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선택한 아이

-고민의 시작1-

by 휘리

수능 전날,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은 아이들의 긴장감과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의 혼란으로 조용하지만 어수선함이 감돈다. 아이들은 조용히 수험표를 받아 자기 자리에 앉는다.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담임인 나도 긴장감이 온몸을 감돌고, 안쓰러운 마음에 아이들과 눈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에게 장황하게 말을 하기보다 실수하지 말고 컨디션 조절 잘하라는 당부의 말만 한다.


아이들이 다 돌아간 텅 빈 교실은 조용할 틈이 없다. 더불어 아이들이 짠하고 안쓰러운 나의 마음도 지속될 수 없다. 수능 고사장인 학교는 1, 2학년 학생들을 지원받아 고사장 형태로 교실을 탈바꿈해야 한다. 이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담임교사가 아닌 수능 감독관이 돼야 한다. 수능 감독관 회의 전에 교실을 고사장으로 만들고 고사 본부 담당자에게 확인을 받아야 한다.

1, 2학년 학생들과 바쁘게 교실 청소를 하는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다.

“선생님, ○○가 다쳤어요. 지금 119에 신고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순간 나의 뇌는 정지가 돼 버렸다. 익숙한 아이의 목소리인데, 분명 우리나라 말인데 나의 뇌는 아이의 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응? ○○가 왜 다쳐? 무슨 일이야?”

“저랑 길 가다가 갑자기 떨어지는 사람과 부딪혔어요. 저는 괜찮은데 ○○랑 ○○가 그 사람과 부딪혀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119에 신고했으니까 네가 옆에서 잘 있어 줘. 선생님이 바로 갈게.”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옆 반 담임 선생님이 부리나케 교실로 들어온다.

“연락받으셨어요? 지금 바로 교무실로 내려오세요.”

교무실로 내려가는 사이 다시 반 아이에게 전화가 온다.

“선생님, 구급대가 와서 ○병원으로 간대요.”

“응 알았어. 선생님이 ○○ 부모님과 통화하고 바로 병원으로 갈게.”

학교 관리자는 옆 반 담임 선생님에게 상황 보고를 받고 우리를 병원으로 보낸다. 다친 아이의 부모님에게 우선 통화로 상황을 설명하고 아이가 간 병원을 알려준다.


떨리는 손으로 운전해서 ○병원 응급실로 간다. 응급실에는 모두 위급한 사람들이다. 그중에도 유독 부산한 무리로 가니 그 침대에 반 아이가 누워있다. 하얗게 질린 아이의 찡그린 얼굴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야, 많이 아파?”

옆에 있던 의사 선생님이 누구냐고 묻는다. 담임교사라고 말하니 부모님이 오면 함께 설명한다고 한다.

“○○야, 선생님 옆에 있을 테니까 힘들면 바로 얘기해. 알았지?”

아이는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인다.

다친 아이를 돌보느라 함께 병원에 온 반 아이를 안심시킨다. 다친 아이만큼은 아니어도 이 아이도 많이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그런 아이를 집으로 돌려보내는데 아이는 친구에 대한 걱정으로 쉽게 발을 떼지 못한다. 그래도 내일 수능을 봐야 하는 아이이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는 말로 서둘러 집으로 돌려보낸다. 눈은 다친 아이를 보면서 집으로 간 아이의 부모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설명한다.


통화를 하는데 다친 아이가 있는 응급실 밖 대각선 현관에 경찰과 형사가 보인다. 통화를 끊고 그들이 있는 곳에 다가가 자세히 살피니 그쪽에 위중 환자가 있는 응급실이 있다. 형사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등학교 교사인가요?”

“아니요. 저는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다친 아이가 다니는 학교예요.”

“아, 그러시군요. 아직 조사 중입니다. 피해 학생의 부모님은 오셨나요?”

“곧 오실 겁니다.”

“가해 학생의 부모나 ○○고등학교에서 사람이 오면 합의 등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네.”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린 아이는 ○○고등학교인가 보다.

형사가 어딘가로 전화를 한다.

“○○고등학교죠? 형사인데 병원에 아직 아무도 안 오셨나요?”

상대방에서 뭐라고 했는지 형사가 별말 없이 통화를 종료한다.

빌딩에서 떨어진 아이는 지금 위중한 상태라고 형사가 나에게 말한 후 바로 옆에 있는 경찰에게 뭐라고 말하면서 현관 밖으로 나간다.


그러는 사이 다친 반 아이의 부모가 병원에 왔다. 엄마의 얼굴에서 얼마나 놀라고 걱정했는지 말을 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함께 의사에게 아이의 상태를 듣는다. 다친 반 아이는 약간의 뇌진탕 증상이 보여 수액을 다 맞은 후 뇌 CT, MRI 검사 등을 해야 한다고 한다. 나는 다친 반 아이 부모에게 양해를 구하고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응급실 한쪽에서 학교에 상황을 보고한다. 다친 아이가 내일 수능을 봐야 할 학교에 연락해서 보건실에서 응시할 수 있는 조치를 학교에서 취할 수 있도록 연락하는 등의 일들을 처리한다. 그러는 사이 아이가 수액을 다 맞아간다.


“○○야, 아이고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옥상에서 뛰어내린 학생의 할머니인가 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위중환자실 문을 잡고 바닥으로 울부짖으면서 무너진다.

“아이고, 내 새끼야, 이게 무슨 일이냐. 왜 아이고...”

할머니의 울부짖음에 옆에 남자가 할머니를 부축한다.

