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미국 얘기인데 왜 우리가 흔들리죠?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명성에 짓눌릴 이유는 없다.

by 부라퀴버스터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엘리베이터 마저 삐걱거린다는 느낌을 남기며 8층으로 올라갔다. 버튼을 누를 때 약간의 시간차가 있었다. 그 몇 초 동안, 진규는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버티자. 이번엔, 오래가자.’

사무실 문을 열자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맨바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회사 특유의 공기. 규율과 절약, 그리고 냉정함이 뒤섞인 냄새.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근무하게 된 정진규입니다.”

입구 쪽에 가까운 퉁퉁한 직원이 허둥지둥 일어났다.

“예, 이쪽으로 오세요. 상무님, 정 팀장님 오셨습니다.”

신문을 들고 있던 김성운이 고개를 들었다.

“어, 왔어. 커피 한 잔 하지. 인사는 천천히 해.”

“제가 타겠습니다.”

“아냐, 오늘은 첫날이니까. 그냥 앉아있어.”

진규는 커피 향에 숨을 섞으며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다시 맨 땅에 헤딩부터 시작이다.’


“아침에 뉴스 봤어?”

“아뇨. 출근 준비 하느라 ….”

“라이온브라더스가 파산했대.”

진규는 잠시 멈칫했다.

“라이온브라더스요? 미국 투자은행 … 맞죠?”

“그래. 그게 지금 미국 시장을 흔들고 있대.”

신문 1면. ‘라이온브라더스 파산.’ 금융가의 사진 아래 붉은 글씨가 눈을 찔렀다. 진규는 순간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꼈다. 이제 그는 국내 뉴스에만 머무는 홍보팀장이 아니었다. 세계 시장의 흐름을 함께 봐야 하는 자리.

‘이게, 스케일이지.’

그는 웃었다. 그 웃음은 피곤했고, 조금은 외로웠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미 한국기공맨이었다.


오전 내내 인사만 했다. 수십 명의 임원, 수많은 부서. 그는 얼굴을 외우고, 직책을 외우고, 마지막엔 표정까지 외웠다. 점심 무렵, 김성운이 담배를 제안했다.

“누가 누군지 모르겠지?”

“예. 어리둥절합니다. 근데 다들 순박해 보이긴 합니다.”

“순박? 하하. 오래된 거지.”

“그래도, 역사와 전통이 느껴집니다.”

“근데 오래된 건, 변화가 어려워. 얼마 전까지 순혈주의만 고집하다 보니 고인 물이 된 거지.”

진규는 연기를 내뿜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 그 기사요.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글쎄… 재무 쪽에서 얘기 나오겠지. 괜히 미리 걱정하지 말자.”

“제가 일복이 좀 있어서요.”

진규가 웃었다.

“제가 가면 없던 일도 생기더라고요. 현성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럼 잘 됐네. 여기 이제부터 일 많아.”

“하하… 홍보는 일이 많으면 좋은 게 아니라서요.”

그날 오후,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라이온브라더스 파산. 그 여파는 한국기공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기획, 전략, 재무, 법무 모든 핵심 부서가 한 자리에 모였다. 6층 회의실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회의를 주재한 장재민 부사장은 계속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미국 얘기인데 왜 우리가 흔들리죠?”

“글로벌 2위 피벨리기공이 관련돼 있습니다.”

누군가가 낮게 답했다. 피벨리기공, 한국기공이 인수 중인 회사였다. 이미 2조 원 넘게 투자했고, 아직 1년은 더 버텨야 했다. 그 돈은 현금이 아니라 수원 메인공장을 담보로 잡은 유동화 자금. 잘못되면, 그들의 ‘심장’이 날아가는 거였다.

회의는 길어졌지만 결론은 없었다.

‘모르겠다.’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불안하긴 하지만…’

말들은 돌고 돌았다. 누구도 확답을 내지 않았다. 모두가 눈치로 살아남는 사람들이었다. 잠시 후, 장재민이 몽블랑 펜을 돌리며 불쑥 물었다.

“김 상무. 오늘 새로 온 홍보팀장 있잖아요?”

