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이 시원찮으면 형식이 내용이 된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글쎄요. 저는 그냥, 무리에서 살짝 떨어진 놈 같아서요.”
둘 사이로 긴 침묵이 흘렀다. 진규의 눈빛엔 이미 무언가를 감지한 사람이 있었다. 며칠 전, ‘크고 돈 많은 회사로 간다’며 웃던 자기 얼굴이 떠올랐다. 그 웃음이 지금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멀리서 TV 뉴스의 앵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국의 라이온브라더스, 파산 신청은 …..‘
그때, 진규의 커피 잔 안에서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졌다. 마치 예고처럼.
변성전 상무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름 석 자만 들어도 속이 뒤틀렸다.
‘정진규. 도대체 저 인간은 뭐지?’
시킨 적도 없는데 알아서 다 해 버렸다. 한마디 던지면, 대답 대신 표정 하나 없이 ‘그냥’ 해냈다. 이건 부하가 아니라 벽이었다.
말이 튕기지도 않고, 감정이 새지도 않았다. 갈궈도, 구슬려도, 미동조차 없는 인간. ‘내 사람’이라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더 짜증 났다. 대단한 경력이라고 봐줄 만한 것도 없었다. 능력이 있어서라기보다 미리미리 이것저것 삐질삐질 땀 흘리며 뭘 하는데, 한 것을 보면 입 댈만한 게 없었다.
담당 기자라 해도 모르는 기자나 만나기 거북한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그 인간은 달랐다. 뺀질대고 까칠한 기자들 다 붙잡는 데 걸린 시간, 고작 몇 달. 그건 미련함이었다. 연락하고 기다리고 찾아가서 기어이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마음을 얻는 일인데, 곁을 주지 않으려는 기자들에겐 더욱 진드기처럼 달라붙었다. 그 나이에 그런 짓을 해내는 놈은 드물었다.
정진규 그 인간이 있었을 땐 그나마 대한경제 이경식 차장과 연락은 가능했다. 그런데 그가 사라지자 이경식은 변성전의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한번 관계가 이렇게 꼬이면 그걸 풀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그래서 대부분 포기하고 만다. 그런데 정진규는 주위에 그런 기자들이 없었다. 알고 보니 재능이었다. 그래서 더 밉상이었다.
‘내가 그 나이 땐 욕만 먹고 다녔는데… 이 자식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거야?’
커피 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쓴맛이 입안에 남았다.
‘나가서 고생 좀 해봐라. 세상이 얼마나 매서운지.’
진심으로 망하길 바랐다.
“박 과장.”
“예, 상무님?”
“정 팀장, 요즘 뭐 한대?”
박태희 과장은 일부러 더 태연한 척 능청스럽게 굴었다.
'그걸 왜 안 물어보시나 했다.'
변성전이 배가 아프게 만들기 위해서는 최대한 별일 아닌 것처럼 툭.
“아, 정진규 팀장님이요? 한국기공그룹 구조본 … 홍보팀장으로 가셨다던데요.”
순간, 변성전의 눈이 멎었다. 공기가 잠깐 멈춘 듯했다. 숨도, 생각도, 같이.
“……뭐? 한국기공이라고?”
박태희는 눈치를 봤다. 변성전 상무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한국기공.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굴러가다 쾅, 멈췄다. 한국기공은 재계서열 20위 안. 현성그룹은 200위 밖.
‘뭐야 이 새끼. 이건 말이 안 되는데…’
작은 데서 큰 데로 가는 건, 꿈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뭐지?’
근데 그놈은 그걸 했다. 그냥 해버렸다.
“……잘… 갔네.”
“예?”
“아니, 됐어. 가봐.”
의자를 돌려 창밖을 봤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낯설었다. 다행히 부글부글 끓고 있는 속까지 비치지는 않았다. 입가에 씁쓸한 주름이 져 있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괜히 물어봤네. 쯥.’
