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위고하 막론하고 자존감이 낮을수록,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한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그 단어 입 밖에 내지 마. 파생의 ‘파’ 자도 금지야. 절대로. 금융상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하지만…”
“정 팀장, 말실수 한 번이면 회사가 터진다.”
며칠 전에도 있었다. 연매출 100조짜리 대기업이 파생금융에 손댔다가 2,800억 원 정도 손실을 냈다. 그리고 다음날, 1면. [대기업, ‘파생금융’으로 무너지다] 그 한 단어로 끝이었다. 언론의 이빨은 날카로웠고, 1면 탑에 시리즈로 조리돌림을 당했다. 세상은 파생금융을 불법도박보다 더 악질로 봤다. 그 큰 대기업도 하이에나 떼가 물어뜯은 상처엔 피가 흘렀다.
진규는 숨이 턱 막혔다. 손끝이 떨렸다. 6천억. 그게 새로 들어간 돈이었다. 합치면 거의 3조. 지금까지 살얼음판을 걸어온 것만 해도 피가 말랐는데, 이젠 피가 마르다 못해 다 타버린 재가 될 지경이었다.
회사 금고는 이미 텅 비었는데, 그들은 아직도 칼춤을 추고 있었다.
‘이건 도박이다. 이기면 신화, 지면 파멸.’
진규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욕심이 눈을 가렸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승률에 집 기둥뿌리를 걸었다. 금융상품 서류 속 숫자들이 자꾸만 피처럼 번져 보였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큰 회사 가더니 얼굴 보기도 힘드네요.”
“박 과장, 미안. 큰 회사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여기도 블랙홀이더라.”
두 사람 사이로 맥주잔이 부딪혔다. 가볍게 ‘챙’ 소리가 났지만, 잔 속 거품은 금세 가라앉았다.
“에이, 설마요. 현성은 비교도 안 되잖아요. 한국기공이면… 전통 대기업이죠.”
“잘 나갔지. 근데 80년대에 위기 한 번 크게 맞고 그룹 절반을 팔아서 겨우 버텼어. 그 뒤로 회장은 대외활동 싹 끊고, 본업만 파고들어서 돈을 쌓았지. 근데 돌아가셨고… 그 돈을 부회장이 다 써버렸어. 빚까지 내서.”
“그래도 한국기공은 천군만마 같은 선배 얻었잖아요.”
“운명이지 뭐.”
진규는 웃었다. 피곤한 웃음. 오래된 사람과 술을 마신다는 건 이상하게, 슬픔이 먼저 올라오는 일이었다.
박태희는 여전히 잘 웃었다. 말끝마다 웃고, 잔은 비어 있질 않았다.
“일 할 땐 진짜 선배 밖에 안 보였어요. 멋있었어요. 그렇게 고생했는데, 결국은….”
“일을 몰고 다니는 팔자인가 봐. 내가 가면 일이 쏟아지더라.”
“그만 좀 해요. 혼자 너무 열심히 하지 말아요. 눈치도 좀 보고.”
“나는 나 밖에 없어. 결과로 말하는 수밖에 없지. 내가 스카이 출신이라서 밀고 당겨주는 선후배가 있겠어? 남들이 알아주는 능력이 있겠어, 오직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뚜벅뚜벅 발품 파는 수밖에. 근데 참 신기해. 밖에선 첨엔 날 띠껍게 보던 인간들도 두세 번 보고 나면 고민거리를 털어놓는데, 안에선 참 … 흐흐.”
그 말에, 박태희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고민 얘기 나오면 끝난 거잖아요. 거기까지 가기가 얼마나 힘든 지 나도 잘 알아요. 지들도 별 거 아니면서 만나자고 하면 틱틱 거리잖아요. 그럼 대부분 거기서 막혀요. 선배처럼 또 연락하기 쉽잖죠. 그게 능력인데, 그래서 더 안쓰럽죠.”
“날 알아주는 사람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영혼을 팔아서라도 성공하고 싶어.”
박태희가 잔을 들었다.
“그만 생각해요. 선배는 슈퍼맨도 아니잖아요. 실속도 좀 챙겨요. 원리원칙 좀 고집하지 말고요. 윗사람들도 선배 보면 부담스러울 거예요.”
