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명성에 짓눌릴 이유는 없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그는 낮게 웃었다.
“김기수 회장, 요즘 좀 커 보려고 발버둥 치던데. 그런 데서 사람 빼 오면 내가 김 회장 얼굴을 어떻게 봐?”
그 말은 거절이었고, 동시에 경고였다.
“선 넘지 마.”
“… 알겠습니다.”
배정오는 결재판을 접었다. 툭, 테이블 위에 던졌다. 그 소리가 묘하게 컸다.
“나가야겠다. 은행장이 기다려.”
김성운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결재판을 다시 들 때, 배정오는 이미 양복저고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은 ‘바쁘다’는 뜻이자, ‘더 말하지 마’라는 명령이었다. 김성운은 그 자리에 잠시 앉아 있었다. 결재판 위의 이력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타이밍은 맞는데… 바람이 아직 안 불어오네.'
2주쯤 지났을까. 진규의 전화기 화면에 ‘김성운 상무’라는 이름이 다시 떴다. 이번엔 저녁이었다. 이젠 낯설지 않았다. 둘은 한결 편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 김성운은 맥주 한 잔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나머지는 진규 몫이었다.
“술을 못하시니 오히려 좋겠어요. 이렇게까지 안 마셔도 되잖아요.”
진규가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게 다 핑계가 되진 않지.”
김성운은 가볍게 웃었지만, 웃음 끝이 어딘가 묘하게 흔들렸다.
‘차라리 나도 못 마신다고 할걸.’
진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술이 아니라, 그 모든 관계의 의무가 지겨웠다. 기자들과는 부딪힌 잔 숫자만큼 가까워지는 법이었다. 그래서 이 자리는, 유일하게 편했다.
두 사람은 2주에 한 번씩 만났다. 커피, 점심, 그리고 저녁 술자리. 딱 그 순서로. 또 2주가 지나자 전화가 왔다. 이번에도 저녁이었다. 진규는 이미 기대를 접은 지 오래였다. 첫 만남에서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그 말은 이미 단전 밑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이젠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그런 마음이었다. 기분 좋은 대화에 맛있는 저녁이면 족했다.
그런데, 식사 끝 무렵. 술도 잘 못하는 김성운이 조용히 2차를 제안했다. 그 순간 진규의 머릿속에 스친 생각 하나.
‘엇? 뭔가 있다. 뭐지? 나가린가?’
맥줏집으로 옮겼다. 잔잔한 조명, 길쭉한 맥주잔 두 개, 뻥튀기 한 바구니. 김성운은 여전히 반 잔을 남겼고, 진규는 두 번째 잔을 단숨에 비웠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이 탔다.
“실은 오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잔을 내려놓는 김성운의 손 끝이 약간 떨렸다. 진규는 숨을 죽였다.
‘왔구나.’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달아오른 얼굴이 술 탓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는 긴장이었다.
“정 팀장 처음 만난 날, 바로 부회장님께 보고 올렸어. 허락도 구했고.”
진규의 손이 잠시 멈췄다. 결론을 듣고 싶은데, 김성운은 늘 그렇듯 느릿했다.
“그래서요?”
“그랬더니 부회장님이 그러시더군. 현성 김 회장을 내가 모르냐? 그 회사에서 사람 빼 오면, 김 회장 얼굴을 어떻게 봐?”
그 한마디에 진규는 웃음 대신 한숨을 삼켰다. 속에서는 '그럼 그렇지'라는 말이 맴돌았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녹아내리는 눈사람처럼.
“괜히 상무님만 번거롭게 만들었네요.”
“아니야, 얘긴 아직 안 끝났어.”
김성운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난 한번 거절당했다고 물러나는 사람 아니거든.”
그 말에 진규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설마….’
말이 새로 시작됐다.
“지난주에, 부회장님께 다시 보고 올렸어.”
“또요?”
“‘걔 아니면 안 되냐?’ 그렇게 물으시더군. 그래서 난 그랬지. ‘예. 정 팀장 말고는 없습니다.’”
진규는 순간 말을 잃었다. 속이 뜨거워졌다. 그 말을 들으며 술이 아니라, 가슴이 먼저 취했다. 반전의 반전의 반전. 끝을 알 수 없이 절정으로 치닫는 드라마에 진규는 손에서 땀이 났다.
