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명성에 짓눌릴 이유는 없다.
대체, 언 놈의 세상에 있는 기본인 거야?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김성운 상무였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요.”
“허허, 얘기 안 해도 알아요. 기사 보니까 정신없겠던데.”
“보셨군요. 아, 말씀 편하게 하세요. 새까만 후배인데요.”
“그건 나중에 하고 … 모레 점심, 어때요?”
짧은 통화, 짧은 제안. 그 한마디에 진규의 가슴이 살짝 떨렸다. 기대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인간이 어디 그렇게 단단하던가? 진규는 통화를 하면서 두어 달 치 약속이 빼곡한 다이어리를 재빨리 확인했다.
‘목요일 점심이라, 다행히 황 기자는 순둥이라. 다음 주로.’
진규는 약속을 풀로 채우지 않았다. 한 달에 하루 이틀 정도는 비워뒀다가 급하게 피치 못할 약속이 생길 때 적절히 활용했다.
“아, 예. 상무님. 목요일 점심 괜찮습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목요일. 한국기공 근처는 다 오래된 것들 투성이었다. 허름한 일식집. 정갈한 정식 한 상과 맥주 한 병. 겉으로는 온화한 점심, 속으로는 묘한 불안.
또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눴지만, 돌아오는 길엔 괜히 입안이 씁쓸했다.
‘이게 아닌데 … 뭐가 잘못된 거지?’
그런데, 생각해 보면 늘 이랬다. 진규의 하루는 비위를 맞추는 하루였다. 말보다 눈치를 읽고, 실력보다 감정을 달래야 하는 하루. 그중에서도 변성전은 최악이었다. 그가 화를 내는 데엔 이유가 없었다. 그냥, 자기 기분이 이유였다.
“선배, 사고 친 거 아니죠?”
사무실 문을 열자 박태희가 달려와 끌고 내려갔다.
“사고는 무슨. 내가 언제 사고 친 거 봤냐?”
박태희는 웬만한 남자보다 덩치가 컸고 괄괄했다. 하지만 진규 편이었다. 빌딩 모퉁이. 담배 불이 번졌다.
“변 상무, 아까 팀장님 찾더라고요. 엄청 화나서.”
“또 뭐야. 무슨 이유로?”
“이유가 어딨 어요. 그냥 … 또 그 날인 거죠.”
진규는 피식 웃었다.
“그 인간은 내가 자기 밥인 줄 알아. 툭하면 히스테리야.”
“하긴. 밟아야 자기가 돋보인다고 생각하겠죠.”
“그럼 밟지 말고 그냥 날 건너뛰면 좋을 텐데.”
“그럼 재미없잖아요.”
둘 다 웃었지만, 웃음 끝엔 한숨이 달렸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파티션 너머로 부스럭. 그리고, 예상대로.
“정 팀장 왔으면 잠깐 와 봐.”
그 목소리. 차라리 소리를 지르면 낫겠다 싶은, 그 끓기 직전의 톤.
“예.”
진규는 재킷을 벗어서 의자에 걸쳐놨다. 하필이면 점심 먹고 바로 이 시간.
“너, 내가 시킨 대로 안 하냐?”
변성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가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가 터졌다.
“어제 대한경제 이경식 차장 만났다며? 보고도 안 하고?”
“그 약속은 지난달에 이 차장이 먼저 잡은 건데요 ….”
“니가 뭔데 대한경제 차장을 만나! 내가 만나야지! 넌 주니어들이나 맡으라고 했잖아!”
“그런 말씀,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만 …”
순간, 변성전의 얼굴에 잠깐의 멈춤. 그도 알았다. 그 말을 한 건 이전 회사에서였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엔 이미 소리 질러버렸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그래서 니가 기본이 안 됐다 이거야. 꼭 말로 해야 알아?”
진규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기본이란 것은 없었다. 가끔은 침묵이 최고의 무기였다. 하지만 오늘은 방패조차 아니었다.
“앞으로 조심해. 기자 만나려면, 가려가며 만나.”
변성전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로 돌아섰다. 진규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파티션 뒤에서는 수군거림이 흘렀다.
“또 시작이야…”
“우리 팀장님, 진짜 불쌍해.”
변성전의 속은 더 복잡했다. 이경식 차장, 기자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인물.
‘그런데 매번 그가 난 빼놓고 진규에게 먼저 연락한다?’
그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회장 눈에 들고 싶었다. 이경식이 꼭 필요했다. 대한경제 같은 신문에 장식되는 화려한 인터뷰 기사가 필요했다. 그런데 진규는 그런 걸 모른다. 아니, 모르는 척한다.
진규는 그저 기자를 ‘사람’으로 대할 뿐이다. 그게 홍보의 기본이라고 믿는 사람. 그런 진규가, 변성전에게는 도발이었다.
진규는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커서가 깜빡였다. 그건 마치, ‘넌 아직 여기 있다’는 신호 같았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기본이라… 대체, 언 놈의 세상에 있는 기본인 거야?’
한국기공 부회장실.
공기가 무거웠다. 커피 향 대신, 권력 냄새가 났다. 배정오 부회장은 소파에 반쯤 몸을 묻고 있었다. 그 앞에서 구조조정본부 임원들은 마치 제단 앞의 제물처럼 고개를 숙인 채 노트를 적었다. 말 한마디가 떨어질 때마다, 펜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들 중 단 두 사람만 달랐다. 전략실의 우기남 상무, 법무실의 한철우 상무. 눈치가 빠른 자와, 법으로 무장한 자. 그 둘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요즘 피벨리기공 매출 잘 나오지?”
배정오의 목소리엔 이미 정답이 있었다.
“당연하죠. 글로벌 2위가 어디 가겠습니까. 유럽, 미주도 탄탄하고요. 중동, 동남아는 우리가 잡고 있습니다.”
우기남은 진실보다 생존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배정오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그건 미소였지만, 승인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래. 피벨리 인수하길 잘했어. 이제 우리가 1등이야. 태성그룹도 못 하는 일이지.”
‘아직 10%밖에 못 샀는데요!’
누구도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자금 잘 챙겨. 필요하면 말해. 내가 나서볼 테니까.”
“걱정 마십시오.”
재무실 최강식 상무가 나섰다.
“은행들이 줄 서 있습니다. 부르면 지들이 뛰어옵니다.”
그의 말투엔 자신감과 자만이 반씩 섞여 있었다. 그럴 만했다. 이 회사에서는 은행장이 먼저 인사하고, 지점장은 면담 신청을 ‘번호표’ 뽑고 대기했다.
회의가 끝나자, 임원들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등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 뒤로 물러나며 인사했다. 그 틈에 김성운이 남았다. 결재판을 품에 안은 채, 조용히 다가섰다.
“부회장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래 걸려? 은행장이랑 밥 약속 있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피벨리 인수 시도로 회사 위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언론의 관심도 커지고 있고요. 홍보와 마케팅 쪽, 게다가 해외 IR도 필요합니다.”
“맞지. 재상장도 해야 하니까.”
“그래서 외부 인재를 영입하려 합니다.”
결재판을 내밀었다. 배정오는 이력서를 한눈에 훑었다. 종이 냄새보다 사람 냄새를 먼저 맡는 눈이었다.
“뭐 하는 애야?”
“홍보 쪽입니다. 우진그룹 송 회장 귀국 때도 같이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그래? 지금은 어디 있어?”
“현성그룹 홍보팀장으로 있습니다.”
그 말에 배정오의 시선이 올라왔다. 짧은 침묵. 그 침묵은 허락이 아니라, 경계의 신호였다.
“현성?”
[일요일 7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