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사람은 말이 너무 많고 아랫사람은 입이 너무 무겁다. 그래서 안 된다.
- 믿을 수 없겠지만 등장인물들과 회사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요 내용은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 부라퀴 :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면 기를 쓰고 덤비는 자들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진규는 그 뒤치다꺼리를 했다. 밤새 사과하고, 읍소하고, 낮술까지 사고. 돌아오는 길, 택시에서 들었던 ‘투신’이란 단어가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남 얘기 같지 않았다.
탁— 키보드 소리가 뚝 끊겼다. 공기가 멈췄다. 진규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게 더 오래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옆자리 박태희가 파티션 뒤에서 눈짓으로 물었다.
‘또 시작이죠?’
진규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눈빛이 잠깐 교차했다. 이곳에서 감정은 말로 하지 않는다. 시선으로만 전해진다.
며칠 뒤 오후 회의가 끝나고. 변성전이 진규를 불렀다.
“이리 좀 와봐.”
진규는 무표정하게 다이어리와 펜을 챙겼다. 그의 걸음은 군인 같았고, 숨소리는 훈련병 같았다.
“너 군대는 갔다 왔냐?”
“예.”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 전화를 그렇게 받아?”
그제야 이해가 됐다. 어제저녁 바쁜 중에 변성전이 전화를 하고선, ‘예, 전화받았습니다’라고 하면 끊었다. 그리곤 다시 전화해서 또 그렇게 끊고 세 번인가 네 번인가를 그렇게 해놓고 아무 용건도 말하지 않았던 게 생각났다.
“내 번호 입력이 되어 있긴 하냐?”
“예.”
“예? 그런데 그렇게 전화를 받어?”
진규는 혼동스러웠다. ‘뭐가 문제였나? 그럼 어떻게 전화를 받아야 하지?’
“모르겠어? 그런 거 하나도 가르쳐줘야 하는 거야? 그러니 자료 하날 제대로 못쓰지. 이거 다시 써서 가지고 와. 보내기 전에 어디 보낼지 보고하고.”
붉은 펜으로 죽죽 그어진 자료. 그걸 보는 순간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진규는 참아야 했다. 고개 숙인 사이,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말은 참았지만, 그 손은 이미 싸우고 있었다.
“변 상무가 부러웠나 보더라고요. 선배가 임 상무님 전화받는 걸 옆에서 들었나 봐요. 임 상무님 전화받을 땐, ‘예, 상무님~’ 하잖아요. 근데 변 상무 전화는 무뚝뚝하게 사무적으로 받으니.”
“하, 사는 게 장난인가? 난 누구처럼 일부러 허파에 바람 들어간 소리 못하는데.”
“알죠. 그래도 쪼끔만 좀 어떻게 해봐요.”
“음…..”
“얼른 가요. 또 찾을라.”
눈치 빠른 박태희의 충고가 진규를 얼어붙게 했다. 먼저 걸음을 옮기는 박태희의 발 뒤꿈치를 보면서 담배 한 모금을 더 피우며 머리를 굴려봤지만 답이 없었다. 충고대로 하고 싶어도 변성전의 소리만 들려도 경직되는 건 본능이었다. 냄새나는 똥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멀리하고픈 본능.
누군가 프린트물을 찢었다. 그 소리가 사무실을 가르며 날카롭게 퍼졌다. 그 순간, 진규는 깨달았다. 이 조직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물어뜯는다. 피가 나야만 일이 돌아가는 곳이었다.
우진건설 인수 실패.
우진은 국내 2위의 건설사였다. 재계의 다크호스 현성그룹의 전략적 행보이기도 했지만, 진규 개인에게도 일생일대의 바람이었다. 현성그룹 김기수 회장의 야망을 믿었다. 중견그룹에서 퀀텀점프 할 절호의 찬스. 진규는 자신의 살과 뼈를 갈아 넣더라도 반드시 성공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정도 받고 출세도 할 수 있는 그 길.
