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이 시원찮으면 형식이 내용이 된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돈이 없어? 왜 남의 회사 계정 도둑질을 해?"
"예?"
불똥은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진규는 당황했다. 말을 왜 이렇게 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도둑질이지 뭐야?”
“…….”
“회비가 얼마야?”
“연간 한… 이천만 원 정도 됩니다.”
“이천? 하, 이 미친놈들. 근데 넌 뭘 밉보였길래 이런 기사가 뜬 거야?”
“밉보인 적 없습니다.”
“그럼 아무 이유 없이 이런 기사를 써? 말 같은 소릴 해.”
논리 따윈 없었다. 그저 분노의 폭풍만 있었다. 장재민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어… 얼른 조치하겠습니다, 부회장님.”
“조치? 조치 같은 소리 하네. 속아서 삼십억 날린 것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데, 밖에서 또 지랄이야. 왜 건드리고 지랄이야.”
“예, 예.”
장재민은 허둥지둥 대답했다. 진규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다. 그는 깨달았다. 이 회사에선 잘못한 사람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옳았다. 이성보다 체면이, 진실보다 권력이 빠른 곳이었다. 그래서 재계서열이 그 정도인지도.
‘잘해봐.’
손을 내밀며 쿨하게 얘기하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책임은 위에서 사라지고, 화살은 아래로 떨어졌다. 진규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분노가 지나가는 동안,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태풍의 눈처럼, 조용히.
진규는 잠시 모니터를 멍하니 봤다. 심장이 둔탁하게 뛰었다. 도망칠 수도,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상황. 결국 전화를 걸었다.
‘지금 또 이 사람한테 고개를 숙여야 한다니… 웃기다, 세상.’
뉴스쿠프, 오명식 기자.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익숙한 쉰 목소리가 받았다. 갓 삼십 줄에 접어들었지만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 정 팀장님. 무슨 바람이야?”
존대도 반말도 아니었다.
“오 기자님. 다 지난 일 끄집어내서 회사가 난리예요.”
“팩트잖아요. 나, 확인 다 했어요. 팀장님이 모르는 얘기, 내가 더 잘 알아요.”
목소리 끝에 묘하게 웃음이 섞였다. 비아냥, 확신, 그리고 권력의 냄새. 진규는 느꼈다. 이런 해묵은 이슈를 꺼내 들었다는 건, 손에 계산기를 쥐고 있다는 말. 이 싸움은,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 버텨야 하는 싸움이라는 걸. 한국기공은 이미 오명식의 낚시 바늘에 꿴 신세였다.
“입사한 지 며칠 됐다고 제가 뭘 알겠습니까. 오 기자님, 저 좀 키워서 잡아드세요.”
“이미 다 확인했어요.”
“예, 맞습니다. 있었던 일은 맞죠. 근데 너무 오래된 일이라… 지금 굳이 다시 꺼내실 이유가 있을까요?”
“정 팀장 입장은 이해해요. 근데 우리도 체면이 있잖아요. 뭐… 국장한테 얘기해 볼게요. 이번 기회에 회원 가입 어때요?”
결국, 돈이었다. 언제나 돈이었다. 언론의 ‘체면’이란 말은 언제 들어도 웃겼다.
‘돈 주면 굽히는 펜, 그게 체면이지.’
진규는 속으로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웃었다.
‘엎드릴 땐 확실하게 엎드려야 한다.’
그게 이 세계의 예의였다. 그래야 덜 다치는 법. 회사도 사람도.
“아이고, 예산 얘기는 아직 듣지도 못했어요. 그래도 제가 보고 한번 올릴게요. 근데 오 기자님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 없네요.”
“흐흐. 내가 좀 알긴 하죠.”
“취재하실 일 있으면 저한테 먼저 주세요. 위쪽 분들은 진짜 세상물정 모르십니다. 하이고, 와 보니 자린고비가 와서 할배요 할 거 같습니다. 하하.”
이왕 맞춰주는 거 확실하게. 진규는 말 배우는 삼룡이처럼 실실 웃음을 흘렸다.
“형님, 아직 잘 모르시네. 거기 법카야 밥값이나 될까? 전략실 임원은 룸에서 몇 백씩 쏘던데. 뭐, 나도 들은 거 많지만 일단 참은 거예요. 알죠?”
