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여긴 웃고 있는데, 누군가는 울겠지!

지위고하 막론하고 자존감이 낮을수록,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어 한다.

by 부라퀴버스터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한동안 사내엔 본사사옥 매각 얘기뿐이었다. 탐내는 곳은 많아도 사는 곳은 없었다. 덕분에 가격은 더 내렸다. 그러자 듣도 보도 못한 곳에서 덜컥 사들였다. 매각한 뒤에 임차하는 조건.

‘가격이 형편없다.’

생각이란 걸 하는 자들이 있었다. 마음속 자부심이라는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이 박살 났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회의가 끝나자 김성운이 담배를 내밀었다.

“야, 너도 좀 이상하지 않아? 왜 굳이 지금이야?”

진규는 담배 끝에 불을 붙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천억짜리를 구백억에 팔아야 할 이유가 뭐겠어요. 급하니까죠.”

“급하긴 한데, 너무 급해. 냄새가 이상해.”

“그러게요. 저만 그런 생각하는 게 아니네요.”

점심 직후, 휴대폰이 진동했다.

〈사옥 매각한 한국기공, 갈 데까지 갔나?〉

대아경제 온라인 경제뉴스. 진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줄 알았어.’

그 밑에 박혀 있는 기자, 노민기. 신입.

‘그래, 신입은 무서운 법이지. 몰라서.’


부회장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폭풍이 터졌다.

“이 새끼들아, 나는 살리겠다고 발버둥 치는데, 니들이 판을 이렇게 만들어?”

“…….”

“천억 조달했으면 됐지, 이게 뭐야? 지금 망조라도 들었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언론 대응을 바로….”

“미리 했어야지! 머리는 모자 씌우려고 달고 다니냐?”

진규는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욕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근데 앞뒤도 없이 이게 뭐야?’

가슴 한켠이 서늘하게 식었다. 이건 위기가 아니라 판이었다. 누군가 이미 짜놓은.


그리고 찾아간 대아경제 편집국. 그곳엔 ‘호랑이’라 불리는 여자가 있었다. 문영주 부국장. 작고 단단한 몸, 말보다 먼저 날아드는 눈빛.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경제신문사의 여장부, 남자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정 팀장, 오늘도 또 왔어?”

“예. 부국장님, 매일 뵙고 싶습니다.”

“말은 곱게 하네. 웬일이래.”

진규 뒤엔 장재민과 김성운이 인사만 한 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직급이 딸리는 진규로선 임원들 얼굴이라도 팔아야 했다. 돈 얘기 나오면 진규로선 불감당.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문영주는 둘을 힐끗 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두 분은 그만 들어가세요. 정 팀장이랑 얘기하면 됩니다. 사옥까지 팔아재끼는 판에 돈 얘긴 안 할 테니.”

그녀는 웃었지만, 그 웃음은 날이 서 있었다. 단 둘이 마주 앉았을 때, 진규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부국장님, 이번 사옥 매각은 단순한 처분이 아닙니다. 파부침주(破釜沈舟)입니다.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시작하는 거죠.”

“파부침주라… 그 말, 요즘은 잘 안 쓰는데.”

그녀는 피식 웃으며 커피를 내렸다.

“내가 사람 많이 봤지만, 요즘 정 팀장을 제일 많이 보네. 오죽하면 ,,, 그 정도면 알겠어.”

진규는 잠시 말을 잃었다. 언론이 사람으로 움직이는 순간은 거의 없다. 하지만 문영주 앞에선 예외였다. 태성그룹 같은 회사야 볼만할 때 만나면 그만이지만, 진규는 문영주를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다. 아니 하루에 세 번을 볼 때도 있었다. 점심 전후, 저녁식사 전.

처음엔 그녀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즈니스에 별 도움도 되지 않는데, 자꾸 보니 귀찮다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도 비즈니스는 내버려 두고 기사와 사람을 보게 됐다. 그러다 보니 편한 인사와 농담이 오갔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게 힘이 되어 돌아왔다.


그날 오후, 기사가 제목부터 바뀌었다.

〈한국기공, 사옥 매각 통해 체질 개선 ‘승부수’〉

공격은 사라지고, 격려가 남았다. 배정오 부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봐, 할 수 있잖아.”

“예, 부회장님. 대아경제 쪽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다른 데도 그렇게 해.”

옆에서 장재민이 실실 웃었다. 진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욕먹어도 좋다. 하지만, 이게 맞나?’

그때, 모니터 속 숫자가 살짝 들썩였다. 한국기공의 주가. 오전 내내 떨어지던 그래프가 단 한 줄, 위로 올라섰다.


해가 넘어가면서 노을이 유리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시간, 배정오는 비밀 일정이 있었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시간. 민세윤 비서가 조용히 말했다.

“부회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들여보내.”

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에 반짝이는 구두, 유동훈 변호사가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고개를 깊이 숙였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배정오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그래도, 세상 일이 네 손에 들어가면 오래 걸리는 법이 없지.”

민세윤이 차를 들였다. 차 향이 방 안에 퍼지는 동안, 유동훈의 눈동자가 잠시 그녀를 따라갔다. 사뿐한 걸음, 매끄럽게 떨어지는 옷의 선. 사과 같은 엉덩이를 눈에 넣었다. 그러다 시선을 들키자 헛기침을 두 번 하며 얼른 수습했다.

“민 비서는 언제 봐도 아주 손이 야무져.”

“그렇지. 다들 민 비서 반만큼만 일했으면, 내가 벌써 회장 됐지.”

배정오는 태연히 웃으며 받았다. 그 말을 듣고 돌아서며 민세윤은 미소 지으며 엉덩이를 살짝 씰룩이며 나갔다. 바로 공기가 바뀌었다. 유동훈은 손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확인하시죠.”

배정오는 찻잔을 내려놓고 서류를 천천히 넘겼다. 끝 페이지에서 시선이 멈췄다. ‘5’로 시작하는 숫자. 그 뒤로 동그라미가 아홉 개.

“이게... 최종인가?”

“예. 꼬리 밟힐 염려 없이 정리했습니다. 일이 년 정도는 그냥... 묻어두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잠시 정적. 배정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가에 스치는 미소.

“고생했네. 수수료에 인센티브도 따로 챙겨줄게.”

“수수료만 해도 충분합니다. 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 변.”

“예.”

“우리 다음엔 좀 시원한 데서 보자. 김 프로 불러서 같이 재미있게.”

“좋죠. 누가 들을 염려도 없고요.”

“그래. 김 프로 전에 보니 잘 놀더라. 술도 세고.”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 서로의 웃음 속에 비밀 하나씩을 공유한 사람들만의 안도감이 번졌다. 창밖엔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빛은 사라지고, 남은 건 찻잔에 비친 검은 그림자 둘.


늦은 저녁, 맥주잔마다 노란 불빛이 일렁였다. 기자들의 웃음소리, 캔 뚜껑이 터지는 소리, 그 사이에서 진규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여긴 웃고 있는데, 누군가는 울겠지!’

대한경제 이경식 차장이 들어왔다.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오늘은 맥주가 아니라 약이네. 시원하게 한 잔 갑시다.”

“차장님, 저녁은요?”

“먹었어. 대신 오늘은 술로 소화 좀 시켜야지.”

맥주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켠 그는 후배 기자들을 향해 헛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신입들은 기사를 못 써. 싸가지도 없고, 글빨도 없고, 끈기도 없어.”


[수요일 1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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