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10만원씩, 윗사람으로서 역할?
올 설에는 서열상 나의 아래에 있는 친척(나의 친가쪽만)들에게 모두 10만원씩 복돈을 보냈다.
(그 중 더 맘이 가는 -대학원 공부 중이거나, 이제 알콩달콩 사랑을 키우는 조카들에겐 특별히 20만원씩.)결혼한 딸과 사위에게도 액수가 조금 부끄럽지만 그냥 10만원으로 통일했다. 나이 50이 넘은 동생들에게도, 나보다 한 살 많은 제부에게도 보냈다. 제부는 내가 보낸 액수에 배를 얹어 나에게 보내 왔지만, 아직 수락하지 않았다. '윗사람으로서 역할 찾기' 라는 나의 숭고한 뜻을 저버리고 싶지 않다.
뿌듯함이 밀려왔다. 프리랜서에게 명절연휴가 있는 2월은 쉬는 달이자 매우 아쉬운 달이다. 명절 보너스에 정근수당까지 받던 그 시절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맘 먹은대로 질러버렸다. 내가 먼저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각자의 상황과 형편에 맞는 응원과 격려의 문구를 보내면서 송금까지 한번에 해버렸다.
늘 나보다 통이 크고 베풀기에 진심인 여동생은 의아한 목소리로 '이게 뭐냐?'고 묻는다. 내가 '윗사람이잖아. 그 역할을 해 보려고'라고 준비된 대답을 했다. 상대방의 기분이나 감정보다 하고 싶은 말이 먼저인 동생은 '아이고~~~'한다. 아마, 언제부터?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숨겨진 말과 뜻을 짐작하지만 괜찮다. 지난날의 부족한 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명절에 남들처럼 음식장만이나 손님 접대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늘 피곤하고 불편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뭔가를 해야한다'는 부담이 컸던 것 같다. 어디까지 얼마나? 라는 고민도 한몫했다. 그렇다고 이제껏 인색하게 굴었던 이모고모는 아니었지만, 그 형식들이 귀찮았었다. 내 아이들이 받는 용돈에 대해서도 그 금액 이상으로 캐쉬 백 해야하는 과정이었다. 이후 뒷따르는 '덜 받고 더 주고, 더 받고 덜 주고'의 셈 또한 싫었다.
요즘은 구조를 정하는 것에 대해 적극적이다. 가끔씩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아주 미세한 감정에 대해서도 '이름 붙이기→ 알아차리기→ 수용하기'라는 과정을 구조화함으로써 내가 나를 더 알고 이해하게 된다. 온전히 내 안에서 '나'를 주체로 한 알아차림의 시간이다. 더 사랑하려면 더 알아야 한다. 내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은 나에 대한 이해와 수용을 전제하여 내적 충만함을 가져다준다. 누군가를 끼어넣거나 사건 안에서 파헤치는 동안은 얻을 수 없는 귀한 깨달음이다.
내가 피곤함을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구조화하려고 한다. 그저 그렇게 지내던 사람과 예기치 않은 이벤트로 갈등을 겪게된 최근의 사건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느끼는 서운함은 뭘까? 내가 그에게 기대한 것이 있었구나. 그는 나와 다른 생각과 판단을 하는 사람이구나. 그 또한 나름의 방식이구나...를 알아가면서 표면으로 드러날 뻔한 미움은 자취를 감춘다. 아직 그를 대하던 예전의 눈빛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명절, 특히 #세뱃돈이라는 명제가 붙어있는 설날에 내가 해야 할 부담에 대해 '모두에게 복돈 보내기. 나에게(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든 공평하게 먼저 연락하기'라는 큰 틀을 정해놓았다. 이번 달 수입이 얼마인지를 잊고, 내 다짐을 쿨하게 실천한 지금.....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내년엔 금액을 상향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왠지 우주가 나를 도울 것 같은 이 희망찬 기운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