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기록을 남기고, 누군가는 죄를 숨겼다
엔젤 호텔 사건 이후, 경성은 한동안 피 냄새를 품은 채로 굳어 있었다.
거리는 검열과 체포로 뒤덮였고,
신문사마다 “용의자 사살” “결혼식은 무사히 마쳐” 같은 거짓 문장만 남았다.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진실은, 여전히 불 속에서 타고 있었다.
성곤은 불이 꺼진 다락방에서 펜을 쥐고 있었다.
피 묻은 노트에는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결사대의 막내가 들어왔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선생님 저놈을 꼭 죽이겠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반드시 죽일 겁니다!!”
성곤이 벌떡 일어나 그를 붙잡았다.
“안 돼! 지금 가면 개죽음이야! 넌 이 나라의 미래야!”
“선생님!”
“너는 살아야 해. 시간이 흘러야 벌을 줄 수 있어.
지금 네가 달려들어선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소년의 목이 꺾이며 울음이 터졌다.
그는 성곤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성곤은 눈을 감은 채 그의 머리를 감쌌다.
“살아라. 잊지 말고, 기록해라.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싸움이다.”
10년 후 1943년 경성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또 바뀌었다.
태양은 여전히 떠 있었지만, 그 아래엔 두 개의 나라가 공존했다.
무릎 꿇은 조선과, 끝이 보이기 시작한 제국 일본.
라디오에서는 연일 전황이 흘러나왔다.
성곤은 창문을 열며 말했다.
“거짓말만 하는군. 확실한 건 놈들이 무너진다. 이제 정말 시간이 왔어.”
옆에서 막내가 말했다.
“선생님, 정말 끝이 오는 겁니까?”
“그래. 이젠 심판의 때가 온다.
저놈들이 피한 죗값, 그걸 우리가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막내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빛엔 이제 소년이 아닌, 증언자가 될 남자의 눈이 있었다.
그 시각, 형준의 집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비단 카펫 위엔 술병이 놓여 있었고,
벽에는 천황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거실엔 우덕과 규만, 그리고 서아가 모여 있었다.
“서방님!! 오빠들!! 일본은 끝났어요!
이제 갈아타야 해요! 안 그러면 우린 다 죽어요!!”
형준은 담배를 문 채 피식 웃었다.
“이놈에 지지배가 큰일 나려고 미쳤냐? 이런 말 하다 걸리면 잡혀간다.”
규만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아직도 잡혀 사네?”
그러자 우덕이 진지한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제수씨 말이 맞아. 냉철하게 봐야 해.
일본은 이미 기울고 있어.
독립하면 우리 같은 놈들이 어떻게 될지 상상 안 가냐?”
형준은 옆방에서 잠들어 있는 두 아들을 바라봤다.
작은 숨소리가 그의 가슴을 눌렀다.
“그럼 어디로 붙어야 하지? 미국인가, 소련인가?”
서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소련은 안 돼요. 공산주의가 강하잖아요.
거기 붙으면, 일제 협력자들은 싹 다 잡아 죽일 거예요!
돈이든 정보든 싹 챙겨서 미국으로 붙어요!!”
형준이 고개를 갸웃하자, 서아는 그의 등을 후려쳤다.
“둔해서 어찌 야쿠자 생활했는지 몰라!
지금부터 계획 세워요!”
서아가 차분히 말했다.
“자, 잘 들어요.
우덕 오빠는 경보부 출신이니 미국을 등에 업고 경찰로 복귀해요.
독립 직후엔 나라가 어수선해서 군인·경찰 다 부족할 거예요.
그럼 어쩔 수 없이 일제 시절 경찰 출신들이 섞일 수밖에 없어요.”
우덕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제수씨, 머리가 좋아.”
“규만 오빠는 지금 가진 돈이랑 짐 다 챙겨요.
조선이 아닌 일본 본토로 가서 가게 차려요.
처음엔 힘들겠지만 버티고 버티고 특히 미군들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다시 시작해요.”
규만이 입꼬리를 올렸다.
“뭐, 장사라면 자신 있지.”
“그리고 여보는...”
서아가 형준을 바라봤다.
“듣자 하니 일본에 의학실험 관련 부대가 있다던데…
거기 줄을 대서 의료기록을 확보해요.
그 자료를 전후에 미국에 넘기면 다른 사업으로 이어갈 수 있어요.
야쿠자 식구들 데리고 본토로 옮기면 될 거예요.”
형준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게... 살아남는 길이겠지.”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정의보다 생존이 중요해요.
우린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요.”
세 명은 모두 서아가 시키는 대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덕은 사업을 계속하면서도 틈틈이 영어 공부를 했고,
규만은 바로 짐을 싸서 동경으로 떠났다.
형준은 인체실험 부대에 줄을 대서 정보를 빼내기 시작했다.
그는 조용히 자료를 모아 차곡차곡 금고에 쌓았다.
성곤은 독립만 하면 모든 기록을 다 신문으로 찍어서 낼 생각에 설레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글과 사진, 이름이 적힌 메모지들이 수북했다.
막내는 성곤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만약에 그날이 온다면...
일제에 협력한 놈들을 때려잡는 단체를 하나 만들어서 다 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반민족 특별법을 아예 하나 만들어야 해!
그러려면 기록! 기록이 필요해! 열심히 써야 한다.
우리가 적은 기록이 증거가 되고, 우리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1945년 8월.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전쟁은 끝을 향해 달려갔다.
며칠 뒤 라디오에서 천황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본 제국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성곤은 라디오 앞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막내는 주먹을 꼭 쥔 채 말했다.
“드디어... 끝났군요.”
성곤은 천천히 대답했다.
“아니, 이제 시작이다.
이제 우리가 써야 할 진짜 기록이 시작되는 거야.”
창밖엔 긴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빗소리 속에서, 조용히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