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명성에 짓눌릴 이유는 없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어둠을 찢고 울려 퍼졌다. 트랜스포머의 'I Rise, You Fall'. 정진규가 직접 만든 알람이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터져 나오자마자, 진규는 눈을 번쩍 떴다.
‘놀래라. 맨날 들어도 맨날 적응이 안돼. 알람으론 딱.’
이명이 ‘찡—’ 하고 귓속을 때렸다. 그의 하루는 늘 전쟁처럼 시작됐다. 머리가 깨질 듯했지만, 다시 눕는 건 더 괴로운 일이었다.
‘하나, 둘, 셋… 열. 일어나자. 남자는 열까지 세면 뭐든 일어나야 돼.’
몸을 뒤척이다가, 문득 팬티 속의 부풀어 오른 현실이 느껴졌다.
‘불쌍한 놈. 그래도 참 끈질기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화장실로 터벅터벅 걸어가 샤워기 물을 정수리에 쏟았다.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졌고 힘겹게 정신을 붙잡으려는 그 순간, 하얗게 번쩍이는 기억 한 줄기.
‘메모!’
진규는 벌떡 일어섰다.
‘그거 없으면, 끝장인데.’
목덜미를 지나 다 늘어진 러닝셔츠 속으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대충 털고 나와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바닥은 깨끗했다. 옷이 아무 데나 내던져져 있지 않았다.
‘만취는 아니었네. 다행.’
그의 시선이 옷걸이에 멈췄다. 쟈켓. 바지. 주머니를 뒤져도, 없었다.
순간, 술자리의 한 장면이 스쳤다. 신한경제 박우재 기자가 술 마시다 말고 티슈 한 장에 뭔가를 적던 손. 그리고 그걸 받아서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던 장면. 진규는 다용도실로 달려갔다. 거기, 핑크색 와이셔츠가 고이 접혀 있었다.
‘이놈, 여기 있었구나.’
셔츠 앞주머니에서 접힌 메모를 꺼냈다. 펜 자국이 눌려 있는, 희미한 글씨. ‘한국기공 3XX-15X7 김성운 상무.’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 술 먹어도 어디 흘리고 다니진 않아.’
다이어리와 휴대폰에 번호를 옮겨 적었다. 팬티 차림 그대로. 그제야 속이 타들어 오는 게 느껴졌다. 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몸이 자꾸 앞으로 쏠리며, 머리가 멍했다. 그때, 머릿속에 들려오는 목소리.
“선배, 요즘도 그 지랄 맞은 인간은 계속 그래요?”
“갈수록 더하지. 어휴, 인간이 어쩜 그런지.”
박우재의 웃음이 스쳐갔다. 얼마 전 고민고민 하던 진규가 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속을 털어놨다. 딱 한 사람 박우재 기자에게만. 늘 기자들 고민만 해결하던 진규였기에 박우재도 흘려듣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 그 답이 돌아왔다. 술 한잔 사이에 오간 말들, 그 속에 길이 있었다.
“아껴둔 출입처예요. 돈 많고 사람 괜찮은 회사.”
“어디?”
“한국기공. 김성운 상무님이라고, 진짜 사람 좋아요.”
진규는 그때도 웃었다. 지방대 동문 하나 덕에, 오랜만에 제대로 된 줄을 잡은 느낌이었다.
“한국기공이라… 작년에 유럽 회사 하나 삼키려고 거금 쏟아부은 데잖아. 몇 조 썼다고.”
“선배도 아시네요?”
“이 바닥 짬밥이 몇 년인데. 냄새만 맡아도 돌아가는 거 보여.”
“역시 에이스세요. 거긴 언론 신경도 안 써요. 돈이 워낙 많거든요.”
박우재는 자신만만하게 잔을 부딪쳤다.
“김 상무님이 기획 하다가 요즘 경영지원까지 다 맡아서, 홍보라인이 급해요. 그래서 진짜 ‘선수’ 찾아달라 하시더라고요. 제 결론은 선배예요.”
진규는 잠시 잔을 돌리다, 씩 웃었다.
“좋네. 오랜만에 좋은 냄새나는데?”
