한 채 순수하고도 오싹한 웃음을 내 보인다.
이때 제리 골드스미스의 공포스러운 음악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데미안이 바라보며 웃은 대상은 이 이야기의 진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있는 '당신'이다.
영화는 끝이 나지만 이 재앙이, 이 공포가 끝이 나지 않고 당신의 세계에서 계속되고 있음을 전언한다.
4장
악마의 모습.
오멘은 '데미안의 탄생 설화'인 동시에 악과 싸웠던 그러나 너무도 무기력했던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오멘 시리즈에서 사탄을 숭배하는
적그리스도인 들은 주인공 주변 곳곳에 존재하는데
내 자녀의 교사이기도 하고 보모이기도 하며
회사 동료, 성당의 신부, 심지어 아내마저도
적그리스도로 묘사된다.(오멘 2)
현실의 악마는 우락부락하고 흉포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아
그들은 우리의 삶 곳곳에 숨어 있으며 더 높은 지배층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 '오멘'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만일 사탄의 아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를 알아챌 수 있을까?
또한 사탄과의 싸움에서는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악마가 부리는 '죽음'은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보인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악마는 '죽음'을 작동시키는 데에 일정 기간 힘을 모으는 듯해 보이기도 하고
드물지만 교회와 같은 '성역'이 존재하기도 한다.
피살자의 사진에서는 죽음을 예견할 수 있는 복선이 발견되기도 한다.
오멘 시리즈에서 데미안과 대적하는 선한 사람의 수는 기껏해야 두, 세 명 정도였다.
그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깨닫고
용기를 내어 악에 맞섰다면 시민 혁명이 그러했듯 승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데미안 설화'는 70년대를 지나 2020년대에 와서도
프리 메이슨, 로스 차일드 따위로 일컬어지는 음모론의 연장에 있을 법한 흥미로운 소재이다. 그 신선함과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며 그렇기에 근래에도 꾸준히 리메이크되고 있다.
Written by 임준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