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우산은 맑을 때만 빌려줍니다.

내용이 시원찮으면 형식이 내용이 된다.

by 부라퀴버스터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진규는 씩 웃었다.

“아뇨. 상무님이 오시면 제가 더 힘들어집니다.”

“그래? 내가 술이 약해서 하하.”

농담이었지만, 진규는 진심으로 웃지 않았다. 임원이 끼면 판이 커진다. 술값도, 기사도, 책임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게임은 혼자서 해야 하는 거란 걸.

위기는 커졌고, 예산은 말랐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서로를 의심했다. 회사 안은 지뢰밭이었다. 진규는 잠시 눈을 감았다.

‘버텨야 한다. 그래야 길이 보인다.’

결국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사람이다. 기자 한 명이라도 더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는 움직였다. 부드럽게, 그리고 정확하게. 까칠한 기자들, 인사이트 있는 기자들.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진규는 먼저 굽혔다. 허심탄회하게, 인간적으로, 진심으로. 그게 통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마음을 여는 데 오래 걸렸지만 한 번 열리면 단단했다.


“정 팀장.”

대한경제 이경식 차장의 전화가 왔다.

“내일 여의도에서 봐. 내가 아끼는 기자들 모임이 있어. 근데 정 팀장 모르는 사람이 없더구먼. 첨으로 비(非) 기자 참석이야.”

“좋죠. 맛있는 거 제가 쏠게요.”

“무슨 소리야? 우리 모임이야. 법카는 놔두고 와.”

“예? 그래도 제가 먹은 건 계산해야죠.”

“어허, 그냥 와. 몸만.”

다음 날, 진규는 그 자리에 갔다. 가볍게 웃으며, 진심을 담아 건배했다. 그때부터였다. 그를 ‘홍보맨’이 아닌 ‘사람’으로 보는 기자들이 늘었다. 정보를 챙겨주고, 위험을 막아주고, 그의 이름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겼다.

현성그룹 시절엔 꿈도 못 꾸던 일이었다. 그땐 늘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했다. 이제는 달랐다. 그는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았다. 외로웠지만, 확실했다. 진규는 잔을 내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이게 홍보지.’


칼바람은 은행에서부터 불었다. 겨울보다 차갑고 날카로운. 하지만 국내 경제는 사방에서 불이 붙었다. BIS 비율을 못 맞추면 바로 퇴출시킨다는 정부의 으름장에 은행들은 칼을 겨누며 빌려준 우산을 뺏기 위해 달려들었다.

‘맑을 땐 우산을 빌려주지만, 비가 오면 빼앗는다.’

그 말은 너무 정확했다. 한국기공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제까지 줄 서서 돈 좀 써 달라던 은행들이 오늘은 회사 목줄을 죄고 있었다.

회사엔 법률, 회계, 금융 전문가가 넘쳤지만 배정오 부회장 앞에서는 다 벙어리였다. 그의 말은 법이었고, 그의 실수조차 옳았다. 누구도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생각 없는 똥 덩어리’가 되지 않으려면, 그저 고개 숙이고 손뼉 칠 뿐이었다.

겨울이 깊어도 회의만 반복됐다. 내용 없는 회의, 책임 없는 발언, 시간만 때우는 사람들.

‘회의라도 하면 뭐가 달라지겠지.’

그건 착각이었다.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았고, 두려움만 커져갔다.


피벨리기공. 2조 원짜리 꿈이었다. 처음엔 모두가 환호했다.

“이제 우리도 세계 1등이야!”

빙하기 글로벌증시에서 피벨리의 주가는 추풍낙엽이었다. 10퍼센트 인수 당시 25달러에서 금융위기의 지진에 추락에 또 추락해서 8달러를 지나 7달러 밑으로. 이젠 2조 원짜리 꿈이 4천억 원짜리 악몽이 됐다.

“이렇게 앉아 있다가 공장 날리고 한국기공 문 닫을 거야?”

배정오의 고성이 회의실을 찢었다.

