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목숨 걸 각온 돼 있어, 알아 줄 사람은 찾아야

윗사람은 말이 너무 많고 아랫사람은 입이 너무 무겁다. 그래서 안 된다.

by 부라퀴버스터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예?”

“회사 일은 말이야.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눈치도 봐야지.”

“저는, 해야 할 일 했을 뿐입니다.”

변성전은 창가로 걸어가며 짧게 웃었다.

“그게 문제야. 넌 말이야 해도 못한 일을 할 때, 누군가는 안 해도 한 일을 하거든.”

진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대신, 눈빛이 모든 걸 말했다.

‘그래도 난, 해야 할 일을 할 겁니다.’


퇴근 후, 회사 근처 호프집. 조용한 음악 사이로, 잔 부딪히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또, 왜 그러세요?”

박태희가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진규를 바라봤다.

“웬만한 홍보는 선배 흉내도 못 내요. 문 차장 다루기가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섣불리 대응해서 어설픈 기사라도 나갔으면? 한밤중에 임원들 난리 나고, 홍보실은 잿더미 됐을 겁니다. 그 점은 변 상무도 아무 말 못 하잖아요. 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진규는 웃었다. 피곤이 섞인 웃음이었다.

“무슨 흉내야. 능력 없으니까 그냥 발로 뛰는 거지.”

“그거 아세요?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많아요. 하지만 실제로 뛰지는 않고 대충 감으로 머리로만 하니까 사고가 나는 겁니다. 근데, 다 해결한 선배는 왜 그래요? 그건 열심히 정도가 아니잖아요.”

“지방대에 백그라운드도 없이 굴러온 돌인 내가 성공하려면 날 갈아 넣는 수밖에.”

박태희는 강냉이를 먹듯 말을 던졌지만, 진규는 무겁게 속내를 드러냈다.

“휴,, 어렵다. 그렇게 갈아 넣어도 직속상관은 매번 공을 가로채고 개무시하니.”

“아이러니지. 나도 성공을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거래할 거고, 간 쓸개 다 빼놓고 해. 근데 일이란 건 제대로 해야 하잖아.”

“선밴 변이랑은 애저녁에 글렀어.”

박태희는 맥주잔을 비웠다. 거품이 반쯤 남은 잔이, 마치 속을 다 토해낸 사람처럼 보였다.

“근데 문 차장은 어떻게 알았대요? 인수 얘기?”

“문 차장 특기지. 가끔 오래된 명함 보며 전화 돌리다 얻어걸리곤 해. 신 부장이랑 통화할 때 옆에서 TS직원들이 인수 관련 대화를 나누던 중에 말소리가 들렸던 모양이야. ‘인수’라는 말에 동물적인 감각으로 시침 떼고 ‘축하드립니다’ 한마디 하니까, … 신 부장이 지레 겁먹고 줄줄 털어놨대.”

“헉…….”

“그래도 나한테 확인 전화한 게 다행이야. 그게 현실이야. 기자는 귀로 낚시하고, 사람은 입으로 사고 내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밖에서 버스가 지나가며 불빛이 스쳐갔다. 박태희가 조용히 말했다.

“큰일 날 뻔했어요. 선배 없었으면, 인수전 나가리 됐을지도 몰라요.”

“무슨 그런 말을….”

“아니에요. 선배는 참,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라. 회사가 돌아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데.”

진규는 대답 대신 잔을 들어 올렸다. 맥주 위로 형광등 불빛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그는 그제야 실감했다. 진짜 사고는 문진석 차장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내부였다. 언론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언론을 모르는 게 무서운 거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 밤의 사투 끝에, 원더택배는 무사히 현성그룹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진규는 그날 이후, ‘위기관리’란 단어의 진짜 뜻을 또 한 번 뼈에 새겼다.


회사 복도 끝, 푸른 조명이 깔린 사무실. 그 안엔 오늘도 변성전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정 팀장. 내가 몇 번을 말했어? 기본이 안 돼 있어, 기본이.”

그의 말 끝엔 늘 짜증이 섞여 있었다. 칭찬이란 단어는 그의 사전에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기본’이라는 건 그때그때 달랐다.

진규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고요했다. 마치,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사람처럼. ‘이 사람,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자기가 미움받는 이유를 정말 모르는 걸까.’

“아, 진짜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

변성전은 모니터를 두드리며 또다시 소리를 높였다. 그때, 파티션 너머로 얼굴 하나가 조심스럽게 튀어나왔다. 박태희.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상무님. 재무실 임 상무님이 정 팀장 찾으시는데요.”

“임 상무가? 또 왜? 무슨 일이래?”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냥 빨리 오라고 하시네요.”

