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영화에는 일종의 문장이 있다. 말보다는 장면이 먼저 쓰여 있고, 그 문장은 늘 우리 사회의 '어딘가'를 향해 조심스럽고도 단호하게 손을 뻗는다. <괴물>의 강두가 한강변에서 벌어진 비극의 한복판에 던져졌을 때, <기생충>의 가족이 계단 아래와 위를 오가며 겪은 모욕의 순간처럼, 그의 인물들은 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운명 속에 놓인다. 그리고 그 운명은 대부분, 구조적인 불평등과 얽혀 있다. <미키17>도 마찬가지다. 복제 인간이라는 과학적 상상력의 틀 안에서, 봉준호는 다시금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익스펜더블'이라는 존재는 이름부터 설명적이다. "소모 가능한" 인간. 이 설정 하나로 <미키17>은 자본주의와 생명 윤리에 대한 양손의 추를 동시에 쥔다. 미키는 우주 개척단의 일원으로 선택되지만, 그 이유는 단 하나다. 위험한 상황에 투입되었다가 죽고, 다시 출력되어 또다시 투입되는, 반복 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복제한다는 과학 기술의 최전선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가장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미키는 실질적으로 죽지 않기에, 그의 죽음은 아무 의미도 없고, 그렇기에 그의 삶도 무의미해진다. 여기에 봉준호는 냉소를 더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도, 살아간다는 건 뭘까?"
<기생충>에서처럼 계급의 사다리를 시각화하던 봉준호는, 이번에는 복제인간과 원본, 인간과 외계 생명체, 권력과 저항이라는 삼중 구조 속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미키 17과 미키 18이 한 행성에 존재하게 되면서 생기는 자아의 분열은, 단지 과학적 상상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질문이다. 둘 중 누가 진짜인가? 둘 다 같은 기억을 갖고 있다면, 한 쪽을 없애야만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인간은 대체 가능한가? <미키17>은 이 질문들을 급하게 답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그것들이 관객의 마음속에서 머무르도록 배치한다.
영화의 미장센과 카메라 워크도 인물의 혼란을 시각화한다.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 반사된 거울 속의 두 미키, 흐릿한 초점 전환은 현실과 복제를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괴물>에서 사용된 롱테이크의 감정 밀도와 <옥자>의 기괴한 생명체 묘사가 적절히 결합된 이 스타일은, <미키17>이라는 하이테크 세계 안에서도 봉준호 특유의 생생함을 유지하게 한다. SF임에도 불구하고 장면 하나하나에 손때 묻은 듯한 질감이 느껴지는 건 이 때문이다.
또한 <미키17>은 전형적인 헐리우드 SF 문법에서 비껴서 있다. 외계 생명체인 '크리퍼'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보다 오히려 더 이성적이며 생태적으로 정합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인간이 그들을 연구하고, 분해하고, 자원으로 활용하려는 과정 속에서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고개를 든다. <괴물>에서 한강의 정체불명 괴물은 미군의 포르말린 방류에서 시작됐고, <미키17>의 외계괴수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경고처럼 등장한다. 봉준호는 꾸준히 말한다. 괴물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고.
특히 인상적인 대사는 "우리가 원하는 건 새로운 세상이 아니라, 더 맛있는 소스일지도 몰라"라는 대사다.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자원을 착취하고, 미지의 생명체를 함부로 규정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면서도 실은 더 강한 욕망과 자극을 좇는 인간의 민낯을 드러낸다. <기생충>에서 박사장의 집에서 맡게 되는 '냄새'처럼, 미키들이 겪는 비인간적 처우는 시각이나 논리로 표현되지 않는 감각으로 다가온다. 결국 인간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인간이 인간을 대상화하고, 복제하고, 재활용하는 세계. 이것은 그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여기의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로버트 패틴슨은 복제인간 미키들을 분명히 구분해낸다. 같은 얼굴, 같은 기억을 지녔지만 다른 태도와 눈빛, 말투로 미세한 결을 만든다. 이중연기는 과잉되지 않고 절제되어 있어서 더욱 인상 깊다. 이는 <마더>에서 김혜자가 보여준 일그러진 모성의 감정폭과도 닿아 있다. 봉준호는 배우의 얼굴을 믿고, 감정을 길게 끌고 간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간의 가장 밑바닥 감정을 끌어올린다. 미키의 슬픔, 미키의 분노, 미키의 혼란은 결국 우리 모두의 것일지도 모른다.
<미키17>은 완성도 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원작 소설에서 부각됐던 생존 경쟁의 긴박함이나 자원 부족의 절박함이 다소 느슨해졌고, 일부 장면에서는 에너지가 분산되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봉준호의 의도는 거기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SF 블록버스터를 만들면서도, 인간의 실존을 묻는 느린 질문을 던지기를 택했다. 그의 영화는 늘 그러했다. 오락이지만 불편하고, 아름답지만 불안하며,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진실하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괴물>의 시대에 머물러 있지 않다. 거대한 괴물은 이제 무겁지도 거칠지도 않다. 그것은 정제되어 있고, 시스템 안에 존재하며, '복제 가능'하다. <미키17>은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의 새로운 괴물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는 그 괴물을 여전히, 아주 조심스럽고도 정교하게, 우리 앞에 내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