손끝이 떨렸다. 자신은 무릎 꿇고, 비비고, 버텨서 여기까지 왔다. 그게 세상의 정석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놈은 아니었다. 정진규. 그 인간은 세상의 법칙을 무시했다. 윗사람에게 굽실대지도, 아랫사람을 조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지금은 자신보다 훨씬 큰 물에 있었다. 창밖의 하늘이 비어 있었다. 자존심이란 게, 그렇게 찢겨 나가고 있었다.
진규의 불면증이 다시 시작됐다. 별일 아닌 일에도 잠을 설쳤다. 소심한 스몰 A형. 회사 일, 사람 일, 미래까지 잠들기 전 생각이 너무 많았다. 특히 일요일 밤엔 더했다.
월요일이 두려웠다. 홍보맨의 월요일은 전쟁이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기사가 됐고, 거짓말은 칼이었다. 진규의 삶은 늘 팽팽했다. 끊어지기 직전의 고무줄처럼.
한국기공으로 옮긴 뒤엔 전쟁의 크기가 달라졌다. 주식, 부동산, M&A, 해외 투자 손대면 불붙을 것들만 잔뜩이었다. 진규는 잘하고 싶었다.
‘이번엔 다르게.’
하지만 이상하게도, 공기가 불안했다. 늑대를 피해 호랑이 굴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점심을 막 끝낸 오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훑던 중이었다. 눈에 들어온 제목 하나.
[ ‘동남아 현지 기업 인수자금 수십억 허공으로?’ ]
키보드 위에서 손길이 갈 곳을 찾지 못했다. 뉴스쿠프. 기업들이 수천만 원씩 연회비를 내고라도 눈치를 보는, 독한 매체였다. 기사는 독하고, 기자는 더 독했다. 오명식, 이름만 들어도 기업들이 몸을 웅크렸다.
진규는 기사 내용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이게… 뭐지?’
한국기공 관련인데, 본 적 없는 건이었다. 자료에도 없었다. 곧장 김성운 상무에게 달려갔다.
“상무님, 이거 좀 보세요.”
“뭔데? ……아, 이거.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제목이 왜 이래?”
“자료에 없어서요. 오보 같기도 한데…”
“신문은 아니고?”
“유료 사이트입니다.”
김성운의 눈썹이 미묘하게 떨렸다. 그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전혀 없는 얘긴 아니구나.’
잠시 후, 핸드폰이 울렸다.
“장재민 부사장님 방으로 오라고 하십니다.”
진규가 들어서자마자 고성이 터졌다.
“정 팀장, 이게 뭐야!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예? 무슨 말씀이신지.…”
“회사 조용하던 게 정 팀장 온 뒤로 난리야! 부회장님께 뭐라 보고해야 하냐고!”
진규는 숨을 삼켰다. 옆에 있던 김성운이 끼어들었다.
“부사장님, 잠깐만요. 상황을 먼저 ….”
“상황은 무슨 개뿔! 불 붙였잖아! 부회장님께 가자고!”
장재민 부사장이 앞장섰다. 그런데 문 앞에서, 표정이 바뀌었다. 아까의 고성은 사라지고, 비서에게는 꿀 떨어지는 웃음이었다. 진규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이 사람, 참 빠르다. 낯빛 바꾸는 속도 하나는 전국 1등이네.’
“부회장님, 이게 그 기사입니다.”
“뭐야 이게? 갑자기 이 난리가 왜 나?”
배정오 부회장은 인쇄물을 훑어보다가 곧 책상을 쾅 내리쳤다.
“야, 정 팀장. 어디에 올라왔다고? 직접 보여줘.”
진규는 컴퓨터를 켜서 사이트를 열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고, 화면을 띄웠다. 그 순간.
“유료 사이트라며. 벌써 가입했어?”
“아직 가입 전입니다. 전 직장 계정으로 잠깐…”
“야, 뭐야 이 새끼는?”
공기가 얼었다. 배정오의 목소리는 번개처럼 내리 꽂혔다. 진규뿐 아니라 방 안의 모든 사람의 숨이 멎었다.
[수요일 12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