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그들의 시간

누군가는 기록했고, 누군가는 다시 살아남았다

by 동룡

해방이 왔다. 그토록 기다리던 날이었다.
그러나 거리의 환호와 태극기 사이로, 나라의 얼굴은 더 불안했다.
해방이 모든 문제를 지워주진 않았다.
오히려 새 판이 짜이자, 사람들은 분열했고,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으로 갈라져 서로를 겨누기 시작했다.

막내는 책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이게 지금 무슨 일입니까 선생님!! 아니!! 다 같이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했는데!! 같은 민족끼리 이게 뭐냐고요!!”

성곤은 잠깐, 한동안 피우지 않았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연기 한 모가 허공에 풀어지자 그는 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이 나라가… 우리 힘으로 독립하지 못해서 그래… 지금은 미국과 소련의 시대야… 미치겠구먼!! 정말 미치겠어!!”


막내는 반민특위법이 나온 것을 다행이라 말했다.
하지만 성곤은 신문을 집어던지며 답했다.
“그러면 뭐 하냐!! 당장 쳐 잡아넣어야 할 녀석들은 싹 다 피해 갔는걸!!”

그의 손에 쥔 신문엔 우덕의 사진과 기사가 떴다.
“우덕은 복귀하자마자 뭐?? 경찰청장??? 경찰청장!!!!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리고 형준이 이놈은!! 미국을 등에 업은 사업가가 되었고!! 우리 민족이 가혹하게 당한 수많은 인체실험 기록을 넘겨서 그걸로 피해나가고 큰돈까지 번다지? 저놈들은 매국노 중에서도 특급 매국노야!! 을사오적도 울고 갈 놈들이라고!!”

성곤의 분노는 잔뜩 부풀어 올랐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적고, 권력을 쥔 자들은 기민하게 옷만 갈아입고 새로운 직함을 달았다.
반민특위법은 생겼지만, 법의 사정권 밖으로 빠져나간 자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현실은 명확했다.
우덕은 다시 경찰 제복을 입고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반민특위법으로 잠시 조사를 받았지만 금세 풀려났다.
경찰 인력이 귀했고, 무엇보다 형준의 돈으로 로비가 돌았다.
형준은 이미 사업가로서, 그리고 정보로 쌓은 자산을 바탕으로 새로운 권력층과 손을 잡았다.

우덕은 조사가 끝난 후, 귀한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형준의 집으로 찾아갔다.
형준은 좋은 위스키 한 병을 오픈하며 우덕을 맞이했다.
식탁 위에 놓인 음식과 술병 사이로, 둘은 서로를 움직인 힘을 확인했다.

우덕은 잔을 들어 시원하게 한 모금을 들이켜고 말했다.
“도와줘서 고맙다!! 그리고 이 모든 건 다 우리 서아씨 덕분이지!! 세상을 보는 눈이 아주 기가 막혀!! 자!! 이젠 우리 세상인가요?”

형준은 짧게 웃으며 위스키 잔을 부딪쳤다.
그의 어깨너머로, 집 안의 사진들은 모두 이전의 업적과 새로 얻은 지위를 나란히 걸고 있었다.


서아는 고개를 저으며 식탁 맞은편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더 기다려야 해요!! 지금 나라가 두 동강 나게 생겼잖아요? 이제 미국과 소련이 싸울 거예요!! 바로 이 나라에서요!! 그걸 대비해야 해요!!”


창밖에선 매미가 울었고, 식탁 위에는 과일 한 접시와 위스키 두 잔이 놓여 있었다.

서아는 차분히 사과를 깎고 있었다.
칼끝이 껍질을 가를 때마다, 얇은 붉은 띠가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며 진지하게 물었다.
“이 땅에서 전쟁이 나면, 가장 이득을 보는 나라가 어딜까요?”

형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음... 미국?”

우덕은 담배를 꺼내 물고 말했다.
“소련?”

서아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요. 일본이에요, 일본.”


“전쟁에 져서 나라가 망했지만, 여기서 다시 싸움이 터지면 미국은 일본을 도와줄 수밖에 없어요.

가장 가까운 거점이니까요.
중국은 이미 공산화됐고, 미국은 절대 일본과 이곳을 버릴 수 없어요.
그래서 결국 일본이 다시 클 거예요.”

서아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엔 계산이 있었다.
그녀는 깎은 사과를 얇게 썰어 접시에 담으며 덧붙였다.

형준과 우덕은 동시에 “아하!” 하며 건배했다.
짧은 웃음이 터졌고, 잔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서아는 과일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우덕 오빠는요, 전쟁 나면 무조건 피난 가요.
멀리, 저 밑으로. 부산으로 가요.
부산은 일본이랑 제일 가까워요.
공산당한테 잡히면 친일 기록이 있는 사람은 다 죽어요.
부산으로 가요. 그게 가장 안전해요.”


우덕은 한숨처럼 웃었다.
“제수씨, 진짜 무섭게 똑똑하네.”

서아는 이번엔 형준을 바라봤다.
“그리고 여보는, 일본에서 전쟁 관련 사업을 준비해요.
미국을 도와요.
전쟁이 나면 나라를 지키겠다고 뛰어들 미친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요.
특히 당신, ‘사무라이 정신’이니 뭐니 하면서 나대면 우리 집안 통째로 무너집니다.
알겠죠?”

형준은 허탈하게 웃었고, 우덕은 옆에서 박수를 쳤다.
“역시 제수씨! 이래서 우리가 산다니까.”

방 안은 웃음소리로 채워졌지만,
그 웃음 뒤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모두가 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고,
그 움직임은 언제든 죄가 될 수 있었다.


한편, 그 시각.
신문사 사무실 한구석, 성곤은 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잿빛 연기가 천천히 천장으로 올라갔다.

그는 짧게 중얼거렸다.
“불안하다… 아주 불안해…
이 나라에 큰 태풍이 하나 더 올 것 같아…”

라이터 불빛이 꺼지며 방은 어둠에 잠겼다.
그리고 창밖, 조용한 여름 밤하늘에는
보이지 않는 먹구름이 천천히 모여들고 있었다.

“해방의 끝에는 또 다른 전쟁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아직 오지도 않은 시대를 이미 삼켜버리고 있었다.”

금요일 연재
이전 25화갈라진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