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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

내가 절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지는 일 한 가지는?

by 다인

내가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절대 불가능을 만든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무서움과 두려움이 포함되는 일이다. 그리고 남들은 하는 데 나는 못하는 것을 위주로 떠올렸고 질문 맨 앞에 ‘절대로’에 중점을 두고 고민했다. 일단 높은 곳과 물을 무서워한다. 그래도 고소공포증은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비행기를 잘 타고, 등산도 즐겨한다. 놀이기구도 무서워하면서 막상 타면 즐긴다.

물은 정말 무서워한다. 어느 정도냐면 욕조에서 반신욕을 가끔 하는데 물이 목 밑까지 차오르면 순간 공포를 느낄 정도다. 평소 수영할 줄 아는 사람들이 부럽긴 하지만 그냥 거기서 끝이다. 내가 할 수 없는 거라 확신을 하니까 굳이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절대 들지 않는다.




과거의 공포 속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수영은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공포는 대체 언제부터, 왜 생긴 것일까?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단체로 수영장을 갔다. 자유자재로 놀게 하게끔 선생님이 지시해서 친구들과 수영장 바닥을 걸어 다니며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수영 비슷한 것을 하는 것 같아 나도 따라 했는데 순간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허우적대다 물을 많이 먹었다. 난생처음 죽다 살아난 느낌이 들었다. 친구들에게 발이 닿지 않아 물을 먹었다고, 무서웠다고 말도 못 했다. 겁에 질린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스스로 마음을 안정시킨 뒤 다시 수영장으로 나와 아무렇지 않은 척 물장구만 쳤을 뿐이다.


그때 느낀 죽음의 첫 공포는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당황한 나는 물속에서 숨을 쉬었는데 숨을 쉬면 보통 공기가 들어오는데 물속에서는 물이 들어와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또한 물의 저항 때문에 팔다리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살려고 허우적거렸다. 따라서 ‘물’은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 되어 수영은 절대적으로 할 수 없다고 느껴졌다. 물은 7살의 좋지 않은 공포의 기억으로 20년 넘게 그대로 남아있다.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실패 확률은 당연히 100%



수영을 실제로 시도해 본 적은 있을까? ‘물’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치부해버려서 시도해 본 적은 없다. 내 성격상 분명 남들은 다 하는데 내가 하지 못한 일을 만나면 ‘에잇, 나도 할 수 있는데’라고 생각하여 그 일을 시도해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수영’은 내가 시도라는 생각도 해보지 못한 진짜 공포의 영역이다. 공포는 공포일뿐 굳이 극복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영’밖에 없다. 그토록 물을 무서워하며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영역이라 여긴다.


하지만 수영은 삶에 있어 생존에 꼭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하고 있다. 속으로는 솔직히 잘하고 싶은데 엄두가 나지 않고 이미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마음먹은 지 오래다. 게다가 다른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굳이 공포를 극복하는 데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평소에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데 긍정적인데도 말이다.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실패 확률은 당연히 100퍼센트이다. 시도라도 하면 성공 확률이 50퍼센트인 것을 알면서도 시도하지 않는다. 그만큼 물이 무섭고 싫다.


수영이 싫은 이유를 하나 덧붙이자면 ‘수영복’도 이유가 된다. 재질이 몸에 딱 달라붙어 입으면 춥고 벌거벗은 느낌이 굉장히 싫다. 그리고 내 몸매를 누가 보는 것은 더더욱 싫다. 생각해 보면 얼토당토않은 이유다. 요새 체형 커버로 원피스 수영복도 있고 더 가리고 싶으면 래시가드도 있지 않나? 자꾸 이유를 추가하니까 이제는 핑계를 대는 느낌이 든다.




불가능이란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기 위해 만든 목적이다.



가만히 물에 대해 생각해 보니 지금 나는 물을 싫어하는 온갖 이유를 다 대고 있다. 책 <미움받을 용기>에서 읽은 아들러의 심리학 이론 ‘목적론’이 떠오른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 즉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 책 <미움받을 용기> -


물이 무섭고, 수영복도 입기 싫고, 물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목적론에 따르면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가 성공의 원인과 실패의 원인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수영을 하지 않기 위한 목적으로 공포를 느낀 경험을 수단으로써 찾아낸 것이 아닐까? 아들러의 말대로라면 나는 '물에 빠져 죽을뻔한 공포를 느낀 경험'이 '절대 수영을 할 수 없는'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물에 대한 공포의 경험으로 수영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원인론) 수영을 하지 않기 위해 '물에 빠져 죽을뻔한 공포'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수영을 할 수 없는 '나'로 만든 것이다(목적론). 결론은 ‘나’의 문제다.


* 목적 : 수영을 하지 않기 위한 목적

* 경험 : 물에 빠져 죽을뻔한 경험


* 원인론 : 물에 빠져 죽을뻔해서 수영을 하지 않는다.

* 목적론 : 수영을 하지 않기 위해서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을 떠올렸다. 수영을 절대 할 수 없는 '나'로 만들었다.




긍정의 생각은

언젠가 긍정의 행동을 만든다



이 글을 쓰면서도 ‘한번 수영을 제대로 배워볼까?’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솔직히 ‘목적론’에 따라 물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 것도 알겠는데 여전히 무서운 건 사실이다. 지금 ‘한번 수영을 제대로 배워볼까?’라는 생각도 정말 많이 발전한 것이다. 수영을 배워볼 생각은 그동안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행동의 원천은 본래 긍정적인 생각이다. 내키지 않은 요청을 부탁받을 때 “한 번 생각해 볼게."라는 말은 긍정의 신호가 될 수 있다. 긍정의 생각은 긍정의 행동으로 이어지므로 조금 더 생각을 발전시키면 나도 언젠가는 수영을 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나의 경우 한 번 해볼까라는 생각은 행동으로 실행하는 성격이다. 또 모르지 않나? 이걸 왜 이제야 시작했으며 새로운 재능을 찾았다고 좋아할지도 모른다.


나는 20년도 지난 지금도 7살이 가진 두려움의 과거를 여전히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릴 때는 두려울 수 있지만 더 나은 내가 되려면 지금은 바뀌어야 한다. 두려움을 인정하되,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한 번 시도해보는 거 어떨까? 절대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시도라도 하면 성공 확률 50퍼센트라는 것만 생각해 보자. 딱 한 번만 해보는 거다. 그 경험이 성공적이라면 또 다른 새로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코치와 시작이라도 하는 내 마음이 만나면 절대 극복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실패 확률은 0퍼센트다. 자신감을 가지자.




* 위 질문은 김애리 작가님의 책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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