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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곶 Sep 25. 2021

저세상 꽃인 듯-꽃무릇

스토리가 있는 꽃 이야기 3

그 한주는 악몽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목이 타는 듯이 아팠다.
여느 때 같으면야 환절기에 여지없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려니, 약 먹으면 2주, 약 안 먹으면 14일 잘 구슬려 보내는 감기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은 때가 때니만큼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식은땀이 흘렀다. 머릿속으로는 내가 갔던 동선을 되짚고, 떨리는 손으로는 코로나 증상을 검색했다.  알 수 없는 병의 시작점이 난무하니, 사실 동선을 되짚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배즙, 프로폴리스, 도라지청, 꿀차 등등 목에 좋다는 건 수시로 부어 넣으면서도 증세가 호전되지 않던 며칠. 불안한 마음으로 마스크 쓰고 요리하고, 밥상만 차려놓고 홀로 방에 들어가 앉아 두려움에 짓눌렸다.
상상 속의 나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격리됐으며, 수능생 아들은 나로 인해 모의고사도 못 치르고, 고2 딸과 남편도 생이별됐다. 직장에서는 질타의 눈길을 받고, 사생활은 벌거벗겨졌다. 이런 상상들이 나의 과민성 대장 증상을 만나면서 코로나 증상 중 하나라는 설사까지 유발하니 설상가상이었다.
코로나는 병 자체보다 이런 사회적인 매장이 더 무섭다. 언론에서 코로나 전염성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해 우울한 이슈들을 많이 다루다 보니 검색하는 손은 더 떨렸다. 무서웠다. 칩거하는 중 창밖으로 보이는, 마스크 쓰고라도 자유롭게 다니는 사람들이 제일 부러워 보였다.
저녁에는 멀쩡하다가도 아침만 되면 따끔거리는 목,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남에게 피해를 안 주고 혼자 앓다가 죽는 암 같은 치명적인 질병이 낫다 싶을 정도로 피가 말랐다.
맘고생은 입맛까지 가져가 버려 며칠 새 2kg이 빠졌다.
목 아픔 증세가 말끔히 없어지고 나서야 따로 치워 두었던 칫솔을 가족 칫솔과 나란히 걸고, 세면대에 걸어놓은 수건에 무심코 손을 닦고, 식구들과 밥상에 둘러앉아 맞는 일상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따뜻한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산책을 나섰다. 감기라서 고맙고, 마스크를 쓰고라도 나설 수 있는 게 너무 감사했다.

그날 그 보석 같던 오후, 꽃무릇을 만났다.

다른 세상에 온 듯 붉게 핀 꽃무릇

따스한 햇살에 반짝이는 화려한 핏빛 꽃들이 무리 지어 바람에 살랑이니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했다.
무릇과 꽃무릇은 비슷한 시기에 핀다. 찬바람 선선할 때 들판을 덮는 무릇, 그보다 꽃이 훨씬 더 화려한 꽃무릇.

들판을 보랏빛으로 덮는 야생화,무릇

일본에서는 꽃무릇을 피안화(彼岸花)라고 부른다. 피안은 영어로 nirvana, 이승의 번뇌에서 해탈하여 이르는 열반을 말하는데, 아마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은  꽃의 생김새와 무리 지어 풍겨내는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나온 이름이 아닌가 싶다. 며칠간 천국과 지옥을 여러 번 오간 내게 저세상 꽃이라는 이름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유명한 꽃무릇 군락은 영광의 불갑사, 고창의 선운사처럼 사찰 주변에 많다. 그 이유가 열반을 상징하는 꽃 이어서만은 아니다.

꽃무릇의 다른 이름은 석산(石蒜, 돌 마늘)이다. 이 뿌리에 알칼로이드 성분이 있어 천연방부제 역할을 한다. 꽃무릇 뿌리에서 추출한 전분으로 풀을 쑤어 절의 탱화를 그리면 색도 안 변하고 좀이 슬지 않는다. 절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화려한 꽃무릇 군락은 결국 그 쓰임에서 생겨났다.  

