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생활(9)

by 김헌삼



9. 헨리 8세 이야기


'아무리 영국 역사에 관하여 문외한인 사람도 며칠간 영국에 머물면 곧 헨리 8세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의 초상을 자주 대면하게 된다.' 일본에서 펴낸 블루가이드북의 런던 편을 보면 헨리 8세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헨리 8세. 이 이름은 그의 본토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는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에게 잘 알려지지도 내가 잘 알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영국 역사에 관하여 문외한 중의 하나로서 그저 헨리라는 이름이 붙은 왕들이 몇 명쯤 된다는 것을 막연히 기억하고 있었을 뿐 하나하나 개별적인 인물로는 별로 아는 바 없었고 그동안은 그다지 알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라는 구체적인 이름과 처음으로 접하게 된 것은 런던 타워(Tower of London)의 위용이 우리 런던지점 사무실에서 가까이 내려다보이고 있어 이곳의 내력을 현지 직원으로부터 들으면서부터 이었다.

헨리 8세는 여섯 번의 결혼을 했는데 첫 부인 캐서린 아라곤과는 이혼하고 두 번째 비(妃)로 맞았던 앤 볼린은 간통죄를 씌워 처형하였다. 세 번째인 제인 시모어는 그의 숙원이었던 아들을 낳아 주었으나 산후가 좋지 않아 사별하였다. 네 번째 앤 클리브는 보지도 않고 결정하였다가 너무 못생겼다고 이혼했다. 미모의 캐서린 호워드를 다섯 번째로 맞이하였으나 역시 간통으로 처형하였다. 여섯 번째로는 온순하고 박식한 캐서린 파를 맞아 원만히 지냈으나 이번에는 왕 자신이 파란 많았던 일생을 먼저 마치게 되어 사별함으로써 일련의 결혼행진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 두 번째와 다섯 번째 부인이 도끼로 참수 처형된 곳이 바로 이 런던 타워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어찌하여 여섯 번이나 결혼을 하게 되었나 하는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을 위한 전혼(前婚)의 종결형식이 정확하게 「이혼·처형·사별」의 순으로 반복된 점이다. 다만 여섯 번으로 완결될 수 있었던 것은, 세 번째와는 달리 이번에는 장본인이 부인에 앞서 세상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처럼 수차례에 걸쳐 혼사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나 하는 의문도 그렇지만, 그는 이 나라의 역사상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으므로 그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아보고 싶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역사 유물은 그것이 실용되었던 시대와 그 당시의 인물들을 알고 대함으로써, 그것이 싸늘한 폐허나 한낱 고적으로서가 아니라 살아서 숨 쉬는 역사의 현장으로서 재현되기 때문이다.

헨리 8세가 살았던 시기는 1491년부터 1547년까지로 1066년 노르만의 윌리엄 공이 영국을 정복하고 왕위에 오름으로써, 영국 왕정사가 시작된 이래 약 5백 년이 지난 뒤이다. 현시점에서 돌아봐도 또한 약 5백 년 전의 일이니 그는 영국 역사의 중간대에 생존하였던 인물이라 하겠다.

화상(畵像)에 의하면 그는 빨간 머리와 더부룩한 구레나룻에 언제나 패랭이 같은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배는 술통처럼 불쑥 내민 장대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의 신체 크기를 수치로는 알 수 없으나 어느 기성복 점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사람에 맞는 옷도 골고루 갖추고 있다는 선전을 위하여 헨리 왕을 내세워, 런던의 2층버스에 크게 광고하고 다닌 적도 있을 만큼 그가 거인에 속했던 것 같다.

