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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무석 Dec 03. 2021

세무사가 임대업을 해보았다

01_멋모르고 오피스텔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렸다

30살에 세무사에 합격하고, 합격 다음 해에 바로 개업을 했다.

멋모르고 뛰어든 건 좋았지만, 초기에는 아무래도 수입이 시원찮았다. 하지만 수험생활 10년 동안 군것질하지 않고 아껴 쓰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랬는지 부족한 줄 모르고 잘 지냈다. 그러다가 나름 욕심이랄까 임대업에 대한 관심이 생긴 건 사무실을 마곡으로 옮기고 나서부터였다. 


당시 마포에 있던 사무실은 공유 사무실이었고, 단독 사무실 공간이 필요해서 이곳저곳 알아보다가 마음에 든 곳이 마곡이었다. 마곡에는 LG R&D센터가 크게 들어와 있고, 마곡역 근처에 강서세무서가 있었다. 마곡역에서 발산역에 이르기까지 사무실 빌딩이 빽빽이 올라와 있어서 업무 단지는 강남 못지않다고 내심 생각했다. 거의 새로 올라온 건물들이어서 깔끔하고 주차도 편했다. 마곡은 그 당시만 해도 공실이 많았다. 부동산에 알아보면 여기저기서 렌트프리를 넣어준다며 물건을 소개하기에 바빴다(물론 지금은 렌트프리는 고사하고 월세가 많이 올랐다). 


그렇게 알아본 곳이 마곡역 앞 오피스텔이었고, 나는 내 공간을 만든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하고 있던 차였다. 마곡역 앞 오피스텔에 자리를 잡고 시간이 날 때마다 주변 도로를 걸어 다니며 동네 구경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당시 마곡은 공실이 많았지만 건물 2~3층은 상가나 주택 분양 홍보에 적극적인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더니 그 많은 양도나 증여 신고를 해주고도 내가 상가를 가질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터였다. 당장 큰돈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런 건 자리를 잡고 나서 하는 중후한 중년의 투자처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편견도 더해진 결과였다. 하지만 출퇴근길에 광고를 매일 보고 있자니 사람 마음이 혹하기 마련이라, 한 번 구경이나 해보자 하는 의문에 시간을 내서 홍보관에 들렀다.


내가 들렀던 홍보관은 주거용 오피스텔 매물이었다. 모델하우스니 만큼 깔끔하고 멋졌다. 멋지게 보인 데는 원룸이긴 하지만 침실 공간을 별도로 분리해둔 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닫이문이 아닌 미닫이문이었고 문이라기보다 가림막에 가까운 형태였다. 물론 1.5룸이 아닌 원룸이기 때문에 단순히 자는 공간을 억지로 분리해 놓은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멋져 보였던 것은 내가 20대를 통틀어 살아온 주거 형태에 대한 고민 덕분이었다.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로 오게 되었고 첫 주거지는 한남동의 고시원이었다. 누운 자리에서 발을 올리면 책상이 닫는 딱 그만한 고시원. 그리고 군대를 갔고, 두 번째는 외삼촌이 이사를 가던 와중에 비어있던 용인 아파트였다. 세 번째는 학교 근처 수지구의 반지하 방이었고, 그다음은 신촌의 옥탑방이었다. 그리고 학교 앞 도시형 생활주택 오피스텔과 다시 신촌 언덕의 다가구주택 등을 전전하였다. 아파트는 혼자 있기에는 너무 컸고, 반지하나 옥탑방은 장점과 단점이 너무 극적이었다. 그걸 제외하고 나면 오피스텔에 있던 때가 생활하기가 가장 좋았다.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짐을 옮기기에도 좋았고, 보안이나 택배 등 잡스러운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비교해 보면 당시 모델하우스에 있던 오피스텔은 1인 가구라면 최적의 집이었다. 둘러보면서 ‘요즘엔 정말 잘 뽑혀 나오는구나.’ 싶었다. 그저 그렇게 좋은 구경으로 끝난 듯 집으로 돌아왔지만, 눈앞에서 그 오피스텔이 자꾸만 맴돌았다. 막상 살 돈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사고 싶었다. 게다가 당시 홍보 문구가 10년 임대 보장이었던 터라 마음이 더욱 혹한 터였다. 서울 집이야 이제 사업을 시작한 입장에서 쳐다보기도 힘든 대상이었지만, 작은 오피스텔 하나 정도는 빠듯해도 살만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게다가 하는 일이 세금 신고해 주는 일이니 내가 직접 해보면 임대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오피스텔 계약을 부추기는 요소 중 하나였다. 다른 사람의 검토서를 써줄 때는 임대 사업에 고려해야 할 요소라던가 세법의 개정 추이라던가 이것저것 분석해 주다가도 내가 매매를 판단할 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 일주일을 고민하다가 돌아서서 보니 나는 모델하우스에서 계약서를 쓰고 사은품으로 청소기를 받아 나오고 있었다. 이때가 2019년 6월 17일이었다.     


ps. 지금도 청소기는 신혼 용품으로 잘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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