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새벽, 꺾이지 않은 의지
밤 11시, 서늘한 기운이 스민 을지로의 허름한 인쇄소.
조선인 인쇄공과 기자들이 숯불 난로 주위에 둘러앉아 신문 한 장 한 장을 손으로 넘기며 실실 웃었다.
활자와 잉크 냄새 속에 웃음이 번지던 그때,
인쇄소의 나무문이 쾅 소리를 내며 터졌다.
검은 가죽 장화를 신은 사무라이들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군화 발소리와 칼집이 부딪히는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순간, 잉크를 묻힌 손들이 공중에서 멈췄고, 활판 인쇄기의 규칙적인 ‘찰칵’ 소리가 기이하게 크게 울렸다.
잠시 뒤, 고이즈미가 숨을 고르며 형준에게 보고했다.
“형님, 인쇄소 놈들 전원 확보했습니다.”
형준은 싸늘하게 눈을 가늘게 뜨더니, 우덕과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형준의 시선이 한 기자의 얼굴에서 멈췄다.
“너 최 기자 맞지? 성곤이랑 같은 신문사.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참 잘도 숨었네.”
그 말과 함께 기자, 인쇄공, 식자공, 심지어 잡부까지 전원 포승줄에 묶여 끌려 나왔다.
종로서 지하 고문실 문이 ‘끼익’ 하고 닫히자, 우덕이 낮게 속삭였다.
“난 내일 아침 신문사로 간다.
거기 싹 쓸어버릴 거니까, 이놈들은 죽이지 말고 적당히만 해. 알아듣지?”
형준은 짐승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아침까지 누구랑 같이 했는지 다 불게 해주지.”
붙잡힌 사람들 앞에서 그는 천천히 말했다.
“너희, 쉽게 입 열 사람들 아니지?
근데 아, 이러다 죽겠구나 싶을 때, 손가락으로 신호 줘.
그럼 그때는 봐줄 수도 있어.”
그 순간 지하실 공기가 바뀌었다.
쇠꼬챙이가 화로 위에서 벌겋게 달아오르고, 전기 발전기의 손잡이가 돌려졌다.
손톱 밑을 찌르는 쇠침, 대못 박힌 상자 속으로 밀어 넣는 발길질,
그리고 전화선에 연결된 전류가 팔과 목덜미를 타고 흐르며 근육을 경련시켰다.
살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물과 피가 바닥에 흥건히 번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비명조차 삼키며 눈빛만 날카롭게 빛났다.
순사들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 이놈들, 그냥 미친 게 아니야. 피가 독이야.”
새벽이 밝아오자, 형준은 피 묻은 손을 털며 우덕에게 말했다.
“독한 놈들이야. 신문사로 가서 싹 털어.”
우덕은 고개를 끄덕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시각, 성곤은 텅 빈 기자석과 사라진 인쇄소 인부들을 바라보며,
차가운 예감이 서서히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