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자유는 누구의 연출 위에 있는가”
편집 디자이너로 일한다는 건 매일 프레임을 다루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설정하고, 어느 장면에 초점을 맞출지 결정한다. 말하자면 세상을 ‘편집’하는 사람이다.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고, 시선을 유도하며, 때로는 의미를 재구성한다.
《진격의 거인》을 보며 나는 처음으로, 프레임 안의 진실과 프레임 밖의 왜곡이 얼마나 쉽게 바뀌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 작품은 애초에 거대한 벽 안에서 시작된다. 벽 밖은 괴물의 세계, 벽 안은 인간의 세계. 누구나 벽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밝혀지는 건, 그 벽은 누군가의 공포로 세운 구획이자, 진실을 가두는 장치였다. 벽을 넘는 순간부터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내가 믿어왔던 건, 누가 편집한 것인가?”
편집 디자이너로서 나는 늘 고민한다. 어떤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울 것인가. 어떤 서사를 강조할 것인가. 그 선택은 누군가에게는 메시지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오해가 된다. 진실이란 언제나 프레임의 안과 밖에서 달라진다. 그래서 《진격의 거인》의 메시지는 단순히 극중 인물의 고뇌가 아니라, 디자이너로서의 내 고민과 맞닿아 있다.
에렌이라는 인물은 자유를 외친다. 하지만 그 자유는 수많은 오해와 비극, 폭력 위에 서 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되도록 선택받았던 거야.” 자유라는 이름의 결정이 실은 철저히 연출된 것이었다는 역설. 이 부분은 일종의 철학적 기시감으로 다가온다.
디자인도 그렇다. 겉보기엔 자유롭게 구성된 화면 같지만, 사실 그 안에는 수많은 선택과 배제의 결과가 있다. 소비자는 결과만을 본다. 하지만 그 ‘보이는 것’이 생겨나기까지, 어떤 이미지가 잘려나갔는지, 어떤 텍스트가 보류됐는지, 어떤 분위기가 강조됐는지—그 모든 것은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침묵의 서사’다.
《진격의 거인》은 그 ‘침묵’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국가, 기억, 교육, 언론, 전통—all of them are curated. 어느 시점부터 우리는 진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 이미지와 서사를 믿게 된다. 그게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에렌이 ‘악당’이 되는 과정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프레임을 깨지 않으면, 결국 누군가의 편집물 속에서 살게 되는구나."
그가 택한 방식이 옳았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겠지만, 최소한 그는 질문을 던진다.
“말하는 자유는 누구의 희생 위에 있지?”
나는 종종 클라이언트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이건 좀 더 감성적으로 보여야 해요.”
“이 부분은 빼주세요, 오해할 수 있어요.”
“조금 더 서정적으로 꾸며보죠.”
그 순간마다 느낀다. 진실보단 보이기 좋은 서사가 우선이라는 걸. 하지만 그 선택이 반복되면, 결국 사람들은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게 된다. 편집된 감정, 편집된 이미지, 편집된 기억.
《진격의 거인》이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편집 구조를 그대로 투영하기 때문이다.
‘벽’은 늘 물리적 장치가 아니라 심리적 경계이며, ‘거인’은 언제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태어난다. 인간은 늘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고, 그 적을 증오하면서 정체성을 유지하려 한다. 그 프레임 속에서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거인이 된다.
나는 디자인을 통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가끔은 진실을 흐리게도 만든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질문한다.
“이 이미지의 바깥에는 어떤 진실이 있었을까?”
“이 프레임의 이면에는 누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다시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본다.
《진격의 거인》은 끝에서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선택한 자유는 누구의 서사 위에 놓여 있었는가?”
디자인이라는 프레임을 다루는 나에게, 그건 단지 픽션 속 대사가 아니었다.
그건 지금 내가 조율하고 있는 이미지 속에서, 매일 마주하는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