그의 인물 됨됨이에 대하여는 당시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힘이 세고 음식과 도박과 여자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던 키 크고 고집 센" 사람이라 하였다. 또 다른 외교관은 그를 평하여 "내가 본 군주 중 가장 멋진 사람이었다. 그의 안색은 말끔하고 빛났으며 둥근 얼굴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예쁜 여자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는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고 이탈리아 말을 조금 말할 수 있고 류트와 하프시코드를 잘 타며 가사를 보며 노래 부르고 잉글랜드 내에서 누구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외교관다운 외교적인 언사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겠지만 젊은 날의 그는 문무를 겸비한 미남 청년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7살 때인 1509년의 일이었다. 그에게는 '아서'라는 형이 있었는데 이들의 부왕인 헨리 7세는 영국이 당시 유럽에서 이류권(二流圈)에 속해있던 관계로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정략결혼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두 딸을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왕에게로 출가시키고 왕위를 물려받을 아서의 비가 될 사람으로는 당시 인근에서 강대국으로 군림했던 스페인의 캐서린 공주를 맞아들였다. 이때 아서의 나이 15살이었고 그는 이듬해인 1502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왕에 앞서 요절했다. 부왕은 헨리에게 왕위를 이을 때, 형수 캐서린을 왕비로 삼아 스페인과의 우호관계를 지속하도록 신신당부하였는데 헨리 8세를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파란과 문제의 발단은 여기서 비롯된다.

헨리가 왕으로 즉위할 때는 여자에 대한 눈이 뜨이기 전으로 부왕의 당부를 그대로 받아들여 그때 23살의 캐서린과 덜컥 결혼했다. 이처럼 형수를 배필로 삼는 것은 당시 종교적 지배세력이었던 카톨릭의 교의에 명백히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스페인의 로마교황청에 대한 강한 입김으로 하여 이는 쉽사리 묵인될 수 있었다. 그 후 절대권력을 쥐게 된 왕으로서의 헨리에게는 국내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안될 일이 없어야 마땅했으나 단 한 가지 그에게 왕자가 태어나 주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30년 동안이나 왕권을 놓고 랭커스터 가와 요크 가 사이에 장미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왕족 간의 싸움을 아는 그로서는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는 아들을 두어 강력한 후계자로 길러야겠다는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열망이 캐서린에게서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첫애가 아들이었던 감격은 채 실감하기도 전 6주 만에 죽음으로써 사라지고 그 뒤로도 사산 아니면 유산의 연속이었다. 겨우 여섯 번째에야 메리 공주를 얻고 출산이 멎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그는 교의를 어기고 억지 결혼을 한 저주가 자기에게 내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품기 시작할 때, 이미 그 앞에는 검은 머리 까만 눈동자의 개성이 강하고 매혹적인 앤 볼린이 나타나 왕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는 캐서린과 결별하고 앤 볼린을 왕비로 맞아들이기로 작정하고 일을 추진하려니 국내외의 완강한 반대세력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캐서린 비(妃)의 완강한 저항을 비롯하여 토마스 모어 등 확고한 신념이 있는 신하들의 동조 거부, 캐서린의 모국 스페인과 스페인의 영향력 하에 있던 로마교황청의 반발 등. 그러나 그는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말을 듣지 않는 신하들은 반역으로 투옥·처형하고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선언에 이은 이혼과 앤과의 재혼 강행, 급기야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자 영국국교회를 창설하는 획기적 변혁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와 같은 난관을 극복하니 뒤따르는 사소한 일들이야 대수롭지 않게 성취할 수 있었다.

그의 행적을 보면 아이러니컬한 것이 많은데 예를 들면 앤 볼린을 처형하기에 앞서서는 그 언니가 그의 정부(情婦)였다 하여 이 혼인도 성립할 수 없는 것으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소생인 엘리자베스 공주는 적출로 인정하여 후세에 왕위에까지 오르게 한 것이나, 토마스 크롬웰이라는 신하는 영국국교회 창설의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각광을 받은 사람인데 나중에 네 번째 부인을 잘못 중매한 탓으로 전의 일이 전복위화(轉福爲禍)되어 이단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 성이나 귀족의 저택에 흔히 전시되는 값진 미술품 속에 으레 끼어있는 그의 초상 앞에 서면 능히 그러했을 인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는 통이 크고 고집스러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수많은 여인과 교류하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방해되면 옳든 그르든 반역으로 몰아내기도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연산군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영국인들이 그를 폭군이라 단죄해 버리기는커녕 역사의 주역으로 떠받드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이들이 역사를 아끼는 민족이기 때문일까? 헨리 8세가 소동을 피는 중에서도 문물을 숭앙하여 문화유산을 많이 남겼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지금 마담 터소(Madame Tussaud's)라는 밀초 박물관에 여섯 명의 부인을 한꺼번에 거느리고 자랑스러운 듯한 자세로 우뚝 서 있다.(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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