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진심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못 삽니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명성에 짓눌릴 이유는 없다.

by 부라퀴버스터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한국기공그룹 배정오 부회장.’

근조화환에 한자 하나 틀림없이, 큼직하게 붓글씨로 새겨진 글씨.

“눈에 확 들어오는, 딱 좋은 자리네요.”

"이런 자리를 부탁한 건 아니지?"

“예. 그렇죠. 이런 건 타이밍입니다. 전에 현성그룹에 있을 땐 늦게 보내서 조화가 화장실 앞에 있었던 적도 있습니다.”

“하하, 배웠네. 조화도 자리싸움이구먼.”

“예. 사소하지만 중요한 거죠. 태성 같은 데야 이런 고민 할 필요가 없지만요.”

김성운은 진규를 바라봤다. 겉으론 담담하지만, 모든 게 계산되어 있었다. 그건 능력이었다.


“형님, 오셨습니까!”

접수대에 앉아 있던 기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김상욱, 박정철 — 데일리경제 기자들이 ‘형님’이라 부르며 반겼다.

‘형님? .... 난 이런 매체가 있는지 이름도 잘 모르는 언론산데?’

김성운은 놀랐다. 그는 옆의 진규를 다시 봤다. 기자들과 웃으며 악수하는 진규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의 사람 같았다. 조의금, 방명록 그리고 잠시 대기.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상주인 산업부장 심윤범이 반가운 표정으로 맞이했다.

“아이고, 정 팀장. 와줘서 고맙네.”

“당연히 와야죠. 상무님 모시고 왔습니다.”

그의 옆에서 김성운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심윤범은 따뜻한 눈으로 그를 맞았다.

“상무님까지 오시고, 감사합니다. 식사부터.”

특실이니만큼 사람들로 붐볐다. 진규와 김성운은 구석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엔 반찬과 술잔, 그리고 기자들의 웃음소리가 흘렀다.

“엇, 정 팀장! 오랜만이네.”

데일리경제의 정신적 지주인 서재형 국장이 다가왔다.

“국장님, 이직 신고가 늦었습니다. 김성운 상무님이십니다.”

“아, 상무님. 정 팀장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국장이라는 말에 김성운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서재형의 태도는 스스럼이 없었다. 그런 그를 대하는 정진규의 모습에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힘이었다.


서너 잔의 술이 오갔다. 진규의 얼굴엔 변함이 없었다. 김성운은 신기한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장례식장 복도에 그렇게 많은 근조화환들이 서 있는데, 화환은 돌려보내고 리본만 잘라붙인 게 한쪽 벽을 채우고도 남았다. 그리고 특별하게 넓게 만든 특실이 바글바글할 정도의 조문객들로 넘쳐났다. 그런데 상주인 심윤범은 물론, 편집국장부터 막내들까지 죄다 진규와 김성운의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아 있었다.

'이 사람들이 죄다 여기에만 앉아 있어도 되나?'

양복 깃에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쟁쟁한 대기업 배지를 꽂은 조문객들도 나갈 때 이쪽 테이블로 오거나, 아니면 룸 가운데에서 이쪽을 쳐다보며 고개 숙여 인사 했다.


“아까 나간 저쪽 테이블 손님들, 혹시 대원그룹 분들 아니었나요?”

“예. 맞습니다. 아시네요. 상무님.”

“저희 경쟁산데, 이쪽 업계 1위에다 광고도 많이 하고.”

“그렇죠. 근데 큰 회사라고 사람이 큰 게 아니잖아요.”

"근데 왜 저희를?"

"예? .... 아!"

서재형이 씩 웃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위기에 처하거나 필요한 게 있을 때만 저희를 아는 체 하면서 이용하려 들지요. 평소엔 저희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않고 쳐다도 보지 않죠."

"아..."

"하지만 정 팀장은 평소에 늘 저희에 대해 관심 가지고 만나 얘기를 나눕니다. 그러면 일이 생겨도 그냥 해결되는 거고요. 그런 사람 처음 봤습니다. 인사치레로 밥 한번 먹자고 한 것도 흘려듣는 법이 없어요."

"아...."

김성운은 감탄 외에엔 할 말이 없었다.

“평소에 진심으로 다가오면, 기자들도 알아보는 법입니다.”

서재형의 말에 김성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심윤범이 말을 이었다.

“겉으론 말이 없는데, 한번 얘기 나누면 다들 기억에 남아요.”


밖으로 나왔을 때는 밤공기가 차가웠다. 장례식장 입구엔 여전히 조문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이 두 사람을 끝까지 배웅했다.

