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사람은 말이 너무 많고 아랫사람은 입이 너무 무겁다. 그래서 안 된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 ‘양자강, 6시, 부사장님 이하 전원 참석.’
워룸 멤버와 재무팀장 그리고 홍보팀장이 대상이었다.
‘가지 말까?’
진규는 천지 분간도 못하고 희희낙락 거리는 꼴을 도저히 볼 자신이 없었다.
일부러 느지막하게 6시를 한참 넘기고서야 양자강에 도착했다. 바쁜 일 하다가 온 것처럼.
교보문고 뒤편 오래된 중식당 안은 일찌감치 모인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정 팀장, 왜 이제 와? 빠져가지고는."
경영진들에게 귀여움 받는 재무팀 식구들이 알은체를 했다.
"아. 예, 갑자기 급한 연락이 오는 바람에."
“자자, 잔들 다 채우시고, ‘우리가’ 하고 선창 하면 ‘이겼다’ 삼창 아시겠죠?”
넉살 좋은 전략기획실 임원이 잔을 치켜들며 소리를 높였다.
- “우리가.”
- “이겼다. 이겼다. 이겼다.”
방 여러 개를 터서 만든 룸 안에서 이십여 명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모두가 앞 뒤 양 옆 서로 잔을 마주친 후 단숨에 잔들을 들이켰다.
‘뭐지? 이 사람들.’
진규는 이겼다고 착각하는 패자들의 가식적인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섞일 수 없는 외계인 느낌이었다. 잔을 부딪히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차마 입으로 가져가지를 못했다.
“어이, 정 팀장. 늦게 왔으면 후래자삼밴데, 안 마시고 뭐 해?”
임재성이었다. 시끌벅적함 속에서도 그가 진규를 챙겼다.
“아, 예. …… 죄송합니다만 기자랑 피치 못할 약속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뭐? 하긴 정 팀장 외부 미팅은 막을 수가 없지. 오늘 같은 날 같이 좀 먹지.”
들뜬 분위기가 진규에겐 비참함으로 다가왔다. 일부러 웃어 보려 했지만 속에서 ‘욱’하고 치밀어 올랐다.
‘이미 실패했는데, 무슨 축뱁니까?’
속으로만 외쳤다. 맥주 거품이 꺼져가는 잔을 보다가 내려놓고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입구를 나설 때도 한꺼번에 웃고 떠드는 소리가 식당 전체에 울렸다. 컴컴한 골목에 서서 웃고 떠들고 마시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이율배반의 냄새를 털어냈다.
나오긴 했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울적한 기분은 진규를 단골 술집으로 이끌었다. 낮에는 밥집, 밤에는 술집. 계란 프라이를 안주삼아 혼자서 조용히 폭탄주를 마셨다.
6조짜리 실패를 씻어내는 데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술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인사불성, 그래도 실패라는 단어가 지워지지 않았다.
‘철퍼덕.’
비틀비틀 술집을 나서다 문지방에 걸려서 골목길 아스팔트에 대짜로 엎어졌다.
누가 볼까 싶어 얼른 일어섰다. 아스팔트에 세게 쓸린 무릎이 아팠고, 오른쪽 손목이 시큰했다. 다행히 턱은 바닥에 살짝 닿은 정도. 그제야 지워졌다.
노래방에서 반주음악을 들으며 혼자 맥주를 마셨다. 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 고함소리, 돼지 멱따는 소리가 오버랩 됐다.
그러다가 노래를 불렀다. 맨 정신엔 기억나지 않지만 취하면 떠오르는 그 노래 ‘비정.’ 부르고 또 불렀다. 목이 아파 더 이상 못 부를 때까지 불렀다.
무릎에서 피가 나서 울면서 불렀다.
마이크 든 손목이 시큰거려서 눈물을 흘렸다.
입을 벌릴 때마다 턱이 얼얼해서 서러웠다.
아스팔트에 한 대 후드려 맞은 턱이 뻐근해서 술로 달랬다.
속에서 자라고 있던 야망이 싹도 틔우지 못하고 짓밟힌 게 너무 아팠다.
왕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왕이 될 길은 없었다. 그래서 왕을 빛나게 하는 참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론적 배경과 안팎에서의 명분을 채워줄 그런 참모.
이성계가 칼을 들었을 때, 이성계의 빈틈을 채워준 정도전이 되기를 갈망했다. 자신을 갈아 넣어서라도.
며칠 뒤 명동 은행회관의 발표.
결과는 진규 말 그대로였다.
현성보다 더 많은 금액을 쓴 곳이 두 곳이나 있었다. 진규는 안절부절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속보로 중계되는 포탈 뉴스의 헤드라인만 보고 또 봤다.
‘씨발 2등만 했어도. 판을 한번 뒤집어엎기라도 하지.’
우진건설이 남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죽을 둥살똥 해서 겨우 6조 원짜리 교훈을 얻은 건가? 이거 참.”
그는 옆에서 들으라는 듯이 가시 돋친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게. 팀장님이 정보 물어오면 뭐해요. 결국 아무것도 모르는 아줌마가 결정하니.”
“똑똑한 사람들이 왜 높으신 분 입만 보고 결정하는지 참.”
현성은 3위였다. 우진건설 인수 패배 후유증은 길었다. 물을 먹었다는 걸 처음엔 다들 받아들이지를 못했다.
“아, 씨발. 우리가 쓴 돈이 얼만데 실패라니, 말이 돼?”
흡연장에서 진규를 본 회사 직원들은 내용도 모르고 성화였다.
