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산 가는 길
참으로 오랜만에 산악회를 따라 산행을 하게 되었다. 관광버스에 편승하여 등산이나 여행을 떠나는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편의성이 있지만 자주 이용하지 못했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면서도 도심을 벗어나 교외로 나가고 있으면 짓누르는 듯하던 신경성 두통이나 눈자위의 충혈이 씻은 듯이 사라지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편작(扁鵲)의 신술(神術)인들 이렇게 속히, 이렇게 말끔히 낫게 할 수 있을까. 마음의 불안은 환경의 변화로 쉽사리 평정(平靜)을 찾을지 모르나 몸의 불편이 또한 이렇게 속히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신통한 일이다.
나는 마치 오랜 굶주림 끝에 먹을 것을 대하는 사람처럼 창 쪽으로부터 잠시도 시선을 거둘 생각을 잊은 채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완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서울을 동북 방향으로 벗어나고 있을 때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은 아우르고 있는 산과 강이다. 양수리를 분기점으로 하여 남북으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산과 산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 흐르고 있어, 경춘가도를 지나거나 양평 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노라면 항상 도도한 강물과 부드러운 선을 이루며 누워있는 산의 풍광을 대하게 된다. 강물은 맑디맑아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고 강 건너편 산들은 이미 완연한 추색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다지 높지 않은 산등성이의 크지 않은 나무들, 그래서 관목 같이만 보이는 수목들은 마치 캔버스에 여러 가지 빛깔들을 점묘법으로 색칠한 것처럼 화려하다. 아래로 유유자적하는 강물과 위로는 시원스레 펼쳐진 푸른 하늘, 그 틈에 끼어 오색으로 빛나는 산경(山景)의 아름다움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강둑에 줄지어 서서 여름철 한낮의 이글거리던 태양 아래 번들번들한 윤기를 자랑하던 미루나무 잎들은 이제 한 가닥의 바람결에도 차갑게 너풀거리며 노랗게 바래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퇴색 일로에 있는 대지 위에서 홀로 짙푸름을 과시하는 것은 잘 자란 무, 배추 등 김장감들이다. 강가에 무리 지어 흐느적거리며 서 있는 갈대들은 높은 하늘에 흩어진 조각구름들을 쓸어 모으려고 빗질하는 듯한 모양이고, 줄기만 남은 메밀들은 알몸이 부끄러운 듯 온통 시뻘겋게 물들어 수줍음을 감추지 못한 모습을 하고 밭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었다. 느린 몸짓으로 벼를 거둬들이는 농부들에게서는 겨울을 앞둔 을씨년스러움보다 밀레의 농촌 그림에서 보는 포근함이 느껴진다.
용문을 거쳐 광탄리를 지나 비포장 지방 소로로 꺾어들 때, 우리를 실은 버스는 구불구불한 길을 요동치면서 산허리를 감아 돈다. 고개를 넘으며 좁은 골짝을 잘도 뚫고 안간힘 다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럴듯한 산세가 가까이 다가와 저것이 바로 우리가 찾는 소리산(小理山)이겠거니 하면 지나쳐버리곤 하다가 산음리라는 마을의 어느 학교 앞에서 하차하였다.
내린 자리에서 산악회 리더는 코스의 대강을 말하였지만 그게 무슨 큰 도움이 되랴. 처음 대하 세계는 아무리 상세한 설명을 들어도 머릿속에 막연한 개념으로 존재할 뿐이며 한낱 참고에 불과할 것이다.
소리산을 끼고도는 계류를 따라 소로가 길게 나 있는데 우리는 이를 따라 걸었다. 어떤 잎들은 벌써 낙엽의 신세가 되어 밟혔고, 길에는 노랗게 물든 잔디가 보료처럼 깔려 보드랍고 가벼움을 발밑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징검다리로 냇물을 건너갔다 다시 건너오고 이건 장난인가 생각되게 또다시 건너기도 하면서 꽤 먼 길을 걸어야 했지만 그다지 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을 개가 낯선 행렬을 보고 마구 짖어대니까 누군가가 “오해하지 마라, 지나갈 뿐이다.”라고 낮은 소리로 타이르듯 중얼거렸고 어떤 이는 이런 좋은 곳을 내년 봄에 다시 와봐야겠다고 성급하게 말하기도 하며 모두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냇물은 그지없이 깨끗하여 바닥의 수초나 작은 돌들이 훤히 보였지만 그 속에 노니는 고기는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커다란 활 모양으로 휘어진 시내 끄트머리 지점에서 등산로로 진입하게 되었는데 우리는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 태엽 풀린 시계처럼 멈춰 중식의 즐거운 한때를 가지기도 했다.
한동안 산행을 쉰 탓일까, 아니면 식후의 부담 때문일까,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아무 생각 없이 착실히 한 걸음 두 걸음 옮겨 딛기에만 힘쓰고 있을 때 트이지 않는가 싶어 고개를 드니 바로 앞에 남자가 이끄는 수건을 감아쥐고 무거운 걸음을 간신히 떼어놓는 한 여자가 가로막고 있었다. 여자의 동작은 몸집에 걸맞게 커다란 엉덩이가 움직일 때마다 맷돌처럼 원을 그리듯 하고 있었다. 그들을 앞지르고서도 가끔 돌아보곤 하였는데 두 사람은 점점 처지더니 마침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소리산은 이름이 풍기듯 해발 5백도 안 되는 작은 산이므로 아무리 오랜만의 산행으로 어려움이 있어도 한바탕의 헐떡거림으로 오름이 끝나버리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하산 길은 오름 코스에 비하여 길고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참 동안 능선을 타고 내리다가 숲 속을 헤치고 있을 때였다. 선두방향에서 갑자기 떠들썩하여 쉬어들 가는가 하였더니 동행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허리 굽히고 열심히 손놀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도토리 줍기였다. 도토리는 즐비하게 바닥에 널려있었고 그것을 채 다 거두기도 전에 누군가가 나무를 흔들 때마다 여름날 갑자기 듣는 소낙비처럼 후드득 떨어지고는 하였다.
“참 잘하는 짓이야.” 한 남자의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듯 바라보던 이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줍는 것이었다. 올해는 도토리 풍년이라는 말이 전부터 돌더니 역시 이 산에도 실한 도토리가 나무마다 많이도 매달려 있었다.
얼마를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능선 좌측으로 푹 빠진 깊은 계곡이 있는데, 이는 공명 선생이 아니더라도 적의 대군을 몰아넣고 양쪽 산릉 위에서 내려치는 작전을 쓰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협곡이었다. 골짜기 아래쪽에서는 물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면서 음습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주변 나무들은 무성하고 또 그 잎들은 고운 옷으로 갈아입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돌아 나온 길은 바로 이 협곡을 통과하게 되어있었으며 종국에는 처음에 지나간 계류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정상 높이 479미터가 말해주듯 산행 거리는 성에 안 찼으나 산세와 주변 경관에 아기자기한 맛이 있고 조촐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흔히 말하는 공해가 전혀 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깨끗한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어 더욱 즐거웠으며 오늘의 이 기분을 오래오래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9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