“아이고, 들어가세요. 다른 손님도 많잖아요.”

“담배 한 대 피우고 가야죠.”

심윤범과 서재형이 따라 나왔다. 담배 연기 사이로 불빛이 번졌다. 김성운은 잠시 머쓱하게 서 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다들 정 팀장을 참 좋아하시네요.”

심윤범이 웃었다.

“그럴 만하죠. 저 사람, 진국이예요.”

“광고 많이 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광고요?”

심윤범은 고개를 저었다.

“광고는 돈이 있으면 다 합니다. 근데, 진심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못 삽니다.”

그 말에 김성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차 안. 도심의 불빛이 유리창 너머로 미끄러졌다. 김성운은 뒤로 몸을 기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말했다.

“정 팀장.”

“예, 상무님.”

“고마워. 오늘은… 기분이 좋다.”

그는 눈을 감았다.

“도착하면 깨워줘.”

진규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봤다. 도심의 빛들이 흐릿하게 지나갔다.

‘관계란, 결국 진심으로 쌓는 거다.’

SUV의 엔진음만이 조용히, 오래도록 이어졌다.


아침 7시 15분. 사무실은 아직 어둠이 덜 빠져나간 듯했다. 진규는 커피머신 앞에 서서 종이컵을 채우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쓴 내 나는 아침이었다. 새 회사의 공기엔 아직 낯선 냄새가 섞여 있었다.

모니터를 켜고, 정리해 둔 자료집을 펼쳤다. 한국기공의 역사. 누구는 몰라도 되지만, 홍보팀장은 달랐다. 숫자 하나, 날짜 하나, 사람 이름 하나까지 모든 것이 ‘무기’였다.

가장 먼저, 조진혁 부사장. 삼십 줄, 젊다. 하지만 ‘대주주’라는 이름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회장인 부친의 갑작스러운 죽음, 어마어마한 외가, 졸업장 대신 상속장 먼저. 병장 만기 제대, 조용한 결혼, 무탈한 처가. 세상은 그를 스캔들 없는 후계자라 불렀다.

밑엔 동생 조준혁. 군필, 유학, 외국계 근무. 경영엔 관심 없다는 게 회사의 복이었다.

그다음은 모친 이진희 여사. 한 때 재계서열 5 위급의 잘 나갔던 동성그룹 막내딸. 서울대 미대, 곱게 살 줄 알았던 여자. 남편 죽던 날 이후, 단 한 번도 경영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녀는 늘 조용히 웃었고, 그 웃음 뒤엔 아무도 모르는 냉기가 있었다.

그리고… 배정오 부회장. 재무 출신, 회장의 그림자. 주인이 빛을 잃으면 그림자가 주인 대신 서게 되는 법. 그때부터 한국기공은 ‘배정오의 시대’였다.

진규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담배 생각이 났다. 책상 위의 사사는 역사였지만, 김성운이 준 두껍지 않은 비사는 현실이었다. 역사를 읽으니, 사무실과 집기의 찍히고 긁힌 흠집마저 달리 보였다. 숨소리까지 조심스러웠다.


“정 팀장, 정 팀장!”

낮게 깔린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상무님. 죄송합니다.”

김성운이 웃으며 담배를 꺼냈다.

“이런 싱거운 사람 봤나. 일부러 못 들은 척한 거 아니지?”

“설마요.”

“같이 한 대 해.”

둘은 흡연장으로 내려왔다. 아침 햇살에 먼지가 떠 있었다.

“얼굴이 왜 그래. 집에 무슨 일 있어?”

“태풍이요. 라이온브라더스.”

“태풍?”

“쓰나미 몰고 올 지도 모르잖아요.”

“하하, 그런 걱정은 기상청에 맡겨.”

“근데요, 이번 건… 좀 다를 것 같습니다.”

진규의 눈빛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언론이 얌전히 있을 리가 없어요. 위기 냄새만 맡으면 약한 놈부터 조집니다. 겁먹으면 지갑부터 열게 되거든요. 강약약강. 그게 언론의 생리죠.”

김성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우리 정도 회사면 버틸 거야.”

“건강한 물소는 하이에나가 건드리지 않죠. 근데, 병든 놈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말끝이 묘하게 날카로웠다. 담배 끝의 불씨가 바람에 흔들렸다.

“하이에나라…”

김성운이 중얼거렸다.

“그럼, 지금 우린 어떤 놈이지?”


[일요일 11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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