‘잡았다. 전략실 임원.’
눈썹이 꿈틀 했다. 짧았지만 진규는 비밀이 새어 나가는 구멍이 어딘지를 잡아냈다.
“예…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콧소리가 살짝 새고,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진규는 전화를 끊으며, 눈빛이 달라졌다.
‘네가 말했지. 술값 몇 백.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해.’
진규는 어금니를 한번 콱 깨물었다. 상황을 보고하고 시스템을 움직이도록 해야 했다. 김성운 상무에게 담배를 제안했다. 내부 어디에 엉뚱한 눈과 귀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상무님, 전략실 그 뚱뚱한 분 있잖아요?”
“우 상무? 왜?”
“얼마 전에 오 기자랑 룸 갔다네요. 비싼 술 사주고, 기밀까지 줄줄 불었답니다.”
김성운의 손 끝에서 담뱃재가 툭 떨어졌다.
“……이게 진짜?”
“네. 기사 삭제는 어렵지만, 회원가입 유도하려고 경고용으로 올린 거라 포털엔 안 올라갈 겁니다.”
“다행이네.”
“근데 그날, 다른 얘기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비밀은… 늘 안에서 새는 법이니까요.”
한참 후. 김성운이 돌아왔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술이 굳어 있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웃기는 상황이야. ‘근데 내가 뭐 잘못했냐?’ 이러더라. 도리어 부회장 팔면서.”
“네? 그게 무슨?”
“오 기자가 기사 안 쓴다고 해서 말 좀 했대. 기자랑 친해 놓으면 나중에 다 도움 된다나? 그게 무슨 죄냐고 펄펄 뛰더라. 하…”
진규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우기남 상무. 배정오 부회장 옆에 붙어 있는 그림자.
‘외부 금융권 출신이라더니, 속은 텅 비었다.’
대주주인 조진혁 부사장에게는 감언이설로 굽신거리고, 배정오 앞에서는 충성의 탈을 썼다. 하지만 진규 눈엔, 그는 돈 냄새를 좇는 하이에나였다.
‘부라퀴!’
진규는 천천히 커피를 들었다. 식은 커피였지만, 마음은 뜨거웠다.
‘좋아. 이제 그림이 보이네. 기사는 지워지지 않아도, 사람은 지워질 수 있지.’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새로운 전쟁의 신호였다. 이미 돌아갈 곳은 없었다.
바람이 달라졌다. 찬 기운이 섞이더니,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글로벌 증시가 다시 살아날 거라는 기대는 허공에 뜬 연기처럼 사라졌다.
좀 더 크고 견고하고 안전한 성이라 생각했다. 야망이 군주가 있는 큰 성이었다. 그 성이 한국기공이었다. 아니 한국기공이어야 했다. 진규는 한국기공이라는 그 이름에 인생이라는 밑천을 걸었다.
하지만 판이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라이온브라더스 파산.’
머나먼 외딴곳의 한 회사 이름이 세계 시장을 무너뜨렸다. 충격은 하루가 다르게 거세졌다. 노아의 홍수가 되어 글로벌 경제를 집어삼키려 했다. 한국기공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원 메인공장, 그룹의 심장이 흔들리고 있었다. 살아남느냐, 무너지느냐? 이제 문제는 그것뿐이었다.
배정오가 벌여 놓은 수백억, 수천억 원짜리 투자들. 그중에서도 2조 원짜리 피벨리기공 인수 건은 목구멍에 걸린 가시였다. 언론이 아직 눈독을 들이지 않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곧 터질 폭탄이었다. 그것도 불붙은 심지가 길지 않은.
진규는 하루하루, 마지노선을 지키기 위해 뛰어야 했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오늘은 경제부, 내일은 금융부. 모레는 M&A 담당 기자.’
어디가 먼저 터질지 모르니 다 막아야 했다. 회사 안에서는 도와줄 그 누구도 없었다. 기댈 어깨 하나 없이, 버티는 건 오로지 자신 뿐이었다.
“정 팀장, 혼자서 너무 힘들지 않아?”
김성운이 물었다.
“내가 저녁 자리 같이 가줄까?”
[일요일 1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