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명성에 짓눌릴 이유는 없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현성투자증권은 이미 계륵으로 전락해 있었다. 버리자니 아깝고, 가지고 있자니 독이 될 존재. 언론의 관심은 뜨거웠고, 그 어떤 결정을 내려도 누군가의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진규는 며칠 동안 밤을 새웠다. 책상 위 커피 잔이 늘어나고, 문서 파일이 늘어날 때마다 그의 눈빛은 점점 단단해졌다.
현성에 주고 갈 마지막 선물. 계륵을 처리할 기획안.
- 제목 : 「인수 기업을 활용한 재무 개선(안)」
그건 단순한 보고서가 아니라 그가 현성에서 남길 마지막 유서와도 같았다.
- 1안, 지분 전량 매각 : 깔끔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웠다. 김기수 회장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 2안, 최대주주 지분은 유지하고 나머지 매각 :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뜨겁게 달궈진 여론의 철판 위를 걷는 일. 진규 자신이 없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각 실행 방안, 시기 그리고 대응논리까지. 앞날을 내다보는 간달프가 되어야 했다.
- 3안, 그대로 버티기 : 그건, 죽음이었다. 여론의 불판에서 구운 오징어가 되어야 했다.
그 모든 가능성을 정리하며 진규는 한 줄 한 줄 혼을 갈았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위기를 맨 앞에서 대응하는 홍보맨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수술대 앞의 외과의사처럼 집중했다.
며칠 뒤, 진규는 완성된 기획안을 들고 임재성 상무를 찾아갔다. 임재성은 자료를 훑다 말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
“이걸 다 혼자 준비했다고? 정 팀장 많이 컸네.”
“예. 그냥… 마지막 정리라 생각했습니다.”
임재성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잠깐 빛이 스쳤다. 진규는 방을 나서며 속으로 안도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그런데, 다음날 출근 뒤 아침나절. 임재성의 호출이 왔다.
“뭐 마실래? 커피? 녹차?”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담배부터 한 대 하시죠.”
두 사람은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공기청정기 두 대가 동시에 돌아가는 임원실. 그 안에서 피어오른 담배 연기가 묘하게 고요했다. 임재성이 서랍 맨 아래에서 서류를 꺼냈다.
“이거 좀 봐.”
진규는 서류를 펼치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 제목 : ‘현성투자증권 매각 관련 기획안’
- 작성자 : 변성전 상무
“이야… 저 말고도 이런 생각을 하신 분이 있었네요.”
진규는 억지로 웃었다.
“근데 누구 기획안이 더 나아요?”
임재성은 진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정 팀장만 알아. 이거 정 팀장이 나한테 보여줬던 그 자료야.”
순간, 진규의 손끝이 떨렸다. 어제 임재성 상무를 만나고 나서 변성전 상무에게도 보고했다. 그런데 변성전의 짜증이 파티션을 넘어왔던 게 기억났다.
“이 많은 양을 어떻게 봐. 파일로 보내.”
음흉했다. 표지만 바꾸고, 목차 순서만 살짝 바꾼 그 기획안. 그리고 임재성 상무에게 보고까지. 그게 자신의 것이었다. 담배 연기가 허공에 피어오르며 천천히 흩어졌다. 진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상무님.”
“응?”
“제가 드렸던 자료, 없던 일로 해주세요. 변 상무 안 다치게, 그냥 … 그렇게 가시죠.”
임재성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정 팀장, 이건 … 그냥 넘길 일이 아니잖아?”
“괜찮습니다. 제가 떠나면, 누가 만들었는진 아무도 모르겠죠.”
말끝이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씁쓸한 체념과 묘한 자존심이 섞여 있었다. 임재성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서랍 안에서 와인 상자를 꺼냈다.
“이거 가져가. 제수씨랑 드셔.”
“됐습니다. 형수님이랑 드세요.”
“아냐. 변 상무가 왔다 간 거 눈치채면 곤란하잖아. 이거 주려고 부른 걸로 하지.”
진규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임재성에겐 더 아팠다.
“감사합니다. 상무님.”
“조만간 둘이서 저녁 한번 하자.”
“예.”
와인 상자가 묵직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건, 가슴속의 미련 한 줌이었다.
‘근데 … 그 ‘조만간’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진규는 마지막으로 임 상무의 방을 둘러봤다. 커피메이커, 회의용 테이블, 공기청정기 두 대. 모든 게 익숙하고, 또 멀어졌다. 문을 나서며 진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회사에서 배운 건 하나예요. 사람은, 결국 사람이 만든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진규는 짧게 웃었다.
‘이제, 정말 끝이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직 한 사람의 손길이 남아 있었다.
진규의 이직을 아쉬워하는 이는 있었다. 박태희가 나서서 번개를 쳤다. 그렇게 마련된 조촐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진규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다 떠나간 테이블에 홀로 남아 진규는 서러움에 북받쳐 술잔을 거푸 들이켰다.
‘형님, 전 형님과는 오래오래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나도 그래.’
‘근데요. 형님. 더 이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미안하다. 내가 뭐라 해 줄 말이 없네. 정 팀장이 일에 대한 마음은 아는데, 돌아가는 건 참 그렇다.’
‘전 항상 일을 제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잇속이나 챙기는 게 아니라요.’
‘그걸 왜 모르겠냐? 가거든 잘해. 아니 잘하겠지.’
술기운에 속으로 털어놓는 넋두리에 임재성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기 전에 듣고 싶었던, 언제나처럼 든든한 형님 같던 임재성.
술 취한 시각. 박태희를 앞에 두고 진규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고, 한숨으로 눈물을 닦느라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마치 통화가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추석 연휴 내내 진규의 머릿속엔 오직 한국기공뿐이었다. 고향집 마루에 앉아 송편을 빚을 때도, 차례상에 절을 올리는 순간에도, 그의 생각은 서울에 있었다.
‘빨리 자리 잡자. 이번엔, 흔들리지 말자.’
그는 누구에게도 이직 소식을 말하지 않았다. 아내 윤현숙만이 알았다.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당신답다. 당신다워.”
칭찬인지 뭔지 야릇한 그 말 한마디가 묘하게 다가왔다.
차례를 마치자마자 서울로 돌아왔다. 남들처럼 연휴를 즐길 여유 따윈 없었다. 진규는 한국기공의 기사, 공시, 연혁, 심지어 오너가 사생활을 알 수 있는 조각 정보까지 모두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현성그룹도 보수적이라 생각했는데, 한국기공은 그 위였다.
‘보수 중의 상보수.’
재계에선 그렇게 불렸다.
첫 출근 날 아침. 서울 하늘은 흐렸고, 바람은 후텁지근했다. 진규는 낡은 18층짜리 한국기공 빌딩 앞에 섰다. 외벽 타일은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고, 1층 로비의 조명은 어두웠다. 절약정신이 몸에 밴 회사였다.
‘이게 재계의 미다스의 손이 이끄는 그룹이라니.’
[일요일 9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