“정진규 팀장이요?”

“그래. 보기엔 뭔가 좀… 너무 무뚝뚝하던데 그런 사람, 기자들이 좋아하겠어요?”

김성운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 기자들이 좋아할 겁니다.”

“그래요? 나야 잘 모르겠는데, 상황이 커지면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그럴 겁니다. 정 팀장 온 게 천만다행이에요.”

회의실 안은 잠시 정적에 잠겼다. 누군가는 물컵을 돌렸고, 누군가는 서류를 정리했다. 하지만 김성운의 눈빛은 묘하게 단단했다.

‘정진규. 그 사람, 이 회사에 필요한 단 한 명일지도 모른다.’

밤이 깊었다. 회사 창밖의 불빛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진규는 퇴근길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첫날부터 태풍이네.’

그리고 혼잣말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아직 뿌리도 내리기 전에 태풍부터 몰아치네. 그래도,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야지.’


둘째 날. 회사 분위기는 이상했다. 어제는 모두가 폭풍을 예감하는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했다. 그게 오히려 더 불안했다. 진규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아직 낯선 이 사무실, 이 공기, 이 시선들 속에서 그는 오직 김성운에게 집중했다.

“상무님, 담배 한 대 하시죠?”

“좋지.”

커피 향과 담배 연기가 섞인 옥상 구석에서 두 사람은 마주 했다. 말이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이런 공기가 좋았다. ‘이 사람은 눈치로 말하지 않는다.’ 진규는 그렇게 느꼈다.


점심 후, 핸드폰이 진동했다. 데일리경제 기자였다. 짧은 문자 한 줄.

‘부장 모친상. 세브란스 장례식장 3호실.’

진규는 재빨리 계산을 마쳤다.

‘이건 기회다. 자연스러운 만남, 기억에 남는 인사.’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성운에게 향했다.

“상무님, 내일 저녁 시간 괜찮으십니까?”

“내일? 왜?”

“조문 좀 다녀오시죠. 데일리경제 산업부장 모친상입니다.”

“아, 가야지. 근데 부고가 아직 안 떴는데?”

“곧 뜰 겁니다. 조화는 오늘 먼저 보내겠습니다.”

“정 팀장 오니까 이런 것도 챙기네. 근데 갔다가 괜히 찬밥 대접받는 건 아니겠지?”

“찬밥은 아닙니다. 아주 뜨거운 자리가 될 겁니다.”

진규는 웃었고, 김성운은 그 웃음을 흘깃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포털엔 곧 부고 기사가 쏟아졌다. 진규는 ‘한국기공그룹 배정오 부회장 명의’로 조화를 주문했다. 그 이름이 가진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날 밤, 진규는 김성운이 챙겨준 자료집을 다시 펼쳤다. 두꺼운 종이 위로 숫자와 조직도, 그리고 이름들이 빼곡했다. 그는 눈이 시도록 읽었다.

‘언제든,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있게.’

그게 그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책상 맞은편에서 김성운은 그 모습을 지켜봤다. 책을 보는 게 아니라 전장을 준비하는 사람 같았다. 그는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사람, 참 독하네.’


다음 날, 늦은 오후. 두 사람은 검은 SUV를 타고 세브란스로 향했다. 라디오에선 뉴스 대신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김성운이 웃으며 말했다.

“애가 셋이라 SUV 말곤 답이 없어. 좁은 차 타면 뒤에서 난리야.”

“저도 아들 하나 있습니다.”

“몇 살?”

“이제 초등학교 들어갔습니다. 피아노에 수영에 태권도에 돈 쓸려 들어가는 폭폽니다.”

“하하.”

잠시 웃음이 오갔다. 그 웃음 뒤로, 세브란스 장례식장의 조명이 천천히 다가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사람이 바글거렸다. 꽃 냄새, 향 냄새, 그리고 묘한 정적. 한국의 장례식장은 언제나 비슷했다. 조문객들의 얼굴엔 애도보다 관계가 더 짙었다. 진규가 앞서 걸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한 조화를 가리켰다.

“저기요. 세 번째, 보이십니까?”


[수요일 10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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