“2등만 했어도 언론 동원해서 한번 뒤집어 보겠는데, 3등이니 찌그러져야죠.”
그럴 때마다 진규는 조용히 맞받았다. 대거리를 할 기분도 아니었다. 놓친 사냥감이 큰 법이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로 비싼 수업료를 치렀다. 인수하면 큰돈 벌 수 있다는 기대감에 돈 잔치만 벌인 셈이었다.
그 실패는 현성이 사냥 본능에 눈을 뜨게 했다. 그날부터 현성은 계속 M&A 시장을 기웃거렸고, 장이 열리는 족족 입질했다. 기업 사냥꾼이 됐다. 사냥꾼의 본능에 따른 사냥일수록 진규는 온 세상에 악악 대며 대의명분으로 포장했다.
우진 인수 실패 상처에 딱지가 앉을 무렵.
퇴근을 준비하던 진규의 휴대폰이 울렸다. 익숙한 이름이었다.
뉴스데일리 문진석 차장. 그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머릿속에 ‘얍삽’라는 단어가 번쩍였다.
“아이고, 문 차장님. 이 밤에 웬일이십니까?”
“하하, 저녁에 우연히 시간 남아서 형님 생각 좀 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문진석이 시간 남는다고 전화할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면, 그건 반드시 ‘이유가 있을 때’였다.
“식사하셨어요? 설마 그냥 안부 인사만 하시려는 건 아니죠? 딱 보니 뭔 일 있네요.”
“역시 형님은 눈치가 너무 빨라. 이번에 형님네, 택배사 하나 인수했다면서요?”
“……예?”
순간 진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게 무슨 말이지? 나도 모르는 내용인데.’
“또 시치미 떼시네. 선수끼리 왜 그래요.”
‘선수끼리.’ 그 한마디에 진규는 곧장 상황을 읽었다. 정보가 새고 있다. 그것도, 내부에서.
“글쎄요. 전 아는 게 없는데요.”
“또 철벽 치시네. 이번엔 IT 쪽 계열사라면서요? 현성TS?”
드디어 퍼즐이 맞춰졌다. 진규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곤, 연극의 막을 내리듯 말했다.
“차장님, ……. 죄송한데 지금 인사팀에서 절 급히 부르네요. 금방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뛰었다. 진규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마구 눌렀고 문이 열린 뒤에도 또 뛰었다. 계열사 현성TS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기획담당 신상근 부장이 가방을 들고 있었다.
“실장님, 잠깐만요. 오늘 혹시 기자랑 통화하셨어요?”
“기자? 아, 뉴스데일리 문진석? 전에 행사장에서 한번 만났는데, 오랜만에 전화해서, 반가워서 잠깐 통화했지.”
“혹시 원더택배 인수 얘기 하셨습니까?”
“그거? 이미 다 알고 있던데? 내가 굳이 숨길 이유가 있나 싶어서.”
진규는 눈을 감았다.
‘이런 씨, 끝났다.’
노련한 기자한테 순진한 신상근이 말려들었다. 그 말 한마디가, 그룹 전체를 흔들 수도 있었다.
진규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이번엔 현성기업이 나서지 않았다. 대신에 현성TS가 원더택배 인수 제안서를 제출했다. 350억 원 규모. 얼마 전에 돈 되는 자산 처분으로 주머니가 두둑했다.
퇴근 직전에 인수 후보로 확정. 하지만 아직 회장 보고 전. 그건 곧, ‘지금 기사 나가면, 다 끝난다’는 뜻이었다. 진규는 바람처럼 다시 돌아와 곧장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차장님. 인사팀 다녀왔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헐떡이는 숨을 몰아 쉬었다.
“하하, 그나저나 원더택배 얘기 좀 하시죠.”
“차장님, 사실은 이미 기사 다 써놓고 마지막 멘트 따려고 전화하신 거죠?”
길게 재고 자시고 할 시간이 없었다. 진규는 숨을 들이쉬었다가 정곡을 찔렀다.
“역시, 귀신은 속여도 우리 형님은 못 속이겠네요.”
진규는 웃음을 참았다.
“예상대로군요. 근데 아직 확정 아닙니다. 기사 나가면 완전 꼬입니다. 내일 아침까지만 기다려주시면, 첫 보도는 뉴스데일리가 가져가시죠.”
“내일 아침 8시까지. 그 이상은 안 돼요.”
“약속드립니다.”
그 약속 하나로, 밤이 새기 시작했다. 보고, 확인, 설득, 수정. 전화가 쉼 없이 울리고, 커피는 식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김기수 회장 컨펌까지 모든 라인을 거쳤다.
다음날 새벽, 문진석 차장은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8시 정각. 뉴스데일리 단독.
제목엔 큼지막하게 붙은 두 글자 [단독], 현성그룹, 원더택배 인수로 물류사업 ‘본격화’
그와 동시에 진규는 ‘딸깍’ 마우스를 눌렀다. 메일, 문자, 보도자료. 동시에 쏟아졌다. 거의 실시간으로 수십 개의 기사들이 포탈로 날아들었다.
‘문진석이 특종은 했고, 물 먹은 매체도 없어.’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판은 지금부터. 진규는 최대한 깊은 한숨을 딱 한번 쉬었다. 전화가 폭발하듯 울렸다. 추가 취재, 침이 튀다 못해 입 안이 다 말랐다. 사무실은 정신을 차릴 틈도 없는 전쟁터였다.
그리고, 한참 뒤 등장한 변성전 상무의 목소리가 뒤에서 꽂혔다.
“적응을 못 하는 거냐, 안 하는 거냐?”
[4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