“딱 형님 스타일이에요. 보수적이지만 깔끔해요. 결정은 한 방이야.”
“좋아. 그럼 그 한 방, 내가 제대로 터뜨려주지.”
두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짤랑— 하는 소리가 새벽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진규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오케이, 김성운 상무님. 오늘부터 당신이 내 새 미션이야.’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그의 휴대폰에서 다시 요란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출근도 하기 전부터 전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기업사냥꾼의 최일선에서는 일단 방어하고 숨기는 게 일이었다. 형체와 냄새마저 가린 맹수처럼. 그래야 결정적일 때 한 방 제대로 쏘는 법이었다.
“예. 경영지원실 김성운 상무입니다.”
두 번째 신호가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목소리. 낮고 묵직했다. 한 번쯤 지휘봉을 잡아본 사람의 톤이었다.
“상무님, 안녕하세요. 저는 현성그룹 홍보팀장 정진규입니다. 신한경제 박우재 기자가 알려줘서 연락드렸습니다.”
“아, 정 팀장님. 박 기자가 그러더군요. 완전 강추라던데요?”
진규는 웃었다. 하지만 입술 끝이 조금 떨렸다.
‘추천이라 … 어떤 의미의 강추일까.’
도움이 될 사람이라는 뜻일까, 조심해야 할 사람이라는 뜻일까.
“차 한잔 합시다. 얘기 나눌 게 있을 것 같네요.”
김성운의 말에 진규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며칠 뒤, 한국기공 근처 카페.
진규는 약속 시간보다 15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광화문의 반짝이는 카페들이 아닌, 오래된 회색 빌딩 사이의 허름한 곳. ‘가까운 데로 오시죠’라는 김성운의 한마디가 머리에서 맴돌았다. 가까운 데, 말은 부드러웠지만, 누가 위인지 알려주는 말투였다. 들어오기 전에 담배를 한 대 피우며 긴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었어도, 손끝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딸랑.”
그때, 낡은 문 위의 종이 울렸다. 희끗한 머리, 짙은색 양복, 금테 안경. 작지만, 방 안의 공기를 바꾸는 존재감. 진규는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상무님이시죠? 정진규입니다.”
“먼저 왔군요. 우리 회사 근처라 불편하진 않았나요?”
김성운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단단했다. 마치 상대의 긴장을 즐기는 사람의 여유가 있었다.
“홍보, 쉽지 않으시죠?”
“네. 기획도, 인사도, 총무도 해봤는데 … 홍보만큼 사람을 흔드는 일이 없더군요.”
“그래도 기자들이 가만두질 않을 텐데요.”
“그럴 만큼 저희가 아직 뜨겁진 않습니다.”
대화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목젖에 걸려있던 그 말은 하지 않았다. 한 시간 넘게 함께 했지만, 진규는 그게 입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그러다 다시 꿀꺽 삼켰다.
‘혹시 … 사람이 필요….?‘
그는 끝내 꺼내지 못했다. 김성운 역시 굳이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다 아는 사람처럼.
한국기공. 한때 세상과 철저히 단절했던 회사. 홍보, 광고, 마케팅도 외부로 향하는 모든 문을 닫았던 이름. 그리고 이제, 다시 문을 열려는 중이었다. 언론이 ‘재계의 돈주머니’라 부르던 그들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하고 있었다.
“요즘 언론이 관심이 많던데요?”
“뭐, 관심은 공기 같은 거죠. 있어도 불편하고, 없으면 죽겠고.”
김성운의 말에 진규는 웃었지만, 그 웃음엔 질투가 섞였다. 한국기공은 몇 조원의 자금도 자기 주머니에서 바로 꺼내 쓰는 회사였다. 그에 비해 현성그룹은 작은 뉴스 하나에도 숨을 한참 고르는 회사였다.
‘부럽다.’
진규는 문득 생각했다. 짧게, 솔직하게. 첫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누구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고, 그래서 뱉은 말보다 더 많은 말을 삼키기만 했던 만남이었다.
열흘쯤 지났을 때. 잊고 있었다. 정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6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