○○. 그 아이의 이름인가 보다.

할머니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차가운 응급실 바닥을 붙잡고 아이의 이름만 부른다. 그 순간만은 위급한 응급실의 어수선함이 사라지고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 듯 조용하기만 하다. 남자가 눈물을 훔치며 할머니를 겨우 부축해서 다른 곳으로 사라진다. 사라진 그곳에서 형사가 우리에게 다가온다.

“다친 학생의 어머니이신가요?”

형사가 다친 반 아이 엄마에게 말을 건다.

“.. 네...”

“형사 ○○○입니다. 합의 절차는”

“아닙니다. 우리 아이는 많이 다치지 않아서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 밖으로 사라진다.

“○○야, ○○야, 이게 웬 날벼락이야.”

이번엔 엄마인가 보다.

밖에서 여러 번 소란스러움이 반복된다.


다친 반 아이가 수액을 다 맞고 검사하러 엄마와 자리를 비운 사이 위중 환자실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진한 갈색의 관을 밀고 응급실 밖으로 나온다. 울부짖던 할머니와 엄마가 그 관을 부여잡고 안타깝게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따른다.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린 아이는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났나 보다.

이름만 아는 아이의 죽음 앞에서 아이의 아픔이 전해지는 것 같아 먹먹하기만 하다. 그 먹먹함 때문인지 수능 전날 날벼락을 맞은 반 아이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기가 쉽지 않다.


다친 반 아이는 다행히 검사 결과 이상이 없어 저녁 6시가 넘어서 퇴원을 한다. 다친 반 아이의 부모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우리는 병원 응급실을 나온다. 그렇게 병원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데 내 귓가에는 ○○ 이름이 계속 맴돈다. 하루 종일 굶었는데도 밥을 먹을 수가 없다.


수능 전날 벌어진 사고여서 그런지 벌써 기사화되었다.

아이의 안타까운 죽음보다 수능에 초점을 맞춘 기사의 제목들......

자극적인 제목과 더불어 사람의 목숨보다 수능 전날 날벼락 맞은 아이의 억울한 사연이 앞서면서 기사 댓글도 요동친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댓글도 있지만 그 보다 더 많은 비난하는 댓글을 보면서 난 허망함과 얼굴도 모르는 죽은 아이로 인해 마음이 한없이 아프다.

나도 아이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아이의 죽음 앞에 무너져 내린 가족의 울부짖음을 보지 않았다면, 아이의 절규 어린 이름을 듣지 못했다면 저 댓글처럼 수능이 사람의 목숨보다 앞선 마음이 들었을까?


죽은 아이는 이 지역 학생이 아이였단다. 다른 구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아침에 등교하지 않고 이곳에 왔단다.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다고 집에서 멀쩡하게 나왔던 아이는 학교로 향하지 않고 빌딩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가족은 아이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 전혀 짐작을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이의 죽음에 무너져 내렸으리라. 아이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에서도 힘듦을 얘기하지 못했나 보다. 자신의 죽음 앞에 이렇게 무너져내리는 가족을 보았다면 아이는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수능 당일은 다행히 아무 문제 없이 무사히 흘러갔다.

다친 반 아이는 평소 자신의 성적보다 낮은 수능 성적을 받고, 재수를 선택했다.


난 한동안 죽은 아이 생각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생각만 많아졌다. 그런 심란한 마음 때문인지 중학생인 아이에게

“지금 너의 생활은 어때? 너의 생활에 만족스러워?”

생뚱맞게 질문한다. 아이는 의아해하면서도 사고에 대해 알고 있어서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대체로 만족스러워. 근데 스트레스받는 게 있어.”

“그게 뭔데?”

“수학 학원. 한 번 가면 4-5시간 꼼짝없이 잡혀 있어야 하잖아.”

그래. 수학 학원 가는 날은 아이가 짜증을 부리고 말이 거칠어졌다.

“수학 학원 다니고 싶지 않아?”

“당연하지. 수학 학원만 그만두면 넘 행복할 것 같아.”

“그래. 그럼 그만 다니자.”

난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말에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아 그날로 수학 학원을 끊었다.

아이의 행복하지 않다는 말에 겁이 났나 보다.


자식 일에 고민 없이 후회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점점 행복하지 않고 자존감이 떨어지고 있다. 성적이 좋은 아이도 성적이 떨어질까 조바심 내고, 성적이 안 좋은 아이는 꿈을 꿀 수 없을 정도로 자존감이 떨어져 있다.

‘공부하는 힘겨움은 잠시지만 학벌은 영원하다.’라는 말이 드라마 대사에 버젓이 나올 정도로 학벌이 최고인 세상이 되었다. 대학은 인생에서 행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 있지만, 인생의 최종 목표일 수는 없는데 대학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버린 시대이다.

‘실패하지 않은 것은 도전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은데, 실패를 통해 더 멀리,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는데 실패를 패배자로 각인시키면서 실패를 두려워하는 아이로 만들고 있다.

아이를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게 하지 말고, 실패할지라도 도전하는 아이로, 실패한 아이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어른이,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이후에도 뉴스를 보면 아이들이 다양한 이유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기사를 접한다. 어떤 부모도 아이가 그런 선택을 할 것이라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아이가 그렇게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부모도 아이가 그런 선택을 하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이의 성적 외에도 아이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부모, 어른이 되길 소망한다. 더 이상 어떤 아이도 아무에게 자신의 힘듦을 말하지 않고 혼자 쓸쓸하게 죽음을 선택하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