변성전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졌다. 현성그룹 실세 임재성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도 감히 더 말하지 못했다.

“또 무슨 사고 쳤냐? 하여간, 얼른 가 봐.”

짜증을 털어내듯 손짓은 했지만, 그 눈빛엔 질투가 깔려 있었다. 진규는 눈으로 ‘무슨 일이래?’ 하고 물었고, 박태희는 살짝 눈을 찡긋했다. 그 짧은 교감에, 진규는 숨을 돌렸다.


재무실 안쪽 임원실 문을 열자, 커피 향 대신 꿀차 냄새가 은근히 번졌다.

“상무님, 안녕하십니까? 저 좀 구해주세요.”

“또 뭔 사고야?”

“어제 술 안 드셨어요? 담배 한 대 피우고 가도 괜찮죠?”

임재성은 피식 웃었다.

“들어와. 어제도 달렸더니,,,, 꿀차 한 잔 하려던 참이야. 같이 마셔.”

진규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둘이 거의 동시에 담뱃불을 붙이자, 두 대의 빵빵한 공기청정기가 불빛을 바꾸며 일하는 티를 냈다. 회장도 누리지 못하는 금연빌딩 내 애연가 실세에 대한 최고의 특혜.

“사실은요, 변 상무 그 인간이 또 히스테리를 부려서, 박 과장이 임 상무님 핑계로 절 구출했어요.”

임재성은 고개를 저었다.

“딱하다. 어쩌다 그런 인간이 위로 와서. 안에서 더 지지고 볶고 있으니, 안쓰럽다.”

“어쩌겠어요. 회사가 그렇죠.”

잠시 침묵. 그 사이, 따뜻한 꿀차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래, 내가 왜 불렀냐고 물으면 뭐라 하지?”

“그냥, 물어볼 게 있었다고 하시죠?”

“안 돼. 그 인간 그런 말 안 통할 걸. 귀찮아 죽겠는데 괜히 더 꼬치꼬치 물어볼 거야.”

“그럼, 커피 한 잔 더 마시고 있었습니다 …라고 하시죠.”

“하하, 그게 낫다.”

임재성은 서랍을 열어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문구 좀 다듬어. 회장님 PT 자료야. 변 상무도 배석할 거야.”

진규는 페이지를 넘기며 눈썹을 찌푸렸다.

“이거 제가 먼저 봐도 되나요? 컨피덴셜 도장이 찍혀 있는데요?”

“괜찮아. 밖으로 말만 안 새면 돼.”

“예. 꿀차에 커피까지 대접받았으니, 오늘 복 받은 날이네요.”

“복은 무슨. 우리 회사 복은 죄다 엉뚱한 데로 갔지.”


그날 오후, 변성전의 목소리가 다시 복도를 타고 흘렀다.

“아니, 왜 정 팀장한테 자료를 먼저 줘요? 난 왜 몰라요?”

임재성은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그냥, 가까이 있었으니까. 급해서.”

“급해서요? 하, 진짜 나도 웃기네요.”

“그래요, 웃어요. 요즘 회사엔 웃는 얼굴이 귀하니까.”

그 한마디에 회의실 공기가 미묘하게 식었다. 임재성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는 변성전과는 말을 섞지 않았다.

변성전은 ‘걸어 다니는 인재(人災)’였다. 가는 곳마다 팀이 무너졌고, 사람들은 버텨내지 못했다. 그는 부하를 잃고, 결국 자신도 잃었다. 그래서 빠방 한 학연, 지연을 총 동원해 그룹 윗선에 손 써서 날아온 낙하산이었다. 겉으론 유능한 척, 하지만 항상 속으론 불안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꼭 있었다.

진규는 그런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조직의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 아냐? 특히, 자기 자리만 지키려는 사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건다.’

진규는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매사 목숨을 걸다시피 일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 이렇게 목숨을 갈아 없애는 건 아니었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 듯,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그를 찾아 나서는 것도 방법이었다.

진규는 콸콸 쏟아지는 물을 두 손으로 연신 얼굴에 끼얹었다. 짜증과 스트레스를 씻어냈다. 그러다 문득 양손으로 세면대를 짚고 빨려 들어가는 물줄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진규의 얼굴에서 떨어진 물방울도 그 물줄기에 휩쓸려 내려갔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거울을 쳐다봤다.

‘그래! 목숨 걸 각오는 돼 있어. 알아주는 사람은, 새로 찾자.’

진규는 옆에 벗어둔 안경을 썼다.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이 안경 렌즈에 방울방울 달려있었다. 어금니가 으스러질 정도로 힘주어 깨물었다.


[일요일 5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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