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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산 가까운 산(7)

by 김헌삼

산길을 찾아서



산에는 여러 형태의 길이 있다. 처음부터 등산코스로 개발된 경우도 많겠지만 예로부터 나무꾼들이나 약초를 채취하러 다니는 아낙들의 잦은 발길로 다져진 좁은 오솔길, 벌목을 실어내기 위하여 임시로 닦아놓았던 산판길이나 군 작전상 필요로 만들어 놓은 넓은 도로, 또는 산을 사이에 두고 마을 간에 넘나들던 장꾼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자주 다니며 생긴 장터목, 이렇게 생성된 더 많은 길이 이제는 등산객의 산행으로 이용되고 있을 것이다.

산행에 있어서 길은 기본요소다. 산이 거기 있으므로 산에 가듯이 산에 길이 있어 산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산 안내도는 산의 형세와 아울러 주요 등산로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표시해 놓은 귀중한 길잡이다. 막연히 따라나서는 산행이 아니라면 대부분 출발에 앞서 안내도를 펼쳐놓고 이번에 가려는 산에는 어떤 코스가 있으며 그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상세한 지도라도 실제로 현장에 가보면 미흡함이 예사인데, 더구나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처음 가는 산을 지도도 없이, 또는 개념도만 가지고 찾아갈 경우는 제대로 산행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위기감이 앞선다. 그래도 불편과 불안을 감수하며 이러한 산을 굳이 택하는 이유는 역시 애써 찾는 산이 인적도 드물어 호젓하고 깨끗하며 비경이라 할 만한 곳이 많고 또한 모험하는 재미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첫 산행지의 출발기점에서 단번에 제 코스를 찾아 진입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낯설고, 산길이란 것이 대부분 빤히 보이기보다는 숨어 있어서 실마리 찾기가 어렵다. 부산에 1년 반가량 머무를 때 근교 산들을 두루 다녀보고 마지막으로 간 곳은 좌천의 달음산이었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떠나는 산행이어서 색다른 맛이 있었으며 몇 정거장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특히 바닷가를 끼고 달리니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기분을 갖게 되었다.

선험자(先驗者)로부터 대강의 설명만 듣고 처음 나선 길이라 다소 불안하더라도 좌천역에 내린 다음부터는 물어 물어갈 작정이었다. 마침 5, 6명의 등산 차림이 같은 차에서 내려 그들도 달음산이 목적지라 하여 잘됐다 싶었으나 우리 일행의 행보가 지체되는 사이 그들은 앞장서더니 바람같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그래도 이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보이던 입산점(入山點)만은 먼 빛으로 점지해 놨으므로 별다른 문제가 아니리라는 생각이었다. 그 지점은 폐광으로 주변에 크고 작은 돌무더기가 널려있었는데 그 위로 나 있는 발자취를 더듬어 가니 곧 철조망에 가로막혀 막막할 뿐이었다. 주위에는 인적도 없고 먼저 가버린 사람들이 사라진 곳은 분명히 그 부근임에도 길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게 되니 리더로서 동행들에게 미안하고 안타깝기만 하였다. 이 와중에서도 오른쪽 산자락으로 깊숙이 뚫려있는 광굴(鑛窟)을 들여다보고 돌아서려는데 잎 무성한 나뭇가지가 길게 늘어진 사이로 바닥이 잘 다져진 길이 산릉을 타고 뻗어 나간 것이 감지되었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길을 찾아내게 된 것이었다.

또 한 번은 신문스크랩의 안내를 보아가며 하남의 검단산을 찾아갈 때의 경험으로 다소 미흡한 설명에 따른 사소한 오해로 인하여 초입을 알아내는데 애먹은 일이 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광주행 좌석버스를 타고 산 입구인 하산곡동에서 내려 안내에 명시된 대로 학교 앞까지는 무난히 도착했으나 다음이 문제였다.

‘산곡국민학교를 왼쪽으로 끼고도는 시멘트 포장길로 접어들면’이라는 구절의 해석에서 길 아닌 길을 헤매게 되었다. 학교 입구에 당도하자, 시멘트 포장길이 학교를 끼고 왼쪽으로 가게 되어있어 의심의 여지없이 그쪽으로 하여 오르니 5, 6호의 집들이 나타나는 것이어서 잘 맞아 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조금 더 올라가자 이상하게도 길이 희미해지더니 자취를 감춰버렸다. 의심스러우면 현지 사람에게 문의하는 것이 정도(正道)를 알아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주민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다시 교문 앞으로 돌아가 그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서야 「아! 이것이었구나.」하는 확신이 번쩍 들었다. 교문 안 왼편으로 2, 3미터쯤 비스듬한 높이에 다시 철문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학교 옆을 따라 계곡을 끼고 또 다른 시멘트 포장길이 확실하게 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밖의 학교 입구 표시는 마치 진입로를 은폐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이 결과를 놓고 일행 중 한 명이 학교를 중심으로 보면 왼쪽이 맞다 는 것이었다. 그렇다. 좌우 방향설정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며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좌우 표시는 아무 의미가 없고 오히려 혼동만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듯 길을 미리 알고 떠나느냐 또는 알아가면서 가느냐에 따라 심적으로 느끼는 부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초행일 때는 올바른 길인가 또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가고 있는지를 수시로 점검, 확인해야 하니 그만큼 즐기는 기분이 감쇠(減衰)한다. 대로의 교통표지처럼 등산로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길 안내이다. 지리산의 경우 안내판이 서 있는 지점의 이름과 표고, 가려는 방향이나 지나온 곳의 지명과 거리가 명시되어 있고 갈림길마다 빠짐없이 이런 표지가 있어 초행자에게도 충실한 길잡이가 된다.

산속으로 이끌고 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주변의 형상과 분위기에 따라 다양하다. 줄곧 울퉁불퉁한 돌들로 인하여 보행의 리듬과 심신의 평정에 파문을 일으키는 불안정한 길이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갈비가 적절히 깔려있어 저절로 사뿐히 밟히는 편안한 길도 있다. 가시나무가 뻗쳐 있거나 쓰러진 고목에 막혀 이리저리 헤쳐나가기가 험난한 길도 있고 쭉쭉 뻗은 거목에 둘러싸여 겨울에는 포근함을 여름에는 시원함을 아낌없이 주는 쾌적한 길도 있다.

「산 중턱 사람 발자국 난 자리를 어느 기간 계속하여 다닐 것 같으면 길이 만들어지고 얼마 동안 다니지 않는다면 곧 거기에 띠 풀이 우거져 막힌다.」하는 맹자의 말처럼 산길은 등산객들이 심심찮게 다니므로 해서 유지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다녀서 다져지고 훤히 뚫린 것보다 치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우거지고 길로서 겨우 유지될 정도로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야 산길로서는 더 정취가 있다. 그러니 과(過)하지도, 과(寡) 하지도 않게 적당한 사람들이 꾸준히 다니는 길이 가장 쾌적한 산길이 아닌가 한다. (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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