전등사에 핀 꽃무릇에 제비나비가 찾아왔다

강화도 전등사를 찾았다.

전등사의 대웅전은 대조루라는 누각 밑으로 고개숙이고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건축가들이 좋아한다는 이른바 누하진입이다.

대조루의 화려한 단청과 퇴색한 자체로 자연스러운 대웅전의 단청, 가을가을한 파란하늘, 그리고 이질적인 꽃무릇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대조루의 화려한 단청과 대웅전의 빛바랜 단청이 대조를 이룬다

국화도 아직 이르고, 천지에 화려한 꽃이 자취를 감춘 가을 초입의 예쁜 선물, 꽃무릇의 영어 이름은 Red Spider Lily다. 이런 독특한 모양은 여느 꽃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거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예쁘게 생긴 거미라면 환영이다.

꽃무릇의 영어 이름은 Red Spider Lily,예쁜 거미다.

꽃무릇은 꽃과 잎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고 상사화로도 불린다.

사실 상사화는 꽃무릇보다 한 발 먼저 늦여름에 꽃을 피우는 단아하게 생긴 꽃의 이름이다. 상사화는 잎이 먼저 나고 진후 꽃이 피고,  꽃무릇은 꽃이 먼저 피었다가 지면 잎이 나온다. 이렇게 꽃무릇과 상사화 둘 다 꽃과 잎을 한꺼번에 볼 수 없어서  상사화라고 혼용해서 부른다

꽃무릇보다 앞서 꽃을 피우는 상사화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게 얼마나 못 할 일이면 상사병이라는 병명이 생기고, 상사화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코로나로 격리되면 2주는 꼼짝없이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다. 팔레스타인의 어느 청년은 입원 격리된 노모를 보려고 매일 벽을 타고 올랐다고 했다. 결국 임종도 못한 채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던 청년의 슬픈 스토리 온세계를 울렸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꽃무릇 사진을 바라보는 사이좋은 노부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이런 다정함은 보기 힘든 광경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보고 싶을 때 보고 항상 같이 붙어있는 게 과연 축복이기만 할까?

현대인에게 집은 잠만 자는 곳, 가족은 자기 전에나 얼굴 한번 볼 수 있으면 다행인 대상이었는데, 코로나19가 집의 위상을 바꾸어버렸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재택근무와 학교 원격수업 때문에 눈뜨면서부터 잠잘 때까지 함께였다. 이른바 '돌 밥(돌아서면 밥하기)'하느라 하루가 다 갔다.

식구는 다섯인데, 방은 세 개. 그동안은 좁은 공간을 공유하는 덕에 사람 냄새난다고 위안 삼았는데, 정작 혼자 시간 보낼 곳이 없이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니 사소한 일에도 짜증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전 세계의 이혼율이 높아졌다고 하니 이런 부대낌이 우리 집만의 문제가 아닌 듯.

그러던 중 스물한 살 큰아들이 군에 입대했다. 준비하던 중국 유학길이 코로나로 막히자 숙제부터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입소식도 못하고 입구에서 인사만 나눈 채 훈련소로 향하는 비슷한 또래의 어린 아들들의 박박 깎은 뒤통수들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짠했다.

어릴 때 학교에서 "이름도 얼굴도 알지는 못해도 고마우신 우리 국군 아저씨길래" 정성 들여 위문편지 써 보냈는데, 이제 보니 아저씨는커녕 나라나 제대로 지킬까 싶은 새파랗게 어린 아들들.

낮과 밤을 바꿔 무위도식하던 꼴 보기 싫은 밉상은 어디 가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알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리운 아들만 남았다. 코로나 때문에 퇴소식도, 면회도, 휴가도 금지되어 더더욱.


꽃무릇은 기다란 꽃대 끝에 달린 화려함도 좋고 따라 나오는 잎의 풍성함과 겨울을 날 초록도 기대된다. 굳이 함께가 아니라 그 그리움과 기대만으로도  꽃무릇은 더욱 빛난다. 큰아들의 부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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