“그랬더니 부회장님이 이러시더군. ‘대체 그놈이 어떤 애야?’ 그래서… ‘저랑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랬지.”
“…….”
“그랬더니, 부회장님이 웃으시면서 그러셨어. ‘그래? 그럼 한번 불러 봐. 차 한잔 하자.’”
맥주잔에 남은 거품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진규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기쁨이 아니라, 안도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어줬다는 그 사실 하나로 세상이 달라 보였다.
“박우재 기자가 왜 자꾸 정 팀장, 정 팀장 했는지 알겠더라. 진심이 통하더군.”
“그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내일 오후에 부회장님께 인사드리러 와. 차 한잔이면 충분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진규는 고개를 숙였다. 가슴을 막고 있던 큰 숨 하나가 툭 튀어 나갔다. 눈앞의 맥주잔이 흔들렸다. 기쁨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는 몰랐다.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따뜻했다. 한 계절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봄에 시작된 인연이, 어느새 여름의 끝자락까지 와 있었다.
김성운은 천천히 걸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요즘 세상엔, 진심이 통하는 사람이 드물거든. 그래서 난, 정 팀장 같은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
진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묘하게 올라오는 웃음을 참았다.
‘감사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알아본다.’
그 말이, 오늘만큼은 진짜였다.
다음 날, 진규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점심을 마쳤다. 입 안에 밥이 들어가는지, 돌덩이가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한국기공 빌딩 앞에 섰을 때, 첫인상은 단 하나였다. 돈 냄새는 나는데, 허세는 없었다. 딱 그랬다. 광택 없는 대리석, 장식 없는 로비, 직원들의 걸음은 조용하고 질서 정연했다. 진규는 그 공기에 눌려 자신의 구두 소리가 유난히 시끄럽게 들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손끝이 식었다.
“간단한 인사일 뿐이야.”
김성운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진규는 알고 있었다.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커다란 방, 오래된 티는 역력한 큼지막한 소파에 파묻히다시피 앉은 배정오, 그의 존재 하나로 이미 방 안은 꽉 차 있었다.
“정 팀장이라고 했나?”
저음의 목소리가 공간을 스쳤다.
“예, 부회장님.”
그는 언론에서 ‘재계의 미다스의 손’이라 불렸지만, 진규가 마주한 그 눈빛은 황금보다 냉정했다. 한 번 계산하면 절대 틀리지 않을 사람의 눈.
“잘해봐.”
딱 그 세 글자였다. 그게 전부였다.
“예, 알겠습니다.”
진규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 순간, 배정오가 손을 내밀었다. 진규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잡았다. 놀랍게도 그 손은 작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진 것인지 가슴에서 느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기운만큼은 팽팽했다.
‘이 손이 수 조원을 움직이는 손이라니!’
진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현성그룹 김기수 회장을 떠올렸다. 배정오 앞에서는 김 회장조차 새까만 후배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진규를 이상하게 차분하게 만들었다.
이 사람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최종 보스’였다. 돈을 움직이는 사람, 사람을 움직여 세상을 바꾸는 사람. 그가 세운 목표는 단 하나, ‘세계 1위.’ 그것도 ‘세계 2위’를 삼켜서 단숨에 오르는 방식으로. 진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의 눈앞에서 조용히 배정오의 구두 끝이 빛났다.
‘이제 시작이구나!’
그 한 생각만 머릿속을 울렸다. 심장이 가슴이 아니라 어깨 위에서 뛰고 있었다. 빠르게.
문을 나서며, 진규는 처음으로 김성운의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 회사는 냉정하지만, 한 번 믿으면 끝까지 가. 다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좀 쉽지 않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진규의 입가에 아주 미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그 길이라면 걸어볼 만하지.’
추석 연휴가 끝나면 바로 출근이었다. 남은 건, 대략 2주 정도.
그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 몰랐다. 정리해야 할 건 일이었지만, 붙잡고 있는 건 마음이었다. 책상 위엔 처리해야 할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진규의 머릿속엔 단 하나, 현성투자증권. 그게 마음에 걸렸다.
[수요일 8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