“아닙니다. 대책 세우고 있습니다.”

“어느 세월에? 문 닫고 나서?”

“준비 중입니다.”

“내가 힘들게 쌓아 올린 걸 니들이 이렇게 무너뜨려?”

그의 분노는 익숙했다. 그러나 익숙함이 공포를 덜지는 못했다. 임원들은 죄다 입을 다물었다. 그저 오늘만 넘기면 된다는 듯이.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내일이 없었다. 그렇게 나온 결론을 두 가지로 좁혔다.

- 하나, 지금이라도 팔아서 손실을 줄이자.

- 둘, 오히려 더 사서 지배권을 확실히 쥐자.


“지금이 기회야. 골드맨식스만 따돌리면 된다.”

그의 눈빛이 번쩍였다.

‘피벨리기공을 완전히 삼키면 조 씨 집안의 한국기공도 내 손에 들어온다.’

배정오의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의 확신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이미 장면이 그려졌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고풍스러운 피벨리기공 빌딩의 꼭대기. 그곳에서 푸른 하늘을 움켜쥔 자신.

‘세계 1등은 내 거야.’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다. 그 푸른 하늘 아래 한국기공은 이미 균열이 가고 있었다는 걸.


새해가 밝았다. 그런데, 아무도 축하하지 않았다. 모든 전망은 어둡다 못해 캄캄했다. 정부가 22조를 쏟아붓고, 한국은행이 금리를 왕창 내렸지만, 기업들의 얼굴엔 빛이 없었다.

12월 한 달 동안 기업대출이 7조 줄었다. 돈줄이 말라붙자 연체율이 폭발했다. 부도는 하루가 멀다 하고 터졌다. 은행들은 저승사자가 됐다.

‘우산은 맑을 때만 빌려줍니다.’

비가 오자, 그 우산을 다 뺏어갔다.

한국기공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때 ‘재계의 돈 주머니’라고 불리던 회사는 이제 ‘국가 경제를 갉아먹는 괴물’로 전락하고 있었다.

배정오는 안간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진규는 알고 있었다. 이건 버티는 게 아니라, 무너지는 중이라는 걸.


설 연휴. 사람들은 고향으로 갔지만 진규는 가지 않았다. 컴퓨터 불빛 아래서 새벽을 샜다. 눈은 충혈됐고, 커피는 식었다. 긴장감이 피처럼 돌았다. 그렇게 연휴를 넘긴 뒤, 회사에 나갔을 때,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 있었다.

재무실 쪽은 왠지 들떠 있었다. 남용석 팀장이 모니터 앞에서 뭔가를 정리 중이었다.

“남 팀장님, 연휴에도 야근하셨죠?”

“자금 집행이 있어서요.”

“회수 아니고, 집행이요?”

“예. 회수는 오래 걸리잖아요.”

진규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금이 새로 나갔다고요? 지금 이 상황에?”


진규는 장재민 부사장을 찾아갔다.

“피벨리기공 지분을… 더 늘렸습니까?”

“그래. 주가가 바닥일 때 사야지.”

“하지만 지분 추가 금지 약정이 .....?”

“정 팀장이 그 말할 줄 알았어.”

장재민이 입꼬리를 올렸다.

“직접 산 게 아니야. 지분연계 금융상품이야.”

진규는 눈을 크게 떴다. 망할 놈의 파생금융상품, 듣기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파생금융상품이요?”

“자세히 알 필요 없어. 함부로 파생을 붙이지 말어. 그냥 금융상품, 그런 게 있다고만 알아둬.”

진규는 말없이 숨을 들이켰다. ‘금융상품’이란 말은 듣기엔 부드럽지만, 속을 까보면 ‘파생금융’이었다. 그 단어는 지금 이 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였다. 온 나라의 중소기업들을 심근경색으로 내몰았던 키코(KIKO)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부사장님, 파생금융이면 진짜 위험합니다. 언론이 알면 …”

“쉿.”

장재민이 손가락을 세웠다.


[수요일 1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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