“……변 상무가 딴 데로 튈 줄 알았으면 그냥 눌러앉아 있는 건데.”
“그 사람, 정치판 기웃거린다던데요?”
“그래. 그럴 줄 알았지.”
잠시, 말이 끊겼다. 잔 사이로 기포가 터지고 서로의 눈빛이 닿았다.
“나 얼마 전에 이사했어요.”
“그래? 어디로?”
“세종문화회관 뒤쪽이요. 거기 아파트들 많잖아요.”
“거기 비싸잖아.”
“엄마 돈이죠.”
웃는 입술에 맥주 빛이 반짝였다.
“집에 가서 한잔 더 하실래요?”
매정하게 거절할 수가 없어 함께 탄 택시 안. 창 밖의 불빛이 얼굴에 스쳤다.
“얼마 전에 수천억을 더 질렀어.”
“예?”
“그게 폭탄 될 수도 있어.”
박태희가 눈을 크게 떴다.
“미쳤네. 진짜 제정신이에요?”
그녀의 얼굴이 창가 불빛에 비쳐 순간 낯설게 예뻤다. 진규는 잠깐,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 은은했다. 가고 싶었다. 단 둘만의 공간. 그래서 위험했다.
“잠깐만요. 기사님, 여기 세워 주세요.”
“왜요, 선배?”
“아, 갑자기 … 생각난 일이 있어서. 큰일 날 뻔했네.”
“무슨 일인데요?”
진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열고 내렸다. 세종문화회관 뒷골목, 비싸 보이는 아파트 단지 입구.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서울 끝자락, 반전셋방으로 돌아가며 진규는 혼잣말처럼 웃었다.
‘뱁새가 죽을 둥 살 둥 뛰어도, 황새 한 걸음이면 …’
그때, 코 끝에 스쳤다. 박태희의 연한 향수 냄새. 가슴이 두근거렸다. 술 때문인지, 아니면 외로움 때문인지. 그건,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진규는 오래되고 낡았어도, 빌딩을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벅찼다. 유리창 틈새로 새어드는 빛, 벽에 박힌 시간의 먼지까지도 자부심 같았다. 역사와 전통이 켜켜이 묻어 있었다.
‘이게 진짜 회사지.’
높고 넙데데하니 세련과는 거리가 멀고, 세월이 느껴지는 빌딩이었다. 하지만 그 자부심도 오래가지 못했다.
“사옥 매각부터 하자.”
배정오 부회장의 한마디에 회의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예? 부회장님 사옥을요?”
까라면 까는 임원들 입에서도 순간적으로 의외라는 반응이 튀어나왔다. 회의실 뒤쪽에 배석해 앉아 있던 진규는 순간 웃음이 나왔다. 설마 농담이겠지.
‘씨발. 사옥까지 팔아야 할 급박한 형편이면서도 파생상품에 수천억 원을 담가? 미친….’
그러나 배정오는 담담했다.
“농담으로 이 판 버텨? 지금은 뭘 팔아서든 숨통을 틔워야지.”
말은 담담했지만, 모두의 얼굴엔 같은 생각이 스쳤다.
‘이건 마지막 수단인데, 왜 시작부터.’
회사의 심장 같은 사옥을 팔겠다고?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김성운 상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 사옥 매각은 여론에 부담이 큽니다. 제대로 된 명분도 있어야 하고요.”
“명분?”
배정오는 차가운 눈빛으로 웃었다.
“명분은 홍보실에서 만드는 거 아냐? 그렇지, 정 팀장?”
진규는 잠시 말을 잃었다.
“……예. 저희가 만들겠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배정오를 위시한 경영진들은 책임질 생각이 없다는 말이었다.
‘이건 네 일이다.’
말하지 않았어도 진규는 들리는 듯했다. 결국 또 자신이었다. 일을 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도 진규도 하지만 생각하지 못한 간극은 컸다.
“주식시장도 망가졌지만, 부동산시장은 더 합니다. 그런데 왜 집 팔 생각부터 할까요?”
[일요일 15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