“6조 원이 얼마나 큰 금액인데, 설마. 그럴 수가 없어.”
“돈 놓고 돈 먹기지. 미친척하고 세게 지르는 데가 있을 거야.”
우진건설 인수 금액은 듣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6조 원이라는 건 꿈에서도 나올 법한 숫자가 아니었다. 처음엔 6조 원이 가당키나 하냐고 했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그 숫자는 기정사실이었다.
- ‘우진건설 인수전 10개 기업이 43개 재무적 투자자와 컨소시엄, 예비입찰’
- ‘현성그룹 우진건설 인수 위해 1조 원 총알 준비’
- ‘우진건설 인수전 3파전 양상, 21일 공적자금관리위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예정’
국내에서 가장 큰 장이 섰고, 언론은 미친 듯이 펌프질 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고, 언론이 관심을 가질수록 우진의 매각가는 높아졌다. 판돈이 클수록 뜯어먹을 것도 많고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많은 법.
‘사람이 하는 일에 안 되는 게 어딨어?’
진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큰 물에서 놀고 싶었다. 공을 세우기 위한 출세의 교두보였다. 오랜 현성의 준비에 자신의 정보력이 화룡점정하길 기대했다.
자산관리공사 담당자와 통화하는 기자 옆에서 통화내용을 엿들었다. 기자와 약속을 핑계로 경쟁사와 우진건설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목표는 경쟁사의 입찰가. 입찰 마지막에 쓰는 금액을 미리 알 순 없지만, 그 안에선 정보가 떠 다녔다. 오래 낚으면 뭐라도 낚았다. 베팅까진 몰라도 판돈 규모는 알 수 있었다.
현성그룹의 워룸엔 자칭타칭 에이스들과 비싼 몸값의 외부 전문가들이 바글댔다. 그 워룸의 실질적인 리더인 임재성 상무에게 진규는 정보를 물어 날랐다. 현성에서 가장 믿고 따르는 형님이었다.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6조로는 부족합니다.”
입찰하는 날 아침, 진규의 목소리를 낮았지만 단단했다.
“얼마나 더?”
임재성은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다. 눈 밑에 그림자가 짙었고 반백의 머리는 엉망이었다.
“우리 포함, 최소 세 군데는 6조 이상입니다. 진짜 싸움은 거기서 부텁니다.”
진규는 잠시 숨을 골랐고, 임재성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시간이 없었다. 입찰제안서를 들고 가야 했다.
“워룸 전문가들도 그 정도면 다들 안정권이라 했어.”
“6조만 해도 동원할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죠. 하지만, 미친놈들이 있는 법입니다.”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참. 이게……”
진규의 말 한마디에 2천억 원을 더 써야 했다. 임재성은 대답 대신 안경을 벗었다. 렌즈에 묻은 피로를 와이셔츠 자락으로 닦아냈다. 한숨을 내 쉬었다.
“제가 직접 들었어요. 몇 달 동안 수많은 사람과 돈을 갈아 넣었는데, 참가에 의미를 둔 올림픽도 아니고, 일단 이겨야죠.”
“회장님이 이미 결정을 내리셨어.”
“… 예?”
“회장님은 6조만 써도 충분히 인수 가능할 거라 보고 계셔.”
진규는 순간 온몸이 굳어버린 듯했다. ‘이러면 나가린데, 우리 회장님 간이 그거 밖에?’ 진규 자신의 깊은 곳에서 간절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한 번만 더 보고 해 보시면 안 돼요?”
“이미 제안서에 금액 썼어.”
“예? 아니 …… 어떻게?”
“가족회의였대. 사모님께서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고.”
진규는 숨을 몰아쉬듯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씁쓸한 웃음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속에서 올라오는 쓴맛을 다시 삼켰다. 결국 그 입찰서를 들고 가는 뒷모습만 힘없이 바라봤다.
그날 저녁. 